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산딸기와 쑥이 들어간 스튜. 우연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조합이 머나먼 기억을 끌어냈다.
낡고 빛바랜 기억과 달리 맛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해괴한 조합으로도 제법 조화로운 맛을 끌어내니, 인정해 줄 만한 실력이었다.
“이 음식, 전하께서 직접 만드신 겁니까?”
“……아니요, 황실의 전담 요리사가 만들었어요.”
그렇지, 어설픈 정보로 어설프게 흉내 낸 것은 반드시 중요한 사실을 놓치기 마련이었다. 아마 프리스틴에게 정보를 준 존재는 그녀를 도와주려는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로 부르시죠.”
“……요리사를 불러와.”
부드러운 미소를 곁들여 말한 덕분인지, 황녀는 무언가 불안해하면서도 순순히 요리사를 호출했다. 잠시 후 요리사가 긴장에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소문의 벨리아르 공작 앞에서 바짝 얼은 모습이었지만, 얼굴엔 은근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다리를 꼬아 앉은 벨리아르는 식탁 위에 올려진 손을 일정하게 까딱였다.
톡, 톡.
고요한 분위기 사이로 권태로운 소리가 울렸다. 그는 느릿한 시선으로 요리사를 훑어보다 짧게 지시했다.
“이리 가까이.”
요리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주춤거리며 다가온 요리사는, 그의 서늘한 눈빛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렸다. 힘 빠진 사냥감을 코앞에 둔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제 앞에 놓인 스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요리사가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무, 무슨 문제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 흐윽! 으악!”
요리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켜며 이상한 비명을 질러 댔다. 그가 접시를 들어 아직 뜨거운 스튜를 그대로 요리사의 머리 위로 부어 버린 탓이었다.
“베, 벨리아르 공……!”
프리스틴이 경악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지만, 그는 무감한 얼굴로 다른 음식들도 차례차례 요리사에게 부어 버렸다.
중간에 요리사가 일어서려고 했으나 그가 발로 무릎을 꾹 밟는 바람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저항할수록 무릎이 으스러질 것 같았기에 요리사는 그저 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저를 우습게 보셨으면 이딴 음식으로 대접할 생각을 하셨을까.”
벨리아르는 냅킨에 손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만든 음식물을 가득 뒤집어쓴 채 벌벌 떠는 요리사의 어깨를 발로 차 넘어트리곤 목을 짓밟았다.
“컥, 커헉! 끅!”
괴로운 신음을 내지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아예 숨을 쉬지 못하도록 목구멍을 꾹 밟아 눌렀다.
“전하께서 만드셨다고 했어도 상당히 화가 났을 것 같은데, 이런 쓰레기가 이 음식을 만들었다고 하니……. 정말, 기분이 더럽네요.”
자신을 자극할 생각이었다면 참 적절한 작전이었다 박수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다 알면서도 이리 화가 치솟으니, 기꺼이 응해 주어야지 어쩌겠는가.
점점 요리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프리스틴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벨리아르 공, 제, 제발 그만……. 그만하세요.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럼 오늘 일이 새어 나가면 이 안에 있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소리겠죠. 소문이 퍼지면 전하도 부끄러우실 테니, 그땐 다 잡아 죽이면 되겠습니다.”
쥐 죽은 듯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사용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중엔 귀족도 있었지만, 그가 말한 것을 행할 땐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의 집요함도 알기에 이들은 절대 가벼이 혀를 놀리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음식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이러시는 건가요? 제가 실수했어요. 당장 다른 음식을 준비하라 이를 테니…….”
이 멍청한 여자는 아직도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가 정말 단편적으로 음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벨리아르가 낮게 웃었다.
“단순히 그뿐이겠습니까.”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벨리아르는 의자에 몸은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직도 혀끝에 미묘하게 남아 있는 스튜의 맛이 불쾌하면서도, 애틋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아득히 먼 기억이 바람처럼 불어왔다. 감각들이 하나둘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품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정신 좀 차려 봐요.”
“배고플 것 같아서 들고 왔는데……. 좀 먹어 볼래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요리 솜씨는 정말 최악이었다. 음식 냄새가 역해 짜증을 부린 건 지상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진짜 음식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딴 걸 제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치워.”
“당신 대체 뭐야? 사람이 걱정돼서 챙겨 주는데! 이럴 거면 내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가든가! 왜 자꾸 신경 쓰이게…….”
바닥에 엎어진 음식을 보며 서러운 듯 씩씩대면서도 그녀는 날이 밝으면 기어코 저를 찾아왔다.
“그건 또 뭐야?”
“……이제 좀 배고픈가 보지?”
“그러네. 가져와 봐.”
