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다시 옷을 차려입은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이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듯 잠든 벨라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잠자기 편한 자세로 눕혀 주었다.
살결이 연한 탓에 제 거친 손길이 닿았던 곳은 착실히 울긋불긋한 흔적이 남았다. 아마, 며칠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말없이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모습이 정말, 인형 같았다.
자신이 원하면 벨라는 무엇이든 고분고분 따라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니 오늘 있었던 일은 그리 신경 쓸만한 것이 아니었다. 옅게 한숨을 내쉰 그는 주저 없이 방을 나섰다.
집무실에 돌아와서도 그는 상념에 잠긴 채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일에 몰두하여 잡생각을 쓸어 내려 했지만, 아파하며 울던 벨라의 모습이 짙은 잔상으로 남아 도저히 사라지질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더니 기어이 날이 밝았다. 에릭이 일찍부터 무언가를 들고 찾아왔다.
심상치 않은 그의 분위기에 에릭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초대장을 하나 올려 두었다.
황가의 문장 없이, 친필로 쓰인 프리스틴의 이름을 훑은 벨리아르는 에릭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두고 나가.”
에릭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곤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 벨리아르는 무심한 손길로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와 함께, 마음을 풀고 싶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달라는 내용이었다.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내세우던 평소와 달리 이번엔 제법 간절한 문체였다. 만나자고 남긴 주소 역시 황궁이 아니라 생뚱맞은 곳이었다.
벨리아르는 뒤에서 프리스틴을 착실히 이용해 먹는 쥐새끼 같은 놈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속셈이 뻔했지만, 그는 기꺼이 응해 주기로 했다. 자꾸만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짓을 하는 프리스틴에게 확실히 주제를 알려줄 때였다.
* * *
벨라는 다리 사이로 무언가 진득하게 흐르는 느낌에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침대 위에 널브러진 몸이 엉망이었다.
누군가한테 막되게 짓밟힌 것처럼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멍이 가득했다. 밤새 묶여 있었던 손목이 제일 심했다.
다리 사이가 쓰라리고 아픈 데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누가 들어오기 전에 얼른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몸이 맥없이 늘어졌다. 시야에 비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벨라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지난밤을 곱씹었다. 그는 아무런 배려 없이 저를 안았고,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얻고 싶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황녀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어제도, 그 전에도. 황녀에겐 정중하고 다정하게 대했겠지.
이젠 그의 본성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마음을 준 상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그의 모습이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귀한 황녀에게 그리 마구잡이로 욕정을 풀 순 없을 테니, 그래서 저를 찾은 것일까. 그저 본능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용도로써.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실컷 굴리다가 망가져서 내다 버려도 저를 불쌍히 여길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녀는 그러할 수 없을 테니까. 모두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의 말대로 그냥 아무도 없는 숲에 처박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서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자신의 태생은 그러했다.
“벨라,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아니야.”
지난밤 그가 던졌던 말이 선명하게 귓가에서 맴돌았다. 제발 저 말만은 기억에서 지워지길 바랐는데. 하지만 잊으려 발버둥 칠수록, 그의 목소리가 각인처럼 새겨져 처참한 흉터로 남았다.
벨라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잘게 들썩이는 이불 사이로 억눌린 울음소리가 이따금 새어 나왔다.
감히 그 마음까지 탐낸 것은 주제넘은 욕심이었다.
눈두덩이를 간지럽히는 햇살이 퍽 따사로웠다. 온몸이 천근만근이라 일어나고 싶진 않았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이 신경 쓰였다.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마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협탁 위의 먼지를 닦아 내던 소렐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여긴 베른의 성이 아닌데. 아무리 사용인들의 입이 무겁다지만 사람 사는 곳에 소문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었다. 벨라의 표정이 불안으로 물드는 것을 본 소렐 부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런 말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밖에 모르고, 제가 다 정리했으니까요.”
그녀의 말대로 어느새 옷도 입은 상태였고, 축축하게 젖어있던 시트도 깨끗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저 잠든 것이 아니라, 아예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배는 안 고프세요? 오래 식사를 거르셨으니 오늘은 부드러운 것을 드셔야겠어요.”
소렐 부인은 어떠한 기색도 비치지 않고 평소처럼 그녀의 식사를 챙겼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 먼 친척이라던 벨리아르 공작과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애초에 먼 친척이 아니라 그런 목적으로 후견을 받고 있었던 건 아닌지.
소렐 부인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경멸스럽게 여기고 있을 것 같았다. 얼른 베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벨라는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공, 작님은……?”
밤새 시달린 탓에 나오는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수분기 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듣곤 소렐 부인이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황녀 전하를 뵈러 가셨어요.”
보통 소렐 부인은 그녀에게 ‘외출하셨어요.’ 정도로만 일러 주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콕 집어 황녀를 만나러 갔다고 전해 주었다.
말하고서 자신의 눈치를 흘끗 살피는 소렐 부인의 모습을 보며, 그의 지시가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왜, 굳이 제게 황녀를 만나러 간다고 알린 이유는 무엇일까.
