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프리스틴의 눈앞으로 붉은 피가 선명하게 번졌다.
“꺄악!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어, 어떡해……!”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프리스틴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여전히 칼을 쥐고 있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장면이 너무 괴이해서 현실감이 떨어졌다.
이렇게 그에게 깊은 상처를 입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저 그 남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하기 위해 피가 비칠 만한 아주 작은 상처만 낼 생각이었다.
“어서, 어서 지혈을…….”
그의 손이 꽉 붙잡고 있는 탓에 꽂혀 있는 칼을 놓지도 못했다. 마치 자신이 찌른 듯한 모습에 프리스틴이 울컥 울음을 토해 냈다.
벨리아르는 무던한 손길로 칼을 뽑아 냈다. 칼에 찔린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 사람을 불러야겠어요. 제가 내려가서…… 사람을……. 어……?”
횡설수설 말을 잇는데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또 한 번 믿기지 않아 프리스틴이 헛숨을 연달아 토해 냈다.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꿈속이 아니라면 눈앞의 일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칼에 찔려 울컥 피를 토해 내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갔다.
프리스틴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떨어트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벨리아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프리스틴을 향해 태연히 웃어 보였다.
“그가 이런 건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당신……. 왜, 상처가…….”
어느새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옷이 찢긴 모양과 그 주위로 흘러내린 핏자국만 없었다면 자신이 잠시 헛것을 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절대, 절대로 그의 몸에 상처를 내선 안 됩니다.”
이제야 그 남자가 마지막에 신신당부했던 말을 반쯤 이해했다. 이런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구나.
어머니는 가끔 벨리아르 공작이 죽지 않는 괴물이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긴 했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일 테니 언젠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사람이 아니었다.
멍하니 떨어진 칼을 바라보던 프리스틴이 언뜻 웃음을 내비쳤다.
사람이 아니면 어때. 그럼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닌가?
그와 혼인한다면 자신은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그 권세와 재력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죽지 않을 테니 언제 그 힘이 빠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멋있는 외모도 쭉 유지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비밀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랄 일이었지만, 그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들 이유는 되지 못했다.
“……이것 때문에 저와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요? 전 괜찮아요! 이런,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전 오히려…….”
지금이라도 놀란 기색을 떨쳐 내고 어떻게든 마음을 얻어 보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벨리아르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는 듯 웃고 말았다.
이 멍청한 여자를 어쩌면 좋지.
마음 같아선 그 빌어먹을 껍데기만 모조리 벗겨 내 버리고 싶었다. 감히 그녀와 닮은 얼굴로 이런 짓거리를 해 대니, 참을 수 없는 화가 솟구쳤다.
“아니요, 당신이 가짜라서. 하등 쓸모없는 빈 껍데기일 뿐이라 싫다는 겁니다. 당신이.”
* * *
로드릭은 제 앞의 청년을 보곤 기억을 되짚느라 살짝 미간이 좁아졌다.
“자네는…….”
청년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한스 에드레이즈의 아들, 이안 에드레이즈라고 합니다.”
그제야 로드릭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라 했더니, 베른에서 사고를 당한 한스의 아들이었다.
벨리아르 공작에게 손목이 잘리고서 고향으로 내려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인처럼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눈치가 없긴 했어도 기사의 마음가짐만큼은 훌륭하던 자였는데. 로드릭이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한스의 일은 들어서 알고 있네.”
분명 처지가 힘들 것인데 이안의 눈빛은 굳은 의지로 총명하게 빛났다.
“아버지의 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부단장님께서 베른으로 파견됐던 조사단을 맡으셨었다고 해서…… 그래서 뵙고 싶었습니다.”
로드릭의 관심이 한층 짙어졌다. 베른에서의 일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냐는 듯한 호기심의 눈빛이었다.
“말해 보게.”
“……그때 마녀로 오해받았던 사람이 벨라 베일리 남작 영애라고 들었습니다. 부단장님께서는, 그분을 실제로 뵈었겠지요?”
“그래. 직접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모습은 뵈었네.”
“그 영애의 눈동자가 정말 보라색이었습니까?”
이안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려 더욱 눈에 힘을 주고 이를 꽉 깨물었다. 상당히 진지한 얼굴로 질문해오는 이안을 보던 로드릭이 짧게 웃음을 내비쳤다.