산딸기와 쑥이 들어간 스튜는 처음 맛본 그녀의 음식이었다. 조합이 괴상한 탓도 있었지만, 뭐든 그녀와의 처음은 소중하고 잊을 수 없었다.
“어때? 괜찮아?”
“……별로야?”
그때 본의 아니게 인간들의 선한 거짓말을 깨우쳤다.
“……아니. 그냥, 먹을 만해.”
“이건 산딸기고, 이건 쑥인데……. 이거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귀한 거야.”
“그래, 알았어.”
블루벨로 만든 꽃다발을 보내는 것까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충분히 그 의도를 모른 척해 줄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리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곤란했다.
산딸기와 쑥으로 만든 스튜라니. 단순히 콕콕 찔러 보는 것과 대놓고 칼을 꽂아 넣는 건 상당히 큰 차이가 있지 않나.
그 자리에서 가느다란 이성의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지 않았다면, 요리사가 아니라 프리스틴의 목을 짓밟았을 것이다.
황녀가 기억 속 그녀와 닮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 얼굴을 보고 나면 자연스레 옛 기억이 떠오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프고 괴로운 것이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와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잊고 싶었다.
그 쥐새끼 같은 놈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듯했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또 증오한다는 것을. 그는 인상을 확 구기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하.”
상처받은 얼굴로 저를 보는 프리스틴의 모습이 지독하게 아른거렸다. 감히 그 얼굴을 하고서 어설프게 그딴 짓거리를 벌이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껍데기를 가상히 여겨 선을 느슨히 그어 주었건만, 어리석은 여자는 기어코 선을 밟고 말았다.
그는 조용히 입술을 매만지며 다른 쪽 손을 일정하게 까딱였다. 점점 깊은 분노로 잠기는 동안, 그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당장 벨라를 안아야겠다.
* * *
오늘은 바람이 그리 차지 않고 적당하게 불어오길래 창문을 열어 두었다.
테이블 위엔 따끈한 팬케이크와 우유가 있었다. 시에나가 직접 만든 것이라며 슬쩍 주고 간 것이다.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으니 오랜만에 책을 읽기로 했다. 그녀가 읽을 수 있는 책은 그가 주는 것들로 한정돼 있었는데, 대부분 역사와 관련된 것이거나 시집이었다. 시는 허락해 주면서 소설은 안 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저번에 보려고 했던 신화 책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꼼꼼히 읽어 보리라 결심하고 첫 장을 펼쳤다. 책의 시작은 여신 타라의 이야기였다.
벨라는 손끝으로 글자를 훑으며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태초에 여신 타라는, 생명의 대지에서 빛과 어둠을 창조했다. 둘은 이름처럼 태생부터 근본이 달랐다. 빛은 운명을 관장하는 테리테스로부터, 어둠은 주신 세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
음, 그러니까. 그럴듯하게 쓰여 있었지만 여신 타라가 각각 다른 신에게서 자식을 보았다는 이야기였다.
그걸 뭐 이리 어렵게 써 놨담.
작게 투덜거린 벨라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신화를 읊어 내려갔다.
“타라는 두 존재를 공평히 사랑했기에 아끼는 이름을 나눠 주었다. 빛은 엘리아스, 어둠은…… 벨리아르.”
익숙한 이름들에 글자를 훑던 손가락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이런 신화는 모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와 입으로 전해지는 허구일 뿐이다. 벨라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에 그저 절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벨리아르, 벨리아르.
어두운 그 이름을 곱씹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가문의 이름일 뿐,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없었기에 굳이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깨닫자 책의 내용이 조금 거북해졌다.
별로 뒷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열린 창문 사이로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들었어? 공작님이 오늘 황녀 전하와 런치 데이트를 하러 가셨대.”
건물 벽에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지 말소리가 선명했다. 벨라는 얇은 종잇장을 만지작거리며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성은 더 이상 듣지 말고 당장 창문을 닫으라 소리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말? 한 번도 그러신 적 없었잖아. 그러면 황녀 전하와 약혼을 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잘 생각해 봐. 공작님께서 그래도 황녀 전하께는 나름 유하신 편이잖아. 마음이 있으니까 그러신 거 아니겠어?”
“하긴, 황녀 전하 정도면 제국 최고의 신붓감이지.”
벨라는 그쯤 듣다가 탁, 하고 책을 덮었다. 다들 황녀에 대해선 좋은 말만 했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분이라느니, 별 볼 일 없는 평민들에게도 인정을 베푸는 친절한 분이라느니.
자신이 베른에서 겪은 황녀는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그 말들에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벨라는 입을 삐죽이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리 친절하지도 않으시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