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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82)화 (82/180)

82화

“……저, 괜찮, 아요.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벌써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흠뻑 적셨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되레 자신을 위로하는 치치의 목소리와 눈앞에 선명한 피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벨라는 곧바로 치마의 아랫단을 뜯어냈다. 일단 상처 부위를 지혈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말하지 마, 치치.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잠시만 기다려. 내가 사람을 불러올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나마 어깨니까 의사에게 빨리 보인다면 생명에 지장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벨라는 치치를 바위에 앉혀 두고서 얼른 막사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치치의 손이 다급히 벨라를 붙잡았다.

“아가씨……. 가지 마세요. 저, 괜찮으니까…….”

“내가 여기 있어 봤자 네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얼른 의사를 불러올게. 응?”

“……아니요, 아가씨. 그냥, 곁에 있어 주세요, 제발…….”

“치치…….”

머리로는 지금 당장 사람을 부르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치치가 이리 호소하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요,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네? ……괜찮을, 거예요.”

“치치, 제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발 피가 멈추길 기도하며 상처 부위를 지혈하는 것뿐이었다. 괜히 화살촉을 뽑으려다가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으니 섣불리 건들 수도 없었다.

작은 손을 간절히 붙잡고 있던 치치가 힘겨운 듯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댔다. 벌써 맞잡은 손에도 식은땀이 흥건했다. 사람을 부르러 갈 수 없다면, 누구든 들을 수 있도록 소리치기라도 해야 했다.

“도와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여기 사람이 다쳤어요! 도와주세요, 제발……!”

치치는 점점 한계에 다다를수록 벨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상하게도 그러면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이 조금은 수그러드는 듯했다. 계속해서 소리치는 벨라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단순히 화살에 맞은 거라면 이리 피를 많이 쏟지도 않을 것이고, 단시간에 정신이 혼미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늦지 않게 몸을 던져 천만다행이었다.

“저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구해 준 목숨이니 언제든 그녀를 위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혹시 벨라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다치고 죽는 건 너여야 해. 네 사지를 멀쩡히 두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뿐이니까. 알아들어?”

“네, 반드시 그렇게 할게요.”

공작님께서 제게 굳이 그런 명령이 내리지 않았더라도 기꺼이 그리했을 것이다.

치치는 가끔 보이지 않는 제 두 눈이 원망스러웠다.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나 그녀를 더 일찍 만났다면, 그래서 그 상냥한 모습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귀는 멀쩡해서 아가씨의 다정한 목소리를 온전히 담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치치는 선연한 어둠 속에서 마음껏 그녀의 모습을 그려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세상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그의 신은 벨라였다.

“에릭 경, 여기예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벨라는 저 멀리 에릭을 발견하곤 다급히 소리쳤다. 사냥 중 필요한 것이 있어 잠시 막사로 향하던 에릭이 우연히 벨라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네, 전 괜찮은데 치치가…….”

빠르게 벨라의 상태부터 훑은 에릭은 그녀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치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옷을 찢어 상처를 확인하는 손길이 상당히 능숙했다. 그러나 화살이 박힌 부위가 검게 물든 것을 보곤 인상을 확 구겼다. 벨라 역시 심상치 않은 상처에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이건……. 아가씨, 손 좀 줘 보세요.”

“네? 제 손은 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릭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아까 지혈하느라 그녀의 손 역시 치치의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에릭은 벨라의 손 이곳저곳을 세세하게 살폈다.

“혹시 손에 상처가 있었습니까?”

“아니요, 없었어요.”

다행히 작은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다. 에릭은 일단 그녀의 손을 놓아주곤 다시 치치의 상태를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을 보며 벨라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에릭 경, 의사에게 보이면 괜찮은 거죠? 어깨니까…….”

“일단 막사로 옮겨야겠습니다.”

“그럼 제가 의사를 부르러 갈게요.”

“아니요, 아가씨도 저를 따라오세요. 막사에 가시면 당장 깨끗한 물에 손부터 씻으십시오.”

“……알았어요.”

혹시 괜한 실랑이 때문에 시간이 더 지체될까 걱정되었기에 벨라는 순순히 수긍했다.

“……아가씨…….”

치치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힘겹게 그녀를 불렀다. 벨라는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차분히 그를 달래려 했다. 자신이 불안해하면 치치도 불안할 테니.

“치치, 걱정하지 마. 금방 의사가 올 테니까. 괜찮아.”

치치는 에릭의 등에 업혀 힘없는 미소를 내비쳤다.

* * *

누군가 벨라를 향해 화살을 쏜 일은 최대한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되었다. 벨리아르 공작의 지시였다. 그 때문에 사냥대회는 별 소란 없이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건 오로지 벨라뿐이었다. 그녀는 저택으로 돌아와 온몸을 깨끗이 씻고, 의사에게 세밀한 검진을 받은 후에야 겨우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벨라는 곧장 치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마침 방에서 나오던 벨리아르와 딱 마주쳤다.

