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프리스틴, 처음 참여해 본 사냥대회의 소감은 어때. 재밌었어?”
프리스틴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자연스럽게 표정을 숨겼다.
“……뭐, 나쁘지 않았어요.”
생각보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조금 초조하던 차였다. 그 영애가 아니라 몸종이 대신 화살에 맞았기 때문일까. 하긴, 그런 평민 하나 죽어 나간 것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오라버니의 말대로 애초에 사냥터이니 어디서 화살이 날아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사실 그날, 분노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기에 조금 후회하고 있던 차였다. 만약 정말 그 영애가 화살을 맞았다면 일이 들불처럼 번졌을 테니 차라리 그렇게 마무리된 것이 제겐 잘된 일이었다.
“활 연습을 제법 열심히 했나 봐. 생각보다 많이 잡았던데.”
프리스틴은 만약의 일을 대비해 토끼의 사체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자신은 그저 홀로 사냥을 나갔고, 토끼 두어 마리를 잡아 왔을 뿐이라는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
“오라버니가 잘 가르쳐 준 덕분이죠.”
“우리 프리스틴이 의외로 활에 소질이 있는걸. 시간이 없어서 고작 두 번밖에 가르쳐 주지 못했는데 그리 빠르게 습득하다니 말이야.”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이었다. 프리스틴은 레오니스를 향해 눈매를 고이 접어 웃었다.
“스승이 훌륭하니까요.”
레오니스는 동생의 살가운 말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아 앉은 후, 프리스틴을 향해 여유로운 질문을 던졌다.
“오늘도 그 스승을 만나러 갈 셈이니?”
찻잔을 내려놓던 그녀의 손이 잠시 멈칫거렸다. 레오니스는 그 모습을 보곤 옅은 조소를 머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뭐, 네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별 상관은 안 한다만 이상한 놈과 엮이지는 마. 그리 몰래 만나야 하는 사내면 정체야 안 봐도 뻔하지. 이건 오라버니로서 동생을 위해 하는 충고니까 새겨들어.”
다행히 그는 프리스틴이 만나는 남자의 정체를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기실 그건 프리스틴도 마찬가지였기에 밀행을 들킨 것이 별로 대수롭진 않았다.
아마, 제 오라버니는 영영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니까 전하께서는 신경 끄시죠. 언제부터 저를 그리 아끼셨다고요.”
“그렇게 말하니 서운한데, 프리스틴. 앞으로는 네게 더 신경을 쓰도록 하마.”
저리 뻔뻔한 얼굴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니 더욱 얄밉기만 했다.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 것이 많은데 이렇게 제 속을 뒤집어 놓기만 하니 입맛도 확 떨어져 버렸다.
프리스틴은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만 자리를 파하자는 통보였다.
프리스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레오니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뗐다.
“아, 프리스틴. 정말 마지막으로 잔소리 하나만 더 해도 될까?”
이 인간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프리스틴은 대놓고 한숨을 내쉰 후에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받아쳤다.
“또 뭔데요?”
“나는 내 동생이 오라버니의 방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드는 상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게 진작에 활 좀 빌려줬으면 됐잖아요.”
“그래, 그건 이 오라버니가 미안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프리스틴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빙긋 웃으며 맞받아치는 레오니스의 태도 또한 찝찝했다.
* * *
딱, 치치가 죽은 그날까지는 좋았다. 제게 기대어 우는 모습이 기특하니 기꺼이 다독여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투정도 정도껏 해야지.
“벨라, 식사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울고만 있을 거야.”
무려 사흘째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혀 저리 눈물만 뽑아내고 있으니 그로서는 짜증이 날 만했다. 그깟 몸종 하나 죽었다고 제 몸을 축내며 질질 짜고 있는 모습에 도저히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그런다고 죽은 치치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해? 미련한 짓 그만해.”
“치치가…… 저 대신 죽었잖아요…….”
“자기가 선택한 거야. 네가 그러라고 시키기라도 했어? 자기가 뛰어든 건데 왜 그걸로 쓸데없이 자책해.”
“하지만, 저를 지켜 주려다 죽은 건 맞잖아요. 그럼 저 때문에 죽은 거고…….”
도돌이표처럼 이어지는 대화에 벨리아르는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벨라, 짜증 나게 굴지 마. 걘 어차피 죽었을 애야.”
“……공작님은, 전혀 슬프지 않으세요?”
“내가 왜 슬퍼해야 하는데.”
“그래도, 계속 같이 지낸 식구인데…….”
식구라는 말에 그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토해 냈다. 애초에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렇다 쳐도 성의 사용인들은 그저 제 명령대로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었다. 허울뿐인 목숨을 대가로 제게 자아를 바친 어리석은 인간들. 치치 역시 그 사용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잘 들어, 벨라. 치치는 널 지키라고 붙여 둔 애고, 이번에 그 쓰임을 다했을 뿐이야. 너는 집에서 쓰는 도구가 하나씩 망가질 때마다 그렇게 슬퍼할 셈이야?”
