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사냥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틀째로 접어들었다.
전날, 프리스틴은 몸풀기 삼아 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에게 화살을 쏘아 보았다. 맞추기가 쉽지 않았지만, 처음 레오니스에게 활을 배웠을 때와 비교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그녀는 제게 활 쏘는 법을 알려 주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이 활과 화살 역시 그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확실히 단기간에 실력이 늘었어.”
그는 레오니스보다 훨씬 친절하고 쉽게 활 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시위를 당기는 요령도 일러 주어 손가락의 상처도 전보다는 덜했다.
해가 살짝 기울어졌을 때, 프리스틴은 활과 화살통을 챙겨 어딘가로 나설 준비를 했다. 델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따라붙자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네? 안 돼요, 전하. 그래도 사냥터인데 어찌…….”
“델리아, 요즘 자꾸 두 번 말하게 하는구나.”
“하지만…….”
“깊숙한 곳으로는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알았어요. 얼른 돌아오셔야 해요.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니 인적 있는 곳으로만 다니시고요!”
프리스틴으로서도 델리아를 데려가는 것이 훨씬 편하긴 했지만, 그건 평범한 사냥을 나갈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 자신이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라야 했다.
프리스틴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소리치는 델리아를 뒤로한 채 숲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길을 혼자 헤쳐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데, 그 남자의 오두막에 드나들며 숲길이 조금 익숙해졌다.
인적 없는 곳까지 들어왔을 때, 프리스틴은 품에서 숲의 지도를 꺼내 들었다. 미리 레오니스에게서 받아 둔 막사의 배치도였다. 벨리아르 공작의 막사는 가장 안쪽에 있었다. 제법 거리가 멀긴 하나, 그만큼 인적이 드물 테니 제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프리스틴은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도록 외곽으로만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벨리아르 공작가의 막사 근처에 당도했다.
신이 자신을 돕는 것인지,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거니는 벨라의 모습을 발견했다. 곁에 몸종이 한 명 붙어 있긴 한데, 눈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후…….”
프리스틴은 곧바로 몸을 숨기며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손에 든 활을 꽉 그러쥐었다.
그저 상처만 내서 며칠간 괴롭게 해 줄 생각이었다. 화살 한 방 맞는다고 사람이 쉽게 죽진 않을 테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원래는 이런 추잡한 일을 벌일 생각도 없었다. 물론 레오니스의 제안에 솔깃하긴 했지만, 공작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너그러이 덮으려 했다. 하지만…….
“제가 전하와 혼인하는 일은 없습니다. 제가 전하께 마음을 드리는 일 또한 없습니다.”
“아니요, 당신이 가짜라서. 하등 쓸모없는 빈 껍데기일 뿐이라 싫다는 겁니다. 당신이.”
꼭 그렇게 아프게 말해야 했을까. 자신이 가짜라면, 진짜는 누구일까.
원망의 화살이 순진하게 웃음 짓던 벨라에게로 향했다. 이 모든 것이 그 영애의 탓인 것만 같았다.
‘그 여자만 없었다면.’
문득 떠오른 가정이 빠르게 가지를 뻗쳤다. 잘 생각해 보니 모두 그 여자가 나타나고 난 뒤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진 그가 이토록 저를 냉대하진 않았다.
드물지만 편지에 답장을 주기도 했고, 남들보다 저를 특별하게 대우해 준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공작이 제 편지를 읽지 않은 그 시점부터 그 영애가 있었다.
“그에게 잊지 못한 오랜 연인이 있다는 건 아시나요?”
그 연인이 설마 그 영애라면……. 그럼 그녀도 죽지 않는 마녀가 아닐까? 벨리아르 공작처럼.
그런 게 아니라면 저렇게 홀연히 나타나 공작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평생을 바쳤는데…….”
프리스틴이 벨라의 모습을 노려보며 이를 까득 사리물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에 대한 원망이 짙어졌다. 신전에서 조사한 결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리스틴은 입술을 짓씹으며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정말 마녀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 * *
벨리아르와 에릭은 황태자의 권유로 일찍이 사냥을 나섰다. 벨라는 전날에도 그러했듯 얌전히 막사 안에서 자리를 지켰다.
사냥대회라고 하니 바깥에 나가면 동물들의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 같았다. 곧 천막이 걷히고 치치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치치.”
“아가씨, 계속 막사에만 계시면 심심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나는 사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냥은 안 하셔도 되니 나와서 바깥 공기 좀 쐬세요. 그냥 고요한 숲 같아요. 풀 내음도 좋고요.”