“벨라.”

그는 벨라가 방 안쪽을 보지 못하도록 곧바로 문을 닫았다. 벨라는 빠르게 닫히는 틈새로 기웃거려 봤으나 치치의 손끝 하나 눈에 담지 못했다. 그녀는 다급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치치는요?”

“방으로 돌아가 있어.”

“……치치는 어떻게 됐어요?”

평소 같았으면 그의 지시에 순종하였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치치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하여 꿋꿋이 되묻자 그의 표정이 설핏 흐트러졌다.

“방으로 돌아가 있으란 말, 안 들려?”

“치치를 만나게 해 주세요. 얼굴만 보고 나서 바로 방으로 돌아갈게요.”

“보여 줄 수는 있는데, 어차피 대화는 못 해.”

“……아직 깨어나지 않았나요? 그래도 괜찮으니까…….”

그저 얼굴만 봐도 걱정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작가니까, 유능한 의사를 거느리고 있는 곳이니 치치는 당연히 무사할 것이다. 에릭이 그를 막사에 데려다 놓은 후 상당히 빠르게 의사가 당도한 덕분에 처치도 그리 늦지 않았다.

하지만……. 검게 물들었던 상처가 자꾸만 떠올라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 마음을 짓눌렀다.

별일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 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치료를 마친 치치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긴 밤을 어찌 지새워야 할지 벌써부터 까마득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벨리아르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벨라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그는 곧이어 덤덤하게 사실을 전했다.

“죽었어.”

“……공작님.”

벨라는 멍하니 그를 불렀다. 그의 입에서 짤막하게 튀어나온 말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거짓말이죠? 저 놀라게 하려고 거짓말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래, 지금 그는 저를 놀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런 장난은 조금 화가 났다. 어떻게 치치의 죽음을 저리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건지.

벨라는 지금이라도 그가 옅은 미소를 비추며 장난이었다고 말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 기꺼이 그의 장난에 휘둘려 줄 수 있었다. 지금 순간이 그저 장난이었으면 했다. 아니, 장난이어야만 했다.

“내가 지금 한가로이 너랑 장난칠 때는 아니지.”

그가 차갑게 내뱉은 말에 실낱같던 희망이 무참히 바스러졌다. 벨라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처참히 허공을 헤맸다. 애처롭게 떨리기 시작한 입술 새로 허망한 말소리가 정리되지 못한 채 새어 나왔다.

“그러면, 그러면 안 되는데……. 안 돼요, 공작님……. 치치는, 치치는…….”

나 때문에 죽은 거야.

급격히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치치가 화살에 맞은 순간부터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었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정말 치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필사적으로 참았었는데. 버겁게 억누르고 있던 만큼 한 번 터진 감정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범람했다.

“욱, 흐윽……. 아…….”

벨라는 결국 엉망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치치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불과 낮까지만 해도 멀쩡히 제게 웃어 주었었는데.

팔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쏟아 내다 보니 점차 현실임이 받아들여졌다. 지금이 꿈이라면, 이렇게 악을 쓰며 울면 깨어났을 테니까.

그러면 당장 치치에게 달려가 꼭 안아 줄 텐데.

“악몽을 꾸셨어요?”

하며 부드럽게 웃어 주는 치치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꿈이었다.

“아가씨는 제게 가장 커다란 분이세요.”

“그때가 오면 저는 자유롭게 아가씨 곁에 머물게요.”

“……여동생을 만나고 싶어요.”

치치가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딱히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치치는 제게 너무 과분한 정을 주었다.

큰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치치가 그리워졌다. 벨라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치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시간이 지날수록 제 기억 속에서 흐릿해질까 봐 벌써 불안이 일었다.

“벨라.”

오랜 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아르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벨라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으로 기댔다. 지금은 도저히 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공작님……. 흐윽, 저 어떡해요…….”

그는 제게 안겨 오는 벨라를 기꺼이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뒷머리를 살짝 눌러 온전히 제게 파묻혀 울도록 만들었다.

느릿하게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을 따라 더욱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뒤틀린 욕망을 해소해 주었다. 그는 지금 제법 기분이 좋았다.

벨라의 머리 위로 그의 입술이 차분히 내려앉았다. 나른하게 감기는 눈 아래로 입꼬리가 희미하게 휘었다.

오롯이 제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리는 벨라의 목소리는 천상의 노랫소리보다 듣기 좋았다.

그렇게 벨리아르는 벨라가 한참을 울다 쓰러질 때까지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 시간이 마치 머나먼 과거의 여느 날처럼 완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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