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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87)화 (87/180)

87화

며칠 전. 그러니까, 엘리아스에게 부탁하고서 그다음 날 바로 새가 찾아왔다.

새가 물고 온 주머니에는 종이가 여러 장 들어 있었는데, 화살을 제작하기 위한 의뢰서부터 황녀에게 화살이 전해진 경로까지 샅샅이 기록되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세세하고 정확한 정보에 벨라 역시 놀랐었고, 지금 에릭이 보이는 반응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제가 공작님께 직접 드리면 화내실 것 같아서요. 경께서 찾은 것처럼 전해 드리면 안 될까요?”

“그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며칠간 방 안에만 계셨잖습니까. 아니면 몰래 바깥에라도 다녀오신 겁니까?”

짧은 시간에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늘 여유롭고 단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에릭이 이렇게 질문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은 꽤 낯설었다.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말해 주기엔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아무리 에릭이 편해도 결국은 벨리아르의 사람이었다.

“계속 신문한다면 결국 말씀드리겠지만…… 에릭 경은 제게 그러지 않으실 거죠?”

말간 미소를 곁들인 채 말하는 벨라를 보며, 에릭은 더 이상 무언가를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황당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젠 제 입도 막아 버리시는군요.”

* * *

레오니스는 내일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착용 중인 프리스틴을 보며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일 파티의 주인공은 네가 되겠구나.”

커다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맵시를 살펴보는 프리스틴의 얼굴은 숨길 수 없는 자신감으로 반짝거렸다.

“황실에서 주도하는 연회인데 당연하죠. 내일만큼은 제가 가장 빛나야 한다고요.”

사사로운 감정을 모두 배제한 채 객관적으로 보면 프리스틴의 미모는 칭찬할 만했다. 그녀가 파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레오니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엔 언뜻 벨리아르 공작의 피후견인이 스쳤다. 그날 벨라를 보고선 왜 사람들이 보라색 눈동자를 마녀로 몰아 배척하는지 완벽히 이해하고 말았다.

그건 인간 내면의 추악한 본능이었다. 자신은 감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경외, 질투,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경멸.

왜 공작이 그녀를 손에 쥐고 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레오니스가 보기에 피후견인이라는 핑계는 정말 성의 없는 것이었다.

“요즘은 나가지 않나 봐. 궁술 스승에게 벌써 흥미가 떨어진 건가?”

내내 당당하던 프리스틴의 얼굴이 찰나 굳어졌다. 곧바로 가다듬긴 했지만, 레오니스가 그 순간을 놓쳤을 리 없었다.

“오라버니의 말씀을 새겨들으려고요. 괜히 그런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엮였다간 피곤하기만 하니까요.”

“잘 생각했어. 난 내 동생이 황족의 품위를 지켰으면 하거든.”

프리스틴은 답답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날 이후로 그 남자는 완벽히 사라졌다.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오두막을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흔히 버려진 곳처럼 그저 먼지만 가득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인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프리스틴은 굳이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그 남자가 떠올랐다. 이러다가도 언젠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제 앞에 나타날 것 같았다.

“……오늘 벨리아르 공작도 파티에 참석하는 거죠?”

“건국제의 마지막 일정이니 당연히. ……아, 그 영애도 데려오지 않을까 싶은데. 벨라 베일리, 보라색 눈의 마녀 말이야.”

벨라의 이름이 나오자 프리스틴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굳이 그 이름은 또 왜 꺼내는 건지.

“그 영애는 사교계에 데뷔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특별히 초대장을 보냈어.”

“……오라버니께서요?”

“뭐,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오라버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프리스틴. 그 영애는 멀쩡하던데.”

레오니스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쉰 프리스틴은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네, 멀쩡하겠죠.”

“왜 멀쩡할까?”

사냥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묻는 것이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프리스틴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프리스틴, 내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지금 털어놓도록 해.”

이렇게 떠보는 걸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공작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날 일과 관련해서는 세상에 단 한 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조용한 것 아니겠어요?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다면 벨리아르 공작이 이리 조용하지 않겠죠. 그의 성격을 몰라서 그래요?”

“너무 잘 아니까 이러는 거지.”

“……저, 이제 벨리아르 공작에 대한 마음은 접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그에 관련된 얘기는 꺼내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이 진심이었으면 좋겠구나.”

“오라버니, 바쁘지 않으세요? 저와 이렇게 잡담이나 나눌 시간이 없으실 텐데요.”

“안 그래도 이제 가 보려던 참이야. 오라버니가 동생과 시간을 좀 보내겠다는데. 너무 쌀쌀맞아, 프리스틴.”

