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었는지, 에릭이 잠시 침묵했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작 치치가 죽었을 뿐이잖습니까.”
애초에 치치가 그런 쓸모조차 없었다면, 투기장에서 굴러 본능적인 육감이 발달해 있지 않았다면 벨라에게 붙여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치치는 완벽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런 치치를 황녀가 죽였다고 하나 똑같은 방법으로 응징하는 것은 에릭으로선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프리스틴은 벨라를 쏘려고 했던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멀쩡했다. 이번에도 벨리아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중요한 건 치치가 죽은 게 아니라, 벨라를 죽이려고 했다는 거지.”
벨라를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 프리스틴이 그의 손에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 * *
울음을 참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치치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오니까 벨라는 아예 머릿속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누워 있기만 하니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때가 되면 의무적으로 식사를 하고,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아 하염없이 방 안을 서성이다 몸이 버티지 못할 때쯤 되어서야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러니 낮엔 자다 깨기만을 반복했다. 몽롱한 상태로 꿈과 생각이 뒤섞여 몸이 자꾸만 늪에 잠기는 듯했다.
그가 커튼도 치지 말라고 했는지, 소렐 부인은 틈틈이 방에 들러 커튼을 활짝 열어 놓았다. 눈치 없이 쨍하게 밀려드는 햇살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힘없이 깜빡이는 시야로 창문 너머의 풍경이 흐릿하게 펼쳐졌다. 제게 날개가 있다면, 저 너른 강 위로 날아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작은 엽서를 문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창가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꿈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자꾸 저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를 보다 보니 번뜩 정신이 들었다.
“어, 너는…….”
오랜만에 말을 하니 제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살짝 몸을 일으키자 새가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열심히 존재감을 뿜어 댔다. 벨라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너, 엘리아스의 새 아니니?”
삑삑――.
창문을 열며 물으니 새는 대답이라도 하듯 가늘게 울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작은 새를 만나자 반가운 마음이 벅차도록 차올랐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인사하려고 손바닥을 내밀자마자 새는 총총 다가와 물고 있던 엽서를 툭 내려놓았다.
“……이거, 나한테 주는 거니?”
새가 날개를 펼치며 우렁차게 삐악, 하고 울었다.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해서 벨라는 활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웃는 건지 어렴풋이 헤아려 보며 엽서를 펼쳤다.
왼쪽 면엔 그림이 있고 오른쪽엔 짧은 편지가 쓰여 있었는데, 그림에 먼저 눈길이 갔다. 수채 물감으로 몽글몽글하게 그려 낸 숲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기사들에게 쫓기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마녀가 숨어 사는 숲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주님이 잠들어 있을 것 같은 그런 청아한 숲이었다.
“예쁘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그림을 쓸어 보았다. 바싹 마른 초록 물감에서 배어 나오는 녹음의 향이 짙었다. 벨라는 옆에 쓰인 짤막한 편지로 눈길을 주었다.
[동쪽에 있는 먼 나라의 숲이에요. 벨라는 숲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내가 직접 보고 그렸어요.]
엘리아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까.
상당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될 만큼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벨라는 아직 날아가지 않은 새를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오늘은 네게 줄 게 없어.”
까맣고 동그란 눈이 빤히 그녀를 향했다. 삐악거리지도 않고 보고만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더해졌다.
“다음에 또 올 거니? 그럼 빵을 가져다 놓을게.”
그제야 새는 두어 번 울고서 홀랑 날아가 버렸다. 인사할 틈도 없이 가 버린 걸 보니 살짝 삐진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녀만의 생각이었다.
“……간식거리 좀 놔둘 걸 그랬네.”
왠지 모르게 새가 다음에 또 찾아올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간식을 준비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벨라는 다시 엽서로 눈길을 내렸다.
몽글한 수채화는 먹먹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리 멀지도 않은, 사냥대회 때 함께 숲을 거닐던 치치와의 추억이었다. 무심코 떠올렸을 뿐인데 순식간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치치도 자신이 이렇게 울고 있기만 하면 슬퍼할 텐데. 이미 하늘에서 저를 지켜보며 한숨을 폭폭 내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사이, 기억은 멋대로 흘러 기어코 치치가 화살을 맞는 순간까지 가고야 말았다.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했다. 빠르게 날아와 치치의 어깨로 박힌 화살, 그리고 다급히 도망가던 여자의 뒷모습.
“프리스틴 황녀…….”
벨라는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 뒷모습은 황녀를 연상케 했고, 그녀라면 거기서 화살을 쏜 이유도 어느 정도 추리할 수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녀는 분명 베른에서부터 제게 적대적이었다. 원래 자신을 쏘려던 것일 테다. 치치가 대신 맞았을 뿐이고.
