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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79)화 (79/180)

79화

“그렇게 확고한 의지라면…… 내게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달라고 부탁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부탁을 드렸으면 들어주셨을 겁니까?”

“자네의 실력을 보지 않았으니 그건 불가능하지.”

로드릭이 낮게 웃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제게 실력을 보여 주겠다고 나선다면, 기꺼이 응해 줄 생각도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은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안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저는 들어가고 싶은 기사단이 따로 있습니다.”

“보통 페이트 기사단을 꿈꾸지 않나? 아니면 황궁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은 겐가?”

페이트 기사단과 버금가는 곳이 황궁 기사단이었다. 넌지시 물으며 표정을 살폈으나, 전혀 정답이 아닌 듯했다. 순간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자네…….”

“저는 벨리아르 공작가의 기사단에 들어갈 겁니다. 반드시.”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버지가 벨리아르 공작에게 손을 잃고, 그 뒤로 한 가정이 엉망이 됐을 것이다. 도박판과 술에 빠져 폐인이 된 아버지, 그런 가장의 모습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 버린 어머니.

그 상황에서 원수와 다름없는 벨리아르 공작의 기사단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었다. 로드릭은 진심 어린 걱정을 내보였다.

“……자네는 총명해 보이니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네.”

“감사합니다, 부단장님.”

이안은 로드릭에게 편지를 전해 주며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더했다. 그만큼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기에 로드릭의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 * *

“벨라, 울어?”

“아니…….”

“왜 우는데.”

“아파…….”

“어디가?”

“온몸이 아파. 아래도 아프고, 허리도 너무 아파.”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울어?”

“……저리 가. 너 미워. 해 기울어질 때까지 말 걸지 마.”

“그럼 말 안 걸 테니까 안고만 있을게.”

머나먼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대화뿐일까. 그날의 온도,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체향, 품에 안으니 다시 솟구치던 욕망까지 그대로였다.

그러니 더 미칠 노릇이었다. 한 번 품고 나면 자연히 사그라들리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자극되어 더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온종일 그날 밤의 열기가 사라지지 않은 채 온몸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벨리아르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두운 시야에 제 밑에서 울던 벨라의 모습이 생생하게 덧그려졌다. 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곧이어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에릭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세브런에 다녀오셨습니까?”

오자마자 일 얘기를 꺼내는 에릭이 반갑게 느껴졌다. 억지로라도 무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기어코 벨라가 틈새를 파고들었다.

“둘째는 고분고분해서 다행이야. 너만큼은 아닌데,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들어.”

“황태자가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그저 조용히 있었다면 레오니스가 언젠가는 이변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테니까요.”

“그러게. 일 두 번 안 하게 해 줘서 참 고맙네.”

“그런데 무언가 찝찝하긴 합니다. 황제가 서서히 디어린 독에 중독되고 있는 건 맞지만, 그 속도가 매우 느릴 겁니다. 성미가 급하고 원하는 바는 꼭 이뤄 내고야 마는 황태자의 성격상…… 그리 천천히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벨리아르는 에릭의 말을 새겨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것으로 끝이 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긴 하지. 원래 제 본성대로 따라가는 법인데…….”

“그래도 2황자의 신변은 확보해 두었으니 황태자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에릭은 황태자가 어떻게 나오든, 무슨 일을 벌이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담담하게 입에 올렸다.

벨리아르는 늘 에릭의 이런 당당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어린아이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기와 자신감 덕분에 그를 거둔 것이었다.

실제로 에릭은 벨리아르의 손에 자란 탓인지, 그 외에는 모두 제 발밑으로 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에릭을 두고 ‘오만한 사냥개’라고 표현했다.

“우리 에릭은 일을 참 잘해. 자신감도 넘치고.”

“제가 예전엔 힘이 없어서 당하고만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 정도도 대처하지 못해서야 어찌 주인님을 곁에서 모시겠습니까.”

“기특한데, 제국이라도 안겨 줄까?”

“아니요. 저는 그런 건 욕심 나지 않고, 레오니스의 목만 있으면 됩니다.”

