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벨라는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공작님, 저희 베른으로 언제 돌아가요?”
“베른에 가고 싶어?”
“……네.”
“내일모레부터 사냥대회야. 그 이후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그때 베른으로 돌아갈 거야.”
사실 베른의 겨울이 지나기 전까지는 수도에 있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방금 생각이 바뀌었다. 수도는 그녀를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 일찍 베른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 저택은 너무 시끄러운 것이 흠이었다.
“베른에는 눈이 많이 내렸겠죠?”
“그렇겠지.”
“저 베른에 가면……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해.”
베른으로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다시 방안에 가둬 놓을까. 벨라가 답답해한다는 에릭의 말에 조금 풀어 둔 것인데, 이따금 사용인들에게 해맑게 웃어 주는 모습을 볼 때면 심사가 뒤틀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벨리아르는 그녀를 지분거리던 손을 거뒀다.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또 짜증이 솟구쳤다. 만져 달라고 먼저 엉겨 붙어도 모자랄 판에. 역시 버릇을 잘못 들였다.
“……공작님, 저 배가 고픈 것 같아요.”
퍽 반가운 말이었지만 지금 기분이 별로라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벨리아르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을 덮었다.
“나는 지금 네가 잤으면 좋겠는데.”
“……그럼 자고 일어나서 먹을게요.”
그의 손이 올라가니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진 탓에 통통하고 붉은 입술이 두드러졌다. 그는 오밀조밀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느라 조금 늦게 대답했다.
“그래.”
잘 익은 앵두처럼 새빨간 입술을 콱 베어 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럼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흐르지 않을까.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벨라는 접시 위에 놓인 복숭아 신세였다.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아래로 몰려든 열기 때문에 기가 찼다. 실소처럼 내뱉은 숨이 퍽 뜨거웠다. 그의 손이 벨라의 입술을 톡 건드리고선 멀어졌다.
“잘 자, 벨라.”
* * *
레오니스가 미리 전했던 대로 이번 사냥대회는 이틀간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황실 소유의 너른 숲 곳곳에 참가자들의 막사가 마련돼 있었다. 워낙 넓은 숲이라 막사 간의 간격도 넓어 제법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막사는 귀족의 수발을 들기 위해 따라온 사용인들로 북적였지만, 벨리아르 공작가의 막사는 유독 한적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가 최소한의 인원만 갖춰 온 탓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조용한 막사로 제법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황실에서도 황태자가 참여하는 만큼, 신전에서도 기사단장이 참여하는 것은 관례였다. 이번엔 부단장인 로드릭도 함께 따라온 모양이었다.
“이런 곳에서 뵈니 감회가 남다르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벨리아르 공작은 로드릭을 향해 미소를 내비쳤다.
“덕분에. 단장도 함께 참여했던데 자네 혼자 이리 날 찾아와도 되는 건가?”
“황태자 전하를 뵈러 가셨는데, 저는 딱히 그쪽엔 관심이 없습니다.”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이다 보니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처음엔 벨리아르 공작에게도 줄을 대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대놓고 치욕을 주니 소문이 나서 발길이 뚝 끊겼다.
“제법 위험한 말을 할 줄 아네.”
“베른에 다녀온 뒤로 느낀 바가 큰 것이지요. 아, 혹시 베일리 남작 영애도 함께 오셨습니까?”
로드릭이 넌지시 벨라를 찾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벨리아르는 한층 짙어진 눈동자로 로드릭을 응시했다.
“내가 아니라 영애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왜 묻지?”
“아닙니다. 그저, 저번 일에 대한 사과를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마땅한 일을 했을 뿐인데 사과할 필요는 없지. 그래도 그 마음은 전해 주도록 하지.”
“예,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드릭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었기에 지금이 물러서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굳이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공작을 들쑤셔 놓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사냥 하시길 바랍니다.”
“자네도, 행운을 빌지.”
겉으로는 의연하게 물러섰지만, 로드릭은 살짝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리 영애에 대한 말만 꺼내도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데, 대체 품 안의 편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무 사용인을 붙잡고 부탁해도 되겠으나 그렇다고 그녀에게 무사히 편지가 전해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공작의 귀에 들어갈 확률이 거의 백 퍼센트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련 가득한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로드릭의 눈에 제법 가능성 커 보이는 인물이 들어왔다.
에릭 아데인. 벨리아르 공작의 충실한 사냥개이긴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힘없는 사용인보다는 그래도 희망이 있어 보였다.