“에드윈 오라버니는 잘 지내고 있죠?”

“그럼, 당연하지. 아주 즐겁게 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하필 이럴 때 휴양을 가시다니. 건국제 동안 이런저런 행사가 귀찮아서 도망간 게 분명해요.”

“그러게나 말이다.”

레오니스는 태연하게 대꾸하곤 방을 빠져나왔다. 긴 복도를 지날수록 버릇처럼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집무실로 가니 그의 보좌관인 워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레오니스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 워렌을 지나쳐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의 얼굴로 조소가 비쳤다.

“참 다행이지. 평민들은 황족이 이리 아둔한 줄 모르니 말이야.”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요.”

평민들은 그저 벨리아르 공작의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려진 이면은 더욱 심각했다. 이 거대한 제국이 실은 벨리아르 공작의 손바닥 안에서 굴러가고 있으니.

아무리 개국 공신이라지만 그래 봤자 일개 귀족이었다. 고귀한 핏줄을 물려받은 황족이 고작 귀족 한 명에게 대대로 휘둘리는 건 상당히 잘못된 일이었다. 지금 바로잡지 못한다면, 황가는 앞으로도 쭉 공작의 허수아비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아버지고 동생들이고 다 그놈에게 미쳐서는……. 공작의 움직임은 어때?”

“그쪽에서도 겨우 몸종 하나 죽은 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니 그 일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프리스틴에게 사냥대회에서 그 영애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을 종용한 건 자신이지만, 설마 누군가 죽을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것이 한낱 몸종이라 다행이지, 만약 그 영애가 죽었다면 일이 제법 커질 뻔했다. 레오니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런 뒤치다꺼리도 이젠 그만할 때가 되었지. 에드윈의 소재는 아직인가?”

같은 핏줄로 이어졌지만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황제인 아버지는 공작에게 굽신거리기 바쁘고, 여동생은 헛된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질 않나, 2황자는 아둔한 데다 존재 자체만으로 거슬렸다.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사람을 풀어 백방으로 찾고 있습니다. 곧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차후에 뒤탈이 없으려면 제 동생인 에드윈까지 처리해야 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에드윈이 돌연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대외적으로는 휴양을 간 것이라고 알려 놓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내일 일만 제대로 끝내면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아. 준비는 철저히 마쳤겠지? 내일은 절대 실수가 있어선 안 돼.”

하지만 그런 것들도 내일 연회에 비하면 중요도가 떨어졌다.

“예, 틀림없이 준비해 놓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이 지나면, 새로운 태양이 뜰 테니까요.”

“섣불리 긴장을 늦추지도 말고. 이것 또한 새로운 시작일 뿐이니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선 썩어 빠진 허수아비를 쳐 내고 자신이 그 위를 밟는 것이다.

* * *

같은 시각, 벨리아르는 초대장에 적힌 벨라의 이름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이렇게 친절히 여지를 준다면, 기꺼이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올해는 레오니스가 보낸 초대장이 작년의 두 배라지.”

“예, 귀족 대부분에게 초대장을 보낸 듯싶습니다. 그만큼 연회의 규모도 상당히 크게 준비했다더군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항상 경계해야지.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그럼 그저 머릿수가 필요하다는 건데.”

“어수선할수록 숨기 쉬우니까요.”

“그럼 무언가 숨을 만한 짓을 하겠다는 거지.”

레오니스는 아직 밀수한 독을 사용하지 않았다. 최근 그의 행적을 주의 깊게 살핀 결과, 그 독의 사용처는 거의 확실해졌다.

그는 오랜 시간 기회를 노리고 있고, 내일은 황족을 비롯해 많은 귀족이 모이는 자리였다. 표적이 있고, 화살도 준비되어 있으며, 관중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우연한 사고도 뒤따르는 법이다.

“한동안 바빠지시겠습니다.”

벨리아르는 벨라의 이름이 적힌 초대장을 톡톡 건드렸다.

“내일 벨라를 데려갈 거야. 초대했으니까 가야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무언가 일이 일어날 텐데, 그걸 내가 나서서 정리하려면 명분이 필요하잖아.”

그 명분으로 벨라를 이용하겠다는 소리였다. 그가 벨라를 이용하는 건 처음이 아니기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에릭은 어쩐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의 걱정과 달리 벨리아르는 평소처럼 냉담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내가 가진 건 이용해야지.”

에릭은 비로소 그가 어째서 벨라에게 귀족 영애의 신분을 주었는지 이해했다. 단순히 평민보다는 귀족 영애인 것이 더 써먹기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제 주인은 절대 쓸모없는 것을 거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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