에릭의 목표는 심히 단순했다. 그저 평생 벨리아르를 곁에서 모시는 것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레오니스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딱히 바라는 것이 없었다.

“기억하고 있을게. 수고했어. 일단 황태자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기 전까진 지켜보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일 얘기가 마무리되고, 둘 사이엔 짧은 정적이 파고들었다. 벨리아르는 그답지 않게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하더니, 끝내 에릭을 향해 물었다.

“벨라는?”

“바로 주인님께 오는 길이라 살피지 못했습니다. 지금 가서 보고 올까요?”

“됐어. 소렐 부인 입단속이나 철저히 시켜.”

벨라의 이야기가 나오니 묘하게 말투마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드문드문 한숨을 내쉬는 것도 그렇고, 답답한 듯 눈가를 찌푸리는 모습이 잦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에릭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러니까. 내 걸 내 마음대로 했는데 왜 이리 기분이…… 더러운지 모르겠네.”

벨리아르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럴 땐 그저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벨라였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서 쉬어.”

에릭은 집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버릇처럼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오랜 시간 그를 곁에서 모셨지만 늘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에릭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날 밤 그가 벨라를 찾은 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오늘 그의 상태와 연관 짓기는 힘들었다.

귀족이 따로 욕정을 풀기 위해 정부를 두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가.

에릭이 벨라의 존재에 대해 짐작한 것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귀족 영애의 신분을 주었을 땐 굳이, 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오히려 더 번거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가 벨라를 취한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그것 때문에 이리 화를 내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설마.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가정이 에릭을 멈춰 서게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처구니가 없었기에 단정한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데.”

제 주인이 숲에서 주워 온 작은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면.

애초에 그에게 그런 인간적인 마음이 존재하긴 할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그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두 가지 상반되는 마음이 서로 맞부딪쳤다. 제 주인이 그런 사사로운 마음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벨라를 온전히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에릭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벨리아르는 에릭이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을 나섰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향한 곳은 벨라의 방이었다.

노크 없이 문을 열어젖히니 침대 한구석에 웅크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벨리아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대체 넓은 침대에서 왜 저리 궁상맞게 웅크려 있는 건지. 가뜩이나 체구가 작아 저렇게 있으면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벨리아르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을 끌어 내렸다. 따끈하고 폭신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눈가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잠들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잘 잤어?”

“……네.”

태연하게 물었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혀 이상한 것이 없는데 어쩐지 짜증이 치솟았다. 그런 일이 있고도 홀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뒤틀렸다.

그러면서도 벨리아르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상처를 확인했다. 셔츠로 묶었던 자리를 따라 검붉은 멍이 든 것을 보며 그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느슨하게 묶을 걸 그랬다.

“식사는.”

“아침에 먹고 잤어요.”

“잘했네.”

급격하게 요동치고 불꽃이 튀는 마음과 달리 매우 덤덤한 말투였다. 그는 손끝으로 벨라의 눈가를 매만졌다. 퉁퉁 붓긴 했지만 물기 없이 메말라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계속 울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짓을 당했으면, 내내 울고 있어야지. 자신을 떠올리며, 왜 자신을 찾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울고 있어야지. 아니면, 차라리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울며 칭얼대든지. 그럼 기꺼이 달래 주려 했는데.

“황녀 전하를 뵙고 오셨어요?”

“응.”

벨리아르는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만나고 온 것이 사실이니까.

“그렇구나…….”

벨라가 시무룩한 기색을 내비치며 중얼거리자 벨리아르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가끔은 그녀를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겨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그녀의 피부에 닿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럼 저 아름다운 눈동자로 더욱 간절히 자신만 좇지 않을까. 자아를 뺏고, 오로지 제 말만 듣고 저만 보는 인형으로 만들면 어떨까 싶다. 그럼 이리 제 속을 뒤집어 놓는 일도 없을 텐데.

벨리아르는 가만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녀에게로 닿는 나른한 시선에 지독한 소유욕이 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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