“진짜 어디 깊은 숲속에 묶어서 처박아 둘까. 왜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해, 응?”
넌 그저 욕구를 해소할 대상일 뿐이니 알아서 주제 파악을 해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외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은 허튼 짓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라는 그의 지시 같았다.
한 번 고개를 든 생각은 빠르게 가지를 뻗쳐 나갔다. 이러다간 또 우울한 생각에 잠겨 버릴 것만 같아 애써 상념을 끊어 냈다.
“나, 좀 씻어야 할 것 같아.”
옷은 입혀져 있었지만 소렐 부인 혼자서 그녀를 씻기는 것까지는 불가능했기에 아직도 몸의 찝찝함은 남아 있었다.
동시에, 혼자 있고 싶으니 이만 나가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으나 소렐 부인은 도리어 소매를 걷어붙였다.
“도와드릴게요.”
“혼자 할 수 있어. 괜찮아.”
“그럼 힘드시면 언제든 저를 부르세요.”
마침내 혼자가 된 벨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몸이 온통 그의 흔적으로 가득해서 똑바로 고개를 드는 것조차 버거웠다.
* * *
프리스틴이 만나자고 한 생소한 주소의 위치를 알아보니 어느 깊은 숲속이었다. 벨리아르는 커다란 오두막을 무감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곧이어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프리스틴.”
그가 프리스틴의 이름을 부른 건 여태껏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아주 어렸을 때, 그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을 프리스틴이 들었다.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잠시나마 어릴 적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이리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가슴이 뛰니, 어떻게 그를 포기할 수 있을까.
“……네?”
그가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그래, 그 영애를 부를 때처럼. 딱딱하게 황녀 전하가 아니라, 앞으로도 쭉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벨리아르가 그녀를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습니까?”
“무엇을…….”
“얼마나 더 이런 장난질에 장단을 맞춰 줘야 하냐는 말입니다.”
부드러운 얼굴로 하는 이야기가 상당히 이질적이라 프리스틴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저런 표정으로는, 그동안 상처받은 자신을 달래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리 초대에 응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프리스틴은 벨리아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고 믿었다. 게다가, 이름까지 불러 주지 않았는가.
“……벨리아르 공, 나는 그저……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그렇게 잘못되었나요?”
벨리아르는 예의상 짓고 있던 미소를 내팽개쳤다. 아직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헛소리를 해대는 프리스틴을 상대하고 있자니 숨길 수 없는 짜증이 치솟은 탓이다.
“아무래도 헛된 희망을 품고 계시는 듯하니 여기서 똑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벨리아르는 프리스틴을 똑바로 마주 봤다. 분명 프리스틴을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옛 연인이 낳은 딸이라고 해도 믿었을 만큼 상당히 닮아 있었으니까.
클수록 더욱 그녀를 닮아 가는 모습에 볼 때마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조금 신경 쓰일 뿐, 절대 그 선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제가 전하와 혼인하는 일은 없습니다. 제가 전하께 마음을 드리는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같잖은 짓은 이쯤 해 두세요.”
“……어째서요? 어째서 전 안 되는 건데요? 벨리아르 공도 언젠가는 혼인하실 거잖아요.”
혼인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실소를 터트렸다. 대체 인간들은 왜 그런 쓸데없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저와 혼인하고 싶습니까?”
프리스틴이 어깨를 잘게 떨며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는지 대답이 이어지지 않았다.
“저와 혼인하면 평생을 그 음침한 성에서 살아야 하고, 결국은 미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실 텐데요.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그는 세상에 떠도는 제 성의 소문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프리스틴의 눈동자로 본능적인 공포와 경멸이 깃들었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턱을 쥐며 그 감정을 오롯이 만끽했다.
“그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에 만나면 똑똑히 전하세요. 저는 이런 빈 껍데기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고.”
그는 일부러 뒷말을 강조했다. 제발 주제를 파악하고 어리석은 짓거리는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눈가로 물기가 차오르는 것을 보며 벨리아르는 눈가를 찌푸렸다. 제 앞에서 누군가가 질질 짜는 꼴은 딱 질색이었다.
“……그 영애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제게 이리 차갑게 대할 리 없었다. 그가 변하기 시작한 시점이 그 영애가 나타난 때와 딱 맞아떨어졌다.
마녀에 대한 조사는 끝났지만, 프리스틴은 아직도 벨라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동시에, 제게 정보를 준 그 남자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옳은 정보만 주었다고 어찌 확신할 수 있겠나. 어쩌면 그 영애가 사주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남자가 당부했던 마지막 말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은 해 보아야겠다. 프리스틴은 조용히 손을 뒤로 숨겨 소매 속에 숨겨 놓았던 단도를 꺼내 쥐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이고 싶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눈길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벨리아르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글쎄요. 확실히 알아볼까요?”
순식간에 제 손을 움켜쥐는 그의 움직임에 프리스틴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채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벨리아르는 그대로 프리스틴의 손을 움직여 단도를 제 가슴으로 찔러 넣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