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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86)화 (86/180)

86화

“조사해 본 결과, 최근에 그 독을 거래한 사람은 두 명이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모르가타 왕국 사람이라 이번 일과의 접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 말인즉, 현재 제국 내에서 그 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황태자뿐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레오니스로서는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했을 테지만, 아무리 신뢰 높은 중개상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이익을 좇는 장사치였다.

만에 하나 벌어질 일을 대비해 이런 비밀 장부를 만들어 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위험한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줄 수단이니 말이다.

에릭에게 이 장부를 넘겨주고 목숨을 건졌으니, 그 중개상의 준비성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래도 꽤 머리를 굴렸네. 디어린 차는 연막이었다는 거지.”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프리스틴이 이 독을 같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부엔 레오니스의 흔적뿐이었다.

“이러면…… 둘이 엮기 편하긴 하겠는데.”

대충 사건의 전말이 그려지긴 했지만, 황녀를 제대로 엮으려면 이 독을 써서 치치를 죽인 것이 그녀임을 입증할 증거가 필요했다.

“화살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

그의 물음에 에릭은 고개를 숙였다.

“……찾지 못했습니다.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있으나 도저히 꼬리가 잡히질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짧은 시간 동안 제국 전체를 쥐 잡듯 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꼼꼼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에릭의 성격상 어떻게든 정보를 알아내고야 마는데, 이번엔 정말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질 않았다.

여태껏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에릭으로서도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것을 벨리아르가 제일 잘 알기에 딱히 질책하진 않았다.

“네가 알아내지 못할 정도면 네 잘못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 화살의 출처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일에 조금 차질이 생기는 건 사실이었다.

지금 풀리지 않는 문제는 황태자가 이 독을 들여온 것과 치치의 죽음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황태자가 사들인 독으로 치치가 죽게 된 것일까. 그것을 해결하려면 황녀를 압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화살의 출처를 알아내는 것뿐이었다.

최근 프리스틴이 보인 행동은 상당히 이상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를 알고 있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도 모른 채 그를 자극했다.

그건 제 형제와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 그와 만났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에릭이 찾을 수 없는 정보라면……. 흩어졌던 조각이 조금씩 맞춰지는 듯했다.

그때, 저 멀리서 걸어오던 벨라가 그의 시야에 잡혔다.

오랜만에 방에서 나와 저택 안을 거닐던 벨라는 멀리서 벨리아르의 모습을 발견하곤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에릭과 무언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섣부르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벨라는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그를 발견하고 바라보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그의 존재만으로 온몸이 공포로 덜덜 떨리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를 떠올리면 다른 공포가 앞섰다. 저를 향한 그의 관심이 사그라들까 두렵고, 그러다 언젠가는 무심하게 내쳐질까 무서웠다.

치치의 죽음이 더욱 슬펐던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자신 역시 쓸모를 다하면 그리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건가 싶어서.

어느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벨라는 버릇처럼 입을 벙긋거리다, 여기서 말해 봤자 그에게 소리가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보이지 않는 사슬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처음 그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벨라는 무거운 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앞까지 다가가자 그는 서서히 인상을 찌푸렸다. 미처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가 거친 손길로 팔을 잡아당겼다. 벨라는 순식간에 그의 코앞까지 끌려갔다.

“밖에 나갔다 왔어?”

“아니요, 저택 안에만 있었어요.”

머릿속은 엉망인데 웬일인지 말을 더듬지도 않고 술술 뱉어 냈다.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빠듯했으나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벨리아르는 고개를 숙여 벨라의 뺨 가까이 코끝을 댔다. 다시 한번 그의 단정한 미간이 좁아졌다.

“근데 왜 이딴 냄새가 나지.”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이 상당히 위협적이라 벨라는 굳어 가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정말이에요.”

“벨라, 낯선 사람 만난 적 있어?”

머릿속에 곧바로 엘리아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엘리아스가 제 이마에 입맞춤을 남긴 것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확실해?”

그가 다시 한번 물었을 때, 벨라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수백 번을 더 물어도 벨라는 엘리아스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고가 온몸을 휘감았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곧이어 그녀의 이마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벨라는 그에 순응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엘리아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한없이 무거웠고, 마치 뜨거운 낙인이 새겨지는 듯했다. 그가 입술을 댄 채 나직이 읊조렸다.

“벨라, 네가 날 속이는 짓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으면 해.”

