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저를 찾아와 주실 수 있을까요?]
엘리아스는 벨라의 이런 엉뚱한 면을 좋아했다. 벨리아르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이리 먼저 저를 부르다니. 예나 지금이나 참 재밌는 여자였다. 엘리아스는 픽 웃으며 편지를 테이블 위로 던져 놓았다.
“다녀올게. 집 잘 지키고 있어.”
그는 편지를 전해 준 새를 한 번 쓰다듬고선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벨라는 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창가에 붙어 있었다. 새가 편지를 잘 전해 주었으려나. 지금쯤 엘리아스가 편지를 봤을까. 언제 올지, 정말 찾아오긴 할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그가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똑똑――.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벨라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저를 바라보고 있던 엘리아스와 눈이 마주쳤다. 벨라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버릇처럼 입을 틀어막았다. 상당히 놀라는 모습을 보며 엘리아스는 짓궂게 웃었다.
“반응이 재밌네요. 몰래 나타나는 보람이 있어.”
벨라는 너무 놀라 거세게 요동치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러면서 허둥지둥 문 쪽을 살피는 모습에 그는 더욱 즐거워 보였다.
“……뭐예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왜 거기에…….”
엘리아스는 능청스럽게 방문을 가리켰다.
“아, 오늘은 창문이 닫혀 있고 이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복도에 사람들도 많이 지나다니잖아요.”
절대 정상적인 경로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엘리아스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렇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지 말아요. 눈앞에 대놓고 나타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뭐, 언제는 그의 등장이 정상적이었나. 그러나 이번에도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벨라로서는 그가 이렇게 신비한 모습을 보여 줄수록 제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커질 뿐이었다.
“정말 와 줄 줄 몰랐어요.”
“벨라가 내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찾아오겠어요.”
급해서 편지를 짧게 쓴 것이 의도치 않게 엘리아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꼴이 돼 버렸다. 무슨 부탁인지까지 구구절절 써 놓았다면 그는 무시했을 수도 있었다.
“제가 이런 부탁할 사람이 당신밖에 없었어요. 와 줘서 고마워요.”
“아직 부탁을 들어주겠다고는 안 했는데. 일단 말해 봐요.”
사실 엘리아스도 겉으로는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벨리아르에게 들키는 것은 그에게도 상당히 곤란한 일이기에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벨라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치치가 어쩌다 죽게 되었는지 말하다 보니 목이 살짝 멨다. 엘리아스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친구를 죽인 범인을 찾도록 도와달라는 거예요?”
“……네. 제가 직접 알아보고 싶지만, 저는 이 저택에서 나갈 수가 없어요. 공작님 몰래 알아보고 싶은데, 부탁할 사람도 마땅치 않고…….”
엘리아스의 얼굴 위로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뱉더니 곧이어 짧게 웃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정확히 무엇을 도와주면 될까요?”
엘리아스는 벨라의 부탁으로 자신이 잃게 될 것을 간과했다. 벨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날 숲에서 보았던 화살의 생김새였다.
“이렇게 생긴 화살이었어요. 일반적인 화살이랑 달라서 출처만 알면 누가 범인인지 범위를 좁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엘리아스가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는 편이 아닌데도 일반 화살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엘리아스의 표정이 설핏 가라앉았다.
늘 여유롭게 웃던 얼굴에 그늘이 지니 벨라는 자신이 너무 어려운 부탁을 했나 싶어 걱정이 들었다. 엘리아스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참…… 곤란한 부탁이네요.”
“……그렇겠죠? 화살을 만드는 곳이 한두 곳도 아니고……. 음, 그럼 다른 방법을…….”
부탁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기에 다른 좋은 방법이 또 없나 생각해 보려던 찰나, 엘리아스가 종이를 가져가 품에 챙겨 넣었다.
“대신, 나도 당신에게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벨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가진 것은 거의 없지만, 엘리아스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보답할 생각이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드릴게요.”
엘리아스는 굳은 의지를 내보이는 벨라를 보며 빙긋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신의 소중한 것 중 한 가지를 내게 주세요.”
“……제 소중한 것이요?”