치치는 벨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를 달랬다. 치치가 그렇다고 하니 벨라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마침 좁은 막사 안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던 차였다.
“……그럴까?”
“네, 제가 같이 있을게요.”
조심스럽게 막사 밖으로 나가니 정말 우려하던 일은 없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지도 않았고, 피비린내도 없었다. 그저 숲의 산뜻한 공기가 시원하게 코끝을 적실 뿐이었다. 내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벨라는 바닥에 떨어진 자그마한 풀잎을 따라 녹음의 숲을 거닐었다. 이렇게 치치와 함께 있으니 헤버튼에서 지낼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안과 함께 종종 숲속을 산책했었는데.
벨라는 발치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곤 들뜬 얼굴로 치치의 손을 붙잡았다.
“치치, 잠시 손 좀 빌릴게.”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에 쪼그려 앉았다. 벨라는 치치의 손을 이끌어 풀밭 사이에 핀 들꽃 무리에 닿도록 해 주었다.
“여기 작은 꽃이 피어 있어. 하얗고 노란색인데, 어떻게 생겼는지 느껴져?”
치치는 조심스럽게 꽃을 더듬어 보며 머릿속에 생김새를 그려 보았다. 작고 둥글둥글한 꽃잎을 가진 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네, 앙증맞고 예쁜 꽃이네요.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 같아요. 들에 많이 피는 꽃이죠?”
“맞아. 난 화려한 꽃보다 이런 이름 없는 꽃이 좋더라. 험난한 환경에도 이렇게 굳세게 피어난 걸 보면 기분이 정말 좋아져.”
치치 역시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꽃보다 이런 소소하고 단정한 꽃이 벨라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풀밭에 앉아 들꽃을 구경하며 웃는 벨라의 모습을 멋대로 상상했다.
“이 풀은 먹는 거야. 뒤에 쓴맛이 조금 나긴 하는데, 그리 나쁘지 않아.”
벨라는 치치의 손을 이끌어 이것저것 만지게 해 주었다. 단단한 나무를 짚으며 설명해 주기도 했다. 덕분에 치치는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천천히 머릿속에 숲의 그림을 완성해 갔다.
“숲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응, 어릴 때부터 숲을 좋아했거든.”
벨라는 치치에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분을 속여야 할 때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 자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치치에게 제 모습 그대로를 전해 주고 싶었다.
벨라는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일부러 웃고자 애썼다. 지금은 치치와 숲을 거니는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러나 순간, 저 멀리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탕――!
숲을 울리는 큰 소리에 나무에 앉아 있던 작은 새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
한바탕 숲이 흔들리고 나서야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벨라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순간 눈앞이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치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벨라를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 응……. 그냥 소리에 좀 놀라서. 공작님께서 근처에 계신가 봐.”
치치에게 놀란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불안정한 숨소리는 차마 숨길 수 없었다.
“……아가씨.”
“여기 바위에 잠시만 앉아 있다가 가자.”
벨라는 벨리아르가 총을 챙겨 온 것을 봤으니 그가 사냥 중인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본능적인 불안을 어찌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을 더 옥죄는 것일지도 모른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와의 첫 만남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단순히…….”
치치는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는 벨라를 달래 주다가 순간 멈칫거렸다. 어디에선가 느껴진 인기척 때문이었다. 다시 또 소리가 들려올까 싶어 그는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적어도 소리의 방향은 알아내야 했다.
“치치,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곳엔 오로지 벨라와 저, 둘뿐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그녀를 지켜야 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것인가 했는데, 점점 기척이 선명하게 귀로 내리꽂혔다.
“아가씨, 혹시 지금 일어나실 수 있으세요? 막사로 돌아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급함에 말이 점차 빨라졌다. 귓가로 전해지는 소리와 기척은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것이었다.
“응, 괜찮아. 정말 잠시 놀란 것뿐이라서. 이제 일어나면――!”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 전문적인 살수는 아닌지 숨기지 못한 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아가씨――!”
벨라가 일어선 순간, 치치가 그녀의 앞으로 달려들어 확 끌어안았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귓가를 스치고, 그 끝에 그의 짧은 신음이 잇따랐다.
“윽…….”
“――치치!”
벨라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괴롭게 일그러지는 치치의 표정과 그의 어깨에 박힌 기다란 화살을 본 순간 그녀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이건…….”
벨라는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누군가 달아나는 뒷모습이 보였으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치치의 어깨에 박힌 화살이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이질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