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늦은 밤, 남자의 오두막을 불쑥 찾아온 프리스틴은 거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남자는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리 늦은 밤에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을 흘끗 보며 얘기했다.
“좀 늦은 시간인데.”
“당신 정말 정체가 뭐야?”
분노인지 슬픔인지, 거세게 그를 노려보며 말하는 프리스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에도 톡 건들면 눈물을 왈칵 터트릴 것처럼 아슬아슬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반응만 봐도 결과가 어땠는지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런 허술한 방법에 넘어갈 리 없는 그는 애꿎은 그녀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았을 것이다.
남자는 곧 거처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인데, 이미 그는 제 꼬리를 밟고도 반응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군요.”
“하나도 통하질 않잖아! 역시 당신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 그런 해괴한 음식을 일러 줬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겨우 꽃다발로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거라는 것부터가 터무니없었어!”
“일단 여기 앉아요. 충분히 당신의 말을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마음 좀 가라앉히고 다시 이야기해요.”
남자는 프리스틴을 의자로 앉히며 차분한 목소리로 달랬다. 남자에겐 사람을 제 뜻대로 움직이는 재주가 있었다.
프리스틴은 깊은숨을 몰아쉬면서도 남자가 주는 차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에 대한 의심까지 모조리 풀리는 건 아니었다.
“당신, 애초에 다른 뜻이 있어서 나한테 접근한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말해. 원하는 게 뭐야. 돈이야, 지위야?”
“그런 이야기는 아무리 나라도 조금…… 상처가 되네요. 나는 정말 순수한 의도로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이번엔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제법 진지했다. 그러니 프리스틴은 자신이 정말로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싶은 착각에 들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잖아! 다 엉망이야. 오늘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남자는 말해 보라는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프리스틴은 울컥 서러움이 북받쳤다.
“내가 준비한 음식을 모조리 부어 버렸어. 그 음식을 만든 요리사는 거의 죽이려고 했고……. 어떻게,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어? 대체 어떻게…….”
“그만큼 민감한 것을 건드렸다는 뜻이겠죠.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어요. 누군가와 가까워지려면 그 사이에 있는 벽을 깨트리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이번 계기로 그와의 벽이 무너진 것 아닐까요? 좋게 생각해요, 프리스틴.”
물론, 관계에서 벽을 깨트린다는 건 언제나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남자는 굳이 그 말까지 덧붙이진 않았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남자는 가끔 지금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황녀라는 지위를 가진 이상, 이름을 불릴 일이 흔치 않았기에 그럴 때면 항상 눈길이 갔다. 참 이상하게도,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남자는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당신, 벨리아르 공작과 무슨 관계야?”
남자는 태연하게 답했다.
“아주 친밀한 관계요.”
그리 놀라운 것 없는 말이었다. 이 남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남자가 벨리아르 공작과 친밀한 관계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내게 알려줬던 것들은 모두 사실이야? 나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도우려 한 거냐고.”
“내가 왜 당신을 괴롭히려 하겠어요. 그러려면 굳이 이런 귀찮은 방법을 택하지 않았겠죠. 그가 블루벨 꽃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 이상한 음식에 추억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프리스틴의 얼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건네준 정보들에 문제가 없다면, 제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라서, 벨리아르 공작은 온전히 자신을 그토록 싫어했다는 것이다.
프리스틴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녀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마녀의 눈동자를 가진 그 영애였다면.
프리스틴의 눈엔 도저히 그 영애가 단순한 피후견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누가 피후견인을 그런 눈으로 바라볼까.
벨리아르 공작의 눈빛에서 지독한 소유욕을 엿보았다. 다른 이의 눈이 닿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꽁꽁 숨겨 놓는 모습이 뻔하지 않은가.
“당신이 통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거예요.”
“……너무 속상해.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
“힘들면 그만둘래요?”
프리스틴이 고개를 들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만두겠냐는 말이 벨리아르 공작을 포기하겠냐는 말로 들린 탓이었다.
만약 여기서 그만둔다고 해도, 자신에게 남는 것은 공작과의 악화된 관계뿐이었다.
여기서 날갯짓을 멈췄다간 그대로 추락해 버릴 것만 같았다. 남자의 도움마저 없다면 이제는 그에게 다가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남자는 언뜻 그녀가 불쌍해 보였다. 그 여자와 이리 닮은 얼굴을 하고도 가진 것이 그저 빈 껍데기일 뿐이라 상처받는 것이.
이미 결론은 난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으니 마지막으로 미끼를 던져 보기로 했다.
남자로서는 프리스틴이 그를 속여 마음을 얻는 것에 성공한다면 아주 좋은 일이고, 어설프게 건드려 그를 들쑤셔 놓는다고 해도 별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충분히 다른 방법이 남아 있으니까.
“이곳으로 그를 초대할래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면, 딱 여기까지만 해 봐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프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남자의 정보를 따르기로 했다.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프리스틴의 손을 붙잡았다.
“대신, 이거 하나는 명심해요. 절대 잊으면 안 돼요.”
프리스틴은 남자가 전하는 말을 귀담아들었지만, 여태껏 들은 것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