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괜히 책을 읽겠다고 설쳤다가 기분만 안 좋아진 것 같았다. 벨라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재잘재잘 떠드는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창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직도 바깥에서 소리가 새어 들어오는지 귀를 기울였다.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대화 소리가 들리긴 했다.
벨라는 빛 하나 들어오지 않도록 커튼까지 꼼꼼히 치고선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두툼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몸을 웅크렸다. 그제야 방안이 완전한 고요에 빠져들었다.
완벽히 혼자가 된 기분에 편안하다고 느끼다가도, 사용인들이 말하던 그의 소식이 문득문득 떠올라 기분이 점점 깊은 수면 아래로 잠겼다.
중간중간에 사용인들이 찾아와 식사할 시간이라며 일어나길 재촉했으나, 꿋꿋이 이불 속에 파묻혀 자는 척을 했다.
“아가씨, 이러다 공작님께서 아시면 큰일 나요.”
“정말 주무시는 거예요? 아휴, 참…….”
그렇다고 억지로 일으켜 밥을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용인들은 한숨을 내쉬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헷갈렸다.
“……답답해.”
벨라는 이불 속에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곧이어 단정한 노크 소리가 한 번 울렸다. 이젠 노크하는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는데, 방금은 에릭이었다. 에릭은 그녀가 대답이 없자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바깥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뒤늦은 걱정이 몰아쳤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낮부터 이러고 계신 듯합니다. 식사는 거르셨고요.”
그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는 것까지, 지척에 있는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진짜 성가시네.”
곧이어 벌컥 문이 열렸고, 벨라는 머리끝까지 덮어쓴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옅은 후회가 덧씌워졌다.
그때 그냥 일어날걸,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아 그냥 쭉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너는 조금 심한 것 같아.”
그가 걸터앉자 침대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정수리를 살살 매만졌다.
“개도 주인이 오면 이따위로 굴진 않는데. 우리 벨라는 개만도 못하네.”
그는 이미 그녀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라가 자는 모습을 자주 지켜본 그로서는 숨소리만 듣고도 그녀의 상태를 알아챘다.
벨라는 조용히 이불을 걷어 내곤 몸을 일으켰다. 답답한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니 상대적으로 시원한 공기와 함께 반갑지 않은 바깥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벨리아르는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널 보려면 이렇게 직접 찾아와야 하는구나.”
“……공작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그는 벨라가 자신의 외출에 대해 묻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평소라면 절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빙긋 웃으며 과하게 정중한 어투로 답했다.
“누구를 좀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아, 이른 아침엔 다른 일 때문에 옆 도시에 다녀왔습니다. 자세히 누굴 만나고 어디를 무슨 일 때문에 다녀왔는지 말씀드릴까요.”
“제게 왜 존대를…….”
“제가 아가씨를 모시고 살잖습니까. 이렇게 외출하고 돌아오면 꼬박꼬박 인사하러 오고, 식사도 챙겨드리고, 어디 다녀오고 무엇을 했다 보고도 드려야 하고.”
그가 차분히 말을 쏟아 내다 잠시 말을 끊었다. 벨라가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벨리아르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목을 틀어쥐어 침대로 내리눌렀다.
“그러다 이렇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면 달래 드려야 하고.”
“흐윽…….”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눈동자는 빠르게 공포로 물들었다. 정신을 차리면 적당히 숨을 쉴 수 있을 텐데도 괴로운 듯 몸을 바르작거렸다. 벨리아르는 무감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고, 공작님……. 잘못, 잘못했어요……. 흑, 제발…….”
그렁그렁한 눈으로 매달리며 애원하니 벨리아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분명 남녀노소 불문하고 제 앞에서 울어 대는 것들은 다 입을 찢어 놓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벨라를 울리는 건 즐거웠다. 이제야 쌓였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가 목을 놓아주니 벨라는 잔기침을 뱉어 내며 꾸역꾸역 울음을 삼켰다. 벨리아르는 일부러 미소를 지워 내며 차갑게 질책했다.
“진짜 어디 깊은 숲속에 묶어서 처박아 둘까. 왜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해, 응?”
벨라는 다급히 바닥으로 내려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았다. 정신없는 와중에 그가 한 말이 저를 다시 숲에 내다 버리겠다는 소리로 들린 탓이었다.
“……공작님, 저 버리지 마세요, 네? 제가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 테니까……. 다음부턴 절대 이런 짓 안 할게요…….”