“아데인 경.”
로드릭은 주위를 살피곤 조심스럽게 에릭에게 다가갔다.
에릭은 어느새 손에 들린 편지를 보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곤란한 부탁을 해오기에 단칼에 잘라 냈는데, 계속해서 막무가내로 편지를 들이미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부러 벨라의 이야기를 강조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듯싶었다.
“……우직한 줄만 알았더니,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네.”
봉투에 적힌 이안의 이름을 보던 에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라면 제 주인에게 곧바로 보고하는 것이 옳았지만, 편지 위로 침울한 벨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면 볼수록 로드릭에게 짜증이 솟구쳤다.
“이걸 왜 나한테…….”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고민하던 에릭은 결국 걸음을 옮겼다. 그는 벨라의 막사 앞에서 잠시 주위를 살폈다. 혹여 주인의 눈에 띌까 걱정하는 것 자체가 불충한 일이라 상당히 기분이 껄끄러웠다.
“아가씨.”
“에릭 경, 무슨 일이에요?”
“이안 에드레이즈, 아시죠.”
벨라 앞에서 에릭은 잴 것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름을 들은 벨라의 눈꼬리가 순식간에 아래로 처졌다.
“……네.”
에릭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벨라의 얼굴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에릭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가 아가씨께 전해 달라고 한 편지를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네? 정말이세요? 그걸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저택으로 두어 번 편지가 왔었습니다. 주인님께는 보고드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돌려보내는 것으로 처리했었습니다.”
그 정도도 에릭으로선 상황을 많이 봐준 것이었다. 벨리아르의 성정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안이 계속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알면 당장 그를 잡아 오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께서 제게 주신 선물의 답례라고 해 둡시다. 하지만, 그 편지를 전해 드리면 저는 주인님께 보고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해요. 에릭 경께서는 당연히 그래야 하시죠.”
나름 벨리아르와 벨라 사이에서 절충안을 낸 것이다. 이제 남은 선택은 벨라의 몫이었다.
벨라는 잠시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힘든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빠르게 결론이 났다.
“그 편지는…… 그냥 버려 주세요. 저는 정말, 이안과 따로 연락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편지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처음엔 많이 흔들렸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 편지를 받아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괜히 이안에게 의지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벨리아르 공작도 그 사실을 알게 될 테니 감당해야 할 후폭풍만 거셀 뿐이었다.
저렇게 편지를 보낼 정도면 잘 지내고 있다는 뜻일 테니 괜한 걱정은 접어 두기로 했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는 이안이 되도록 저를 잊고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와 엮이면 그가 불행해질 거예요.”
에릭은 벨라의 선택에 안도했다. 그녀가 편지를 달라고 했다면 기꺼이 전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죽음을 피하지 못할 테고, 그럼 벨라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 뻔했다.
에릭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어 보았다. 혹시나 좋지 않은 소식이 적혀 있다면 벨라에게 언질 정도는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걱정스럽게 안부를 묻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그는 미련 없이 편지를 불태웠다.
“좋은 친구를 두었네요. 부럽습니다.”
“맞아요, 이안은 제게 과분한 사람이에요.”
“아니요, 저는 아가씨의 입장에서 말한 게 아닙니다.”
“아…….”
제 주인은 이미 이안의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사는 곳부터 가족 관계까지, 그리고 사사로운 가정사까지. 그것을 조사해서 갖다 바친 것이 에릭이기에 그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벨라가 이렇게 선을 긋는 것이 이안을 살리는 길이었다. 게다가 지금 벨리아르의 상태를 떠올려 보면, 그녀의 선택은 아주 바람직했다.
“아가씨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셔도 됩니다.”
“에릭 경, 친구 있으세요?”
에릭은 뜻밖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무슨 그런 질문을 저리 말간 얼굴로…….
“……저는 딱히 친구가 필요 없습니다.”
“그럼 제가 에릭 경의 친구가 되어 드려도 괜찮을까요?”
“자신감을 다시 줄이셔야겠습니다.”
“진심이었는데요…….”
친구라. 에릭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 낯선 단어를 곱씹었다. 과연 제게 그런 존재가 생길 날이 오긴 할까.
에릭은 자신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는 벨라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비스듬히 틀며 지금 당장 떠오르는 진심을 전했다.
“저는 아가씨가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죽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땐 저도 친구라고 생각해 주세요.”
“고마워요, 에릭 경.”
에릭은 어쩐지 민망한 마음에 재빨리 막사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