“네. 물질적인 것 말고, 당신의 마음이나 기억 같은 것 중에서요.”
엘리아스가 요구하는 건 대놓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마음이나 기억이라니. 그런 것을 준다고 쳐도 대체 어떻게 줘야 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걸 주는 게 가능한가요……?”
“내가 알아서 가져갈 테니 벨라는 걱정하지 마세요. 단, 당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이어야 해요.”
“그럼 그걸 주게 되면…… 저는 그 마음이 없어지거나 기억이 사라지는 거예요?”
“네. 말 그대로 내게 주는 거니까요. 그래도 내가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소중한 마음이나 기억을 하나 지워야 한다니. 현실성이 없어서 잘 와닿진 않았지만, 엘리아스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 정도라면 분명 엘리아스가 부탁을 확실히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치치의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게 될 테니,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네.”
“그렇다면 뭐, 나도 도와줄 만한 가치가 있죠. 벨라, 부디 내가 받을 대가가 당신의 아주 소중한 것이길 바라요.”
엘리아스가 빙긋 웃으며 대가를 강조했다. 엘리아스가 그런 모습을 보이니 분명 그 화살에 무언가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엘리아스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잘 생각해 볼게요. ……가장 소중한 것으로요.”
“저도 확실히 알아봐 줄게요. 거래는 확실해야 하니까. 이 문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엘리아스.”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벨라를 보며 엘리아스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내비쳤다.
“그런데 벨라, 이거 좀 손해 보는 거래라고 생각 안 해요? 아니면 마음이나 기억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그거, 상당히 괴로운 일일 텐데.”
이대로 치치의 죽음을 묵인한 채 평생 이 기억을 안고 사는 게 더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벨라는 딱히 후회하지 않았다. 아직 정확히 어떤 것을 그에게 줄지 결정하진 않았지만, 충분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가 치치한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거니까요.”
고민 없이 나오는 대답에 엘리아스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눈빛을 아주 먼 옛날에도 본 적이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굳은 의지. 문제는 그 마음이 다른 이를 위한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엘리아스는 당장이라도 제 형제에게 달려가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것이라면 작은 생각 하나까지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그가 과연 어떻게 분노할까.
엘리아스의 입가로 선선한 미소가 번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이었다.
“……굳이 내가 안 건드려도 됐을 것 같네.”
“네?”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대가는 나중에 받으러 올 테니까 천천히 고민해 봐요. 그럼 가 볼게요.”
“조심히 가세요. ……들키지 말고요.”
그녀의 걱정에 엘리아스는 옅게 웃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다 무언가 잊었다는 듯 다시 벨라에게로 몸을 돌렸다.
앞으로 바짝 다가온 것도 모자라 그의 얼굴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벨라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마로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잘 있어요, 벨라.”
숲속의 새소리처럼 가볍게 귓가를 스치는 인사였다. 하도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벨라는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눈을 뜨니 엘리아스는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진 채였다. 남은 건 이마에 닿았던 입술의 생생한 촉감뿐이었다. 벨라는 얼떨떨하게 이마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해.”
매번 이렇게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벨라는 그제야 해서는 안 되는 거래를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 * *
베른의 국경을 넘으려다 걸린 짐마차 몇 대가 수도의 벨리아르 공작저로 보내졌다. 밀수품 단속을 강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덜미가 잡힌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 에릭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수도에서 가장 크게 가지를 뻗치고 있는 중개상을 붙잡아 고문하고, 비밀 장부를 빼내 오는 것 또한 그의 일이었다.
“주인님, 이것 좀 보십시오.”
밀수품들을 살펴보고 있던 벨리아르에게 에릭이 두툼한 장부 하나를 건넸다.
“여태껏 거래 내역이 담긴 장부입니다. 이자가 소만에서 넘어오는 대부분의 밀수품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벨리아르는 장부의 앞부분을 대충 훑어보다, 에릭이 표시해 놓은 곳을 펼쳤다. 그곳에는 ‘레온’이라는 이름으로 극독을 거래한 내역이 있었다. 그 이름은 황제가 사석에서 제 맏아들을 부를 때 쓰는 애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