“제법 황당한 질문을 하는군. 나를 찾아왔다면 소문을 들었을 것이 아닌가. 눈이 보라색이니 마녀로 몰린 것이지.”
“그럼…… 머리카락 색은 어땠습니까?”
“은발이었네. ……확실히, 외관이 좀 눈에 띄긴 했지. 근데 자네 그런 걸 물으려 나를 찾아온 건가?”
로드릭은 의아함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처지가 곤란해졌으니 무언가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러 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웬 소문에 대해서만 묻고 있으니,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전에 은혜를 입은 아가씨가 계시는데, 그분과 비슷한 듯해서……. 그런데, 벨리아르 공작의 후견을 받는다는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그래, 그것도 사실이네. 어쩌다 그런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영애에 대한 걱정이라면 넣어 둬. 벨리아르 공작이 아주 귀하게 여기고 있으니 말이야.”
이안의 표정이 제법 애틋해지는 것을 보며 로드릭은 무언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럼 지금 그 아가씨 역시 수도에 와 있겠네요.”
“그렇지. 벨리아르 공작이 수도에 있으니 말이야.”
어째 대화할수록 처음의 그 당당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고개가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어울리지 않게 한숨까지 푹푹 내쉬는 모습을 보며 로드릭이 작게 웃었다.
“자네, 나한테 할 부탁이 아직 남아 있군.”
“그게, 말을 꺼내기 너무 염치없는 듯하여…….”
“그래도 그만큼 간절하니 이렇게 나한테까지 찾아온 것이 아닌가. 내가 모르는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한데, 일단 말해 보게. 들어줄 수 있을지 말지는 들어 보고 결정하겠네.”
이안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처음 헤버튼에서 베른의 소식을 들었을 때, 필연적으로 벨라를 떠올렸다.
“베른에 마녀가 나타나서 조사단이 파견됐대.”
“세상에, 그 마녀가 귀족이라는데?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래.”
점점 구체적으로 변하는 소문을 따라 이안은 확신했다. 벨라가 무사히 살아있는 것이라고. 귀족이라는 것은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모두 들어맞았다.
아무래도 벨리아르 공작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수한 소문의 그 공작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찾지 말라 쓰여 있었지만, 정말 잘 지내고 있는지 한 번만이라도 두 눈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모든 귀족이 수도로 모이는 건국제를 빌미 삼아 이곳을 찾은 것이고,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은 아버지의 상관이던 로드릭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 가끔 보았던 그의 기억이 좋게 남아 있던 탓이었다.
“그 아가씨를…… 뵙고 싶습니다.”
어찌 보면 간단한 부탁이었지만, 그것이 벨리아르 공작가의 일이라면 상당히 곤란했다. 로드릭이 난감한 기색을 비치며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터무니없는 말씀을 드린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계속 찾아다니던 사람입니다.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자네도 벨리아르 공작의 성정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영애를 하도 꼭꼭 감춰 두고 있어서 만나려면 반드시 공작을 거쳐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그렇습니까…….”
“편지를 보내 보는 건 어떤가?”
“이미 해 보았는데…… 바로 되돌아왔습니다. 공작의 저택도 찾아가 보았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담벼락도 매우 높았고, 드넓은 강을 끼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저택 입구는 무장한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편지를 내게 줘 보게. 곧 황태자 전하께서 주관하시는 사냥대회에 참가할 건데, 그곳에 벨리아르 공작이 그 영애를 데려올 가능성이 커. 내가 전달해 보겠네.”
“정말이십니까? ……저 때문에 괜히 부단장님께서 무리하시는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종종 한스가 내 술 동무를 해 주었었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이안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로드릭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단장님.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 인사는 확실히 그 영애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나서 받겠네. 그런데 자네, 기사에는 뜻이 없는가?”
로드릭이 가끔 한스의 집에 들렀을 때를 떠올렸다. 꼬맹이던 이안은 볼 때마다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한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제 아비보다 훨씬 훌륭한 실력을 갖춘 기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원래라면 지금쯤 입단 시험에 지원했어야 하는데, 명단에 이안의 이름은 없었기에 물은 것이다. 기사의 뜻을 접었나 했더니, 이안은 다시금 굳세게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반드시 기사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