프리스틴과 결은 같았다. 그의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제발 저를 봐 달라 애원하는 모습이. 분노라고 하기엔 다소 묘한 감정이 거대한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벨라는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가라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치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고요한 화산 같았다. 그는 평소보다 느릿한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오늘은 기분이 정말 개 같아서, 네 사정 봐줄 여유 없어.”
벨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벌을 주겠다고 암시하는 듯했고, 안 그래도 불붙은 화로에 자신이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니 무엇이든 감수해야 했다.
그는 잠깐의 시간을 준 후 그녀에게로 단호한 손길을 뻗었다. 팔을 붙잡아 일으켜 침대로 내던지는 손길에서 억누르지 못한 조급함이 느껴졌다.
벨라가 입고 있던 네글리제가 순식간에 가슴 위까지 말려 올라갔다. 속살이 비치는 얇은 속옷은 그의 손에 찢기듯 내던져졌다.
밤의 촉촉한 공기가 피부로 내려앉자 가느다란 몸이 잘게 떨며 움츠러들었다. 새빨개진 얼굴처럼 새하얗던 몸 역시 복숭아처럼 옅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는 거침없는 손길로 그녀의 연한 살결에 선명한 열기를 피워 냈다.
미리 경고했던 것처럼 그는 정말 여유가 없어 보였다. 빠르게 옷을 벗어 낸 그가 벨라의 다리 사이로 자리 잡았다. 배려 없는 손길을 받아 내는 것이 빠듯하고 벅차 울먹이며 그를 불러 보았다.
“공작님…….”
“입 다물어. 주인이 만지는데, 넌 참아야지.”
그는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제 것을 그녀의 입구에 뭉근히 문질렀다. 처음 닿는 남자의 것에 놀란 몸이 화들짝 움츠러들었다. 벨라가 불안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목을 끌어안자 그는 곧바로 팔을 풀어냈다. 그는 벗어 놓은 셔츠를 길게 잡아 벨라의 양 손목을 침대 헤드에 묶어 놓았다.
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서러움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의 손이 닿는 것조차 싫어서 이리 묶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곧이어 거대하고 뜨거운 것이 좁디좁은 몸을 억지로 가르고 들어왔다. 얇은 피부가 찢기는 고통에 신음이 마구잡이로 새어 나왔다.
“아……. 흑! 아파……. 아파요, 공작님…….”
흐느끼는 소리에도 그는 단호하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아랫배를 빠듯하게 조이는 압박감은 생경한 아픔과 불안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좁은 몸을 억지로 파고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지 눈가를 찌푸렸다. 음욕에 젖은 목소리가 나직이 깔렸다.
“힘 풀어. 움직이기 힘들잖아.”
그가 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놓는 듯했다. 다리 사이를 탄탄한 근육으로 감싼 거대한 몸이 가득 메우고 있으니 허벅지를 오므려 봤자 그를 자극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깊은숨을 내쉰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처음 들어올 때의 아픔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갈수록 더 깊고 빠르게 움직이는 탓에 그녀의 손이며 발끝이 애처롭게 떨렸다.
필사적으로 깨문 입술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차마 그의 손가락을 물 순 없어 벌어진 입술로 참지 못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교성이 함께 샜다.
“소리 내서 울어.”
단순히 아픔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숨이 차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가 저를 꿰뚫을 듯 깊숙이 들어와 찌를 때마다 저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일어서며 선득한 감각을 세세하게 퍼트렸다. 힘껏 오므린 발끝으로는 그 열락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가 소리 내서 울라고 했기에 벨라는 마음껏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팔에 닿는 눈가와 뺨이 엉망으로 젖어 있었다.
그가 곧바로 턱을 틀어쥐고선 고개를 똑바로 고정시켰다. 희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저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가 마치 구름 사이로 뜬 두 개의 달 같았다.
“눈 돌리지 말고 나 봐. 제대로 주인을 보고 울어야지.”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아득히 귓가를 울릴 정도로 세게 울려 퍼졌다. 그럴 때마다 달무리 진 붉은 달 사이로 세찬 번개가 내려치는 듯했다.
그는 느릿하게 그녀의 따끈한 속살을 탐하다가, 또 거칠게 허리를 쳐올리며 벨라를 엉망으로 흐느끼게 만들었다.
벨리아르는 제 욕정이 모두 풀릴 때까지 밤새도록 몇 번이고 그녀를 안았다. 결국 벨라가 까무룩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