하지만 이것들은 다 제 생각일 뿐, 황녀의 소행임을 입증할 수단은 될 수 없었다. 그러려면 무언가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벨라는 괴로운 기억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유독 치치에게 날아왔던 화살의 모양이 잊히지 않음을 깨달았다.
“……화살, 화살이 특이했는데.”
정확히는 화살 깃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에서 종종 보았던 갖가지 화살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이었다. 다른 화살에 비해 깃이 너무 화려했다.
그렇다면 특수하게 제작된 것이라는 소린데, 그 화살을 어디서 제작했는지 알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데 어떻게…….’
소렐 부인이나 시에나에게 부탁하기엔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니, 분명 알게 되겠지.
그가 알면 또 허튼 짓거리를 한다며 화를 낼지도 몰랐다. 가뜩이나 치치의 죽음을 조용히 덮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자신이 추측하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을 테니, 파헤치려 하지 않는 것은 상대가 황녀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처럼 정말 황녀와 그런 사이라면 약혼자를 지키려는 건 당연한 선택일 테니.
“벨라,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아니야.”
그가 원하는 사람은…… 프리스틴 황녀가 아닐까. 문득 든 생각에 벨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엘리아스…….”
생각해 보면 엘리아스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다. 경비가 삼엄한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드는 데다 눈동자 색을 바꿔 놓질 않나,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가 나타나기까지. 사람이 맞긴 한 걸까.
그러니까 더욱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벨리아르 공작에게 들킬 우려 없이, 무엇이든 알아내 줄 것만 같은 사람.
엘리아스에게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지는 다음에 새가 왔을 때 보내면 되니까, 문제는 펜과 종이를 구하는 것이었다.
벨라는 버릇처럼 촛불로 다가갔다가 멈칫거렸다. 여태껏 그에게 들킬까 봐 엘리아스의 흔적은 모두 태웠는데, 이번엔 엽서를 태우기가 아까웠다. 이렇게 멋진 그림을. 잠시 방 안을 둘러보며 엽서를 숨겨 놓을 만한 곳을 살폈다.
“서랍은 절대 안 되고, 음……. 침대도 소렐 부인이 매일 건드리니까…….”
수많은 가정을 해보다 선택한 곳은 결국 서랍 안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는 건 아니고, 어머니의 손수건으로 잘 감싸 두었다. 이 손수건은 건들지 않으니 방 안에서 들킬 위험이 제일 적은 곳이었다.
이후, 저녁 식사를 마치고선 에릭이 찾아왔다. 오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베른에서부터 거의 매일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의 일과 중 하나인 듯했다.
“오늘은 괜찮아 보이시네요.”
“온종일 울고만 있으면 치치도 슬퍼할 테니까요. 이제…… 조금씩 노력해 보려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주인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벨라는 옅게 웃으며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에릭이 아니면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었기에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 필요한 게 있어요. 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하셔서.”
“인형을 가져다드릴까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꺼내는 말에 벨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농담하신 거죠?”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에릭의 무던한 얼굴이 설핏 흐트러졌다.
“제 말이 그렇게 장난스럽게 들립니까? 다들 저더러 너무 딱딱하다고 하던데.”
표정을 보니 그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인형을 가져다주겠다는 게 진심이었다는 소리다. 이쯤 되니 정말 가져다달라고 하면 그가 어떤 인형을 들고 올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인형은 없어도 돼요. 펜이랑 잉크를 좀 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 종이도…….”
“음.”
곤란한 요구였던 걸까. 에릭이 짧게 소리를 내며 대답을 고민했다.
“……안 될까요?”
“어디에 쓰시려고요?”
아, 용도를 묻는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어 당황한 벨라는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시간을 끌면 의심을 살 것 같아 머릿속에 드는 생각 중 아무거나 말했다.
“그게……. 그림, 그림을 그리려고요. 저기 창밖을 보고 있으니까 풍경이 너무 예뻐서요.”
다행히 에릭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펜보다는 물감과 붓이 더 필요하시겠는데요.”
맞는 말이었다. 에릭은 담담하게 그녀의 거짓말을 꼬집었다. 벨라는 얌전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죠.”
그럼 붓으로라도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에릭이 넌지시 말을 붙였다.
“그림도 그리시고, 일기도 써 보시죠. 마음을 정리하시는 데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 일기. 일기 좋네요.”
일기를 쓰려면 펜과 잉크가 필요하니까, 적당한 핑계였다. 그 핑곗거리를 에릭이 제공해 줬다는 게 조금 얼떨떨할 뿐이었다.
“그럼 쉬고 계세요. 말씀하신 것들은 내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에릭 경.”
다음 날, 에릭은 벨라가 말했던 것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틀 정도가 지나자 새가 또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물고 찾아왔다. 이번엔 드넓은 바다 그림이었다.
또 아름다운 그림에 빠져든 나머지 새에게 편지를 전해 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벨라는 이번에도 엽서를 어머니의 손수건으로 싸 고이 숨겨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