“치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도구랑 비교할 수가…….”
“나한테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 똑같아. 쓰다가 망가지면 버리면 그만이야.”
벨라는 그가 하는 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을 그리 생각할 수 있을까.
제 슬픔에 공감은 못 해 주더라도 이렇게 찾아와 속을 후벼 파 놓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벨라는 덮어쓴 이불을 꼭 그러쥐며 용기 내어 말했다.
“……저, 혼자 있고 싶어요, 공작님…….”
그녀의 말에 그는 진심으로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지금 그깟 놈 하나 때문에 내게 그따위로 구는 거야?”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 혼자 있고 싶어요…….”
울음에 젖어 든 목소리가 치솟는 짜증에 바람을 더했다. 그는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들끓는 화를 가라앉히려는 다분한 노력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꽃병이었다. 하얗고 소소한 저런 꽃은 절대 제가 내어 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온통 자신이 허락해 준 것들로만 채워진 방 안에, 제 신경을 거스르는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소렐, 벨라의 방에 꽃병이 하나 있던데, 난 그런 걸 준 기억이 없어.”
“……치치가 아가씨께 주었어요. 죄송합니다. 바로 가서 치울게요.”
“벨라가 봤나?”
“네, 예쁘다고 정말 좋아하셨어요.”
“그럼 일단 그냥 놔둬. 그리고, 다음부턴 이딴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는데.”
“네, 명심할게요.”
벨리아르는 성큼성큼 협탁으로 다가가 꽃병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벨라의 젖은 눈망울이 불안으로 커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주저 없이 꽃병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공작님――!”
볼품없던 꽃병은 그의 손길 한 번에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뒤이어 그는 바닥에 흩어진 꽃을 지그시 짓밟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왜.”
벨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물만 흘렸다.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신처럼 느껴지다가도, 이럴 땐 한없이 잔혹한 악마 같았다.
“치치한테 받은 게 또 있어?”
그가 무심한 눈길로 방 안을 훑었다. 벨라는 하염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없어요. 정말 없어요…….”
차라리 무언가 있었다면 이토록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 때문에 치치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쓰라렸고, 오로지 마음으로만 치치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벨리아르는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 벨라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나직이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악마의 그것처럼 파고들어 그녀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다음부터 우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소렐부터 시작해서 사용인들의 목을 하나씩 베어 네 방에 걸어 둘 거야. 그거야말로 정말 너 때문에 죽는 거지.”
그는 정말, 제게 너무도 지독했다.
* * *
“치치의 몸에 박혔던 화살입니다. 보시다시피, 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벨리아르는 에릭이 올려놓은 화살을 유심히 살폈다. 피가 묻은 흔적을 보니 화살이 깊게 박힌 건 아니었다. 게다가 어깨에 맞았으면 보통은 죽을 확률이 그리 높지 않으니, 치치의 사인은 분명히 화살촉에 발린 독 때문이었다.
“이 독, 어떤 건지 알아봤어?”
“예, 주로 소만에서 유통되는 극독입니다. 효과가 확실해서 아주 값비싸게 거래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증상이 이렇게 주위가 까맣게 썩어 들어가는 것인데, 마시면 내장만 타격을 입을 뿐 겉으로는 거의 티가 나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병으로 위장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럼 이리 화살촉에 발라서 썼다는 건, 둘 중 하나겠네. 보여 주려는 식이었거나 이 독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가씨를 노리고 쏜 것 같은데, 굳이 이런 독을 써서 소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에릭의 말에 쓸데없는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 그날 벨라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래서 고스란히 독화살을 맞았다면. 저도 모르게 화살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의심 가는 사람은?”
“……저는 프리스틴 황녀가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그는 담담히 질문을 이었다.
“이유는.”
“화살이 박힌 강도나 날아온 각도를 봤을 때, 활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남자가 쐈다면 아무리 어설퍼도 그것보단 더 깊이 박혔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황녀는 홀로 사냥을 나섰고요.”
사냥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던 황녀가 갑작스레 사냥대회에 참가한 것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의심되는 정황일 뿐이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다는 거네.”
“말씀하시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애초에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용히 알아보라고 지시했기에 에릭이 조사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우선은 황녀가 어떤 의도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단정 지을 수 없으니 섣불리 움직여서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도망갈 시간만 벌어다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이 화살의 출처 좀 알아봐. 특이하게 생긴 걸 보니 시중에 유통되는 건 아닌 듯한데.”
“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베른의 국경을 더 강화하라고 지시해. 특히 소만에서 넘어오는 밀수품 단속을 강화하고 적발된 게 있으면 바로 수도로 보내. 직접 다 확인할 테니까.”
분명 황녀가 직접 그 독을 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화살촉에 독을 발라서 쓰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았을 테니. 우선, 무엇이든 잡다 보면 꼬리가 밟힐 터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만약 황녀가 그랬다는 증거가 확실하면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그는 조용히 웃으며 고민 없이 답했다.
“죽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