그땐 정말, 죽이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벨라는 움찔거리는 손끝을 천천히 말아쥐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흐릿한 안개 같았다.

* * *

“에릭 경, 혹시 시간 있으세요?”

시간이 없는 걸 알면서도 애꿎게 물었다.

에릭은 대놓고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벨라의 방에 들러서 상태를 확인했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그의 일정을 가늠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간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식사는 제대로 하셨고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식사는요.”

피곤함에 따라 점점 짧아지는 인사를 보며 에릭도 사람이긴 하구나 싶었다. 오늘은 그래도 제법 인사가 길고 피곤도 덜해 보였다.

“제 시간이 필요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그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겠죠.”

“오랜만에 같이 산책을 할까 해서요. 이곳에 와선 못했으니까……. 바쁘시면 괜찮아요. 그냥 가볍게 해 본 소리예요.”

에릭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랑 산책하는 게 좋으셨습니까?”

“네, 그럼요.”

의외라는 듯 묻기에 벨라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물론 그가 자신의 감시역임을 알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에릭과의 산책을 기꺼워했다.

“치치가 없으니 외로우신가 봅니다.”

아, 에릭이 제 말을 조금 오해한 듯싶다. 오랜만에 같이 산책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에릭은 치치가 없으니 자신을 대신 찾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혹시.”

“아니요, 아가씨께서 지금 무엇을 생각하시든 그런 거 아닙니다.”

에릭 역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곤란해하는 벨라의 생각을 눈치채고선 빠르게 말을 잘라 냈다. 벨라는 옅게 웃고 말았다.

“사실 고민이 하나 있는데, 말할 사람이 에릭 경뿐이라서요. 정말 같이 산책하고 싶기도 하고요.”

에릭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베른에서는 매일 벨라를 산책시키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수도에서는 그저 상태만 확인하라고 했다. 그럼 거기까지가 제 일이었다.

베른에서처럼 같이 산책을 하는 건 시키지 않은 괜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제 주인의 상태를 보아선 그건 생각보다 심기를 거스르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외출 중이고 언제쯤 돌아올지 에릭은 잘 알고 있었다. 잠깐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라면 큰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우리, 주인님께는 비밀로 할까요.”

괜히 그의 귀에 들어가게 할 필요는 없으니 한 말이었다. 그러나 벨라는 대답 대신 조금 신기하다는 얼굴로 에릭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에릭 경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 낯설어서요.”

그는 사뭇 황당하다는 듯이 웃고선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간이 그리 많진 않으니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네.”

벨라는 에릭이 나가자마자 서랍을 열어 손수건 밑에 깔린 종이를 꺼내 챙겼다. 그 외에는 딱히 준비할 게 없었기에 겉옷만 걸치고선 밖으로 나섰다.

에릭은 일부러 사람이 없는 쪽으로 벨라를 이끌었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던 무렵, 에릭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고민이 뭡니까?”

“음……. 치치에 관련된 거예요. 그 전에 경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아는 선에서는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벨라는 수없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공작님께서…… 황녀 전하를 마음에 두셨나요?”

말하는 순간에도 너무 과한 질문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 만큼 힘겹게 나온 질문이었다. 그러니 다 물어 놓고도 혀끝에 진한 후회가 남았음은 당연했다.

원체 눈치가 빠른 에릭은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주인님의 마음에 대해선 제가 감히 답할 수 없지만, 다른 건 말해 드릴 수 있습니다. 주인님께선 치치의 죽음을 그저 조용히 덮고 넘어갈 생각은 없으십니다.”

그 말은 상당히 의외였기에 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요? 제게는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잘 생각해 보면 그가 치치의 죽음을 아예 덮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그의 태도를 보며 자신이 유추한 것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에릭에게 할 부탁이 조금은 수월할 수도 있겠다. 무거운 고민에 그녀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결국, 벨라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에릭 경.”

그녀의 부름과 동시에 한 걸음 앞서가던 에릭이 뒤를 돌아보았다. 벨라는 방에서 챙겨 왔던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게 도움이 될까요?”

종이를 받아 들어 읽어 내려가던 에릭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내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중 가장 선연한 것은 의심이었다.

“……이걸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에릭이 제국 전체를, 그것도 모자라 주변 나라까지 뒤졌으나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벨라가 건넨 종이에는 치치를 죽인 화살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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