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벨리아르, 혹시나 이 꽃 꺾어 올 생각 하지 마. 나 꽃 꺾는 거 싫어. 이렇게 두고 보는 게 훨씬 좋아. 알았지?”
그녀가 잘 때 숲에 있는 보라색 꽃이란 꽃은 몽땅 꺾어 갈 생각이었던 그는 태연히 웃으며 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벨라는 그런 그를 마주 보며 이내 배시시 웃고 말았다. 결국 참지 못한 벨리아르는 그녀를 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그가 풀밭으로 풀썩 쓰러지며 벨라가 그 위에 엎드린 모양새가 되었다.
“앗, 벨리아르. 이러면 또 옷이 더러워지잖아.”
그는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닿자 가녀린 몸이 작게 떨었다.
“버리고 새로 사자.”
그럼 이 걸리적거리는 옷은 찢어도 될까?
다정한 눈빛으로 재촉하니 그녀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럴 돈이 어딨어.”
“내가 벌어 올게.”
“정말?”
“벨라, 돈 좋아해?”
“돈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는 벨라의 얇은 허리를 뭉근히 쓸어내리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제 손이 닿는 대로 달아오르는 몸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왜, 돈 밝히니까 별로야?”
“아니. 세상의 모든 재물을 끌어모으려면 며칠이 걸릴까 해서.”
“그럼 그 며칠 동안 벨리아르 못 보는 거야?”
“나랑 떨어져 있는 게 싫어?”
벨라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 그의 품으로 와락 안겨들었다. 이슬을 잔뜩 머금은 짙은 풀 내음 사이로 그의 향기가 섞여 들었다. 그에게선 나무처럼 단단하고 묵직한 향이 났다.
“……가지 마. 재물 같은 거 전혀 필요 없으니까, 그냥 이렇게 나랑 놀아.”
그가 나직이 웃자 너른 가슴팍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아 나른히 눈이 감겼다.
“착하네. 저 꽃 이름이 뭐야?”
“블루벨, 블루벨이야.”
“너랑 닮았어, 벨라.”
다정히 웃는 모습에 잠시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잠시 방심한 사이, 그의 무심한 손길에 기어코 옷이 찢어지고 말았다.
깊은 숲은 찾는 사람도 없으니 오로지 둘만의 세상이었다. 서로의 열기로 몸이 듬뿍 젖을 때까지 그는 벨라를 탐했다.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라.
이미 지상으로 처박힌 그에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운명을 거스른 대가가 벨라라면, 기꺼이 잠식당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오두막 주위가 보랏빛 블루벨로 황홀하게 물들어 있었다. 꺾지 말라고 하면, 뿌리까지 그대로 파 오면 될 일이었다.
* * *
며칠이 지나도 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프리스틴은 곧장 남자를 찾아왔다.
“전혀 반응이 없잖아. 내게 제대로 된 정보를 준 게 맞아?”
그녀는 씩씩대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분명 꽃다발을 제대로 전했는데 공작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연락해서 반응을 묻기도 우스운 일이고.
눈앞의 남자는 결국 저를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녀의 물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남자는 프리스틴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손은 왜 그래요?”
프리스틴은 얼른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지난날 레오니스가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연습하다가 물집이 잡힌 것이었다.
그리 무리한 것도 아닌데 평생 고된 일이라곤 전혀 해 보지 않은 손은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상처가 생겼다.
“……신경 꺼. 네가 알 바 아니야.”
남자는 이상한 데서 집요한 면이 있었다. 프리스틴의 손을 홱 채 가더니 상처를 세세하게 살폈다. 반듯한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이런 건 보통 검이나 활을 쥐었을 때 생기는 상처인데. 손가락의 상처가 더 심한 걸 보니 활 같네요.”
깔끔하고 정확한 추리라 프리스틴은 침묵을 택했다. 그러나 남자는 꼭 대답을 듣고 싶은 듯했다.
“귀한 황녀 전하께서 어찌 이런 상처를 얻으셨을까요.”
뭐, 어차피 알아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프리스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대꾸했다.
“……좀 있으면 사냥대회가 있어. 나도 거기에 참가하려고 해.”
“가르치는 사람이 영 서툰 듯한데, 제가 가르쳐드릴까요?”
“활을 다룰 줄 알아?”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당기고 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
너무 무지한 대답이라 프리스틴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진심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농담으로 하는 말인지.
“오늘은 그럼 저랑 활로 내기할까요? 다섯 발을 쏴서 더 많이 명중시키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내가 왜 너랑 그런 내기를 해?”
“내기에서 이기면 다음 힌트를 줄게요.”
남자의 체격이 제법 다부져 보이긴 했지만 별로 무기와 어울리진 않았다. 그래도 사내인데 자신보다는 힘이 셀 테니 무엇이든 유리하지 않을까.
프리스틴도 활 연습을 그리 많이 한 것은 아니기에 대답을 망설였다. 솔직히, 남자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남자는 빙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이겨도 힌트는 줄게요. 대신, 제가 이기면 당신의 하루를 주세요.”
프리스틴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이 거대한 제국의 황녀라는 것을 잊은 것이 분명했다.
“장난해?”
“그럼 한나절?”
이런 무뢰한에게 휘둘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프리스틴은 단호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가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알았어요, 반나절. 그 정도는 줄 수 있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이길 수도 있는데?”
제법 솔깃한 이야기였다. 프리스틴은 남자에게 붙잡힌 제 손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평소 같으면 당장 뺨을 휘갈겨도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황녀라는 것을 잊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차피 내기의 승패와 상관없이 정보를 주겠다고 했으니 애초에 내기가 무슨 상관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신이 이기면 어차피 받을 정보를 받는 것이고, 지면 괜히 시간만 뺏기게 되는 것인데.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는 남자를 보며 프리스틴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해, 하자고.”
이런 뻔한 수작에 말려들 줄이야.
* * *
“주인님, 프리스틴 황녀에게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꽃다발을 보내고서 닷새 즈음이 지난 시점이었다. 조금은 더 참을 줄 알았더니, 벨리아르는 초대장을 받아들며 성미가 참 급하다고 생각했다.
“가실 겁니까?”
“응.”
“예, 알겠습……. 예? 가신다고요?”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해 초대하는 것이었다. 간소한 티타임도 귀찮다고 거절하는데 무려 식사 자리에 응하겠다니. 에릭이 태연히 답하다가 놀라 되물었다.
“황녀가 초대장을 보냈으니 응하겠다는데, 그게 그리 놀랄 일이야?”
“당연히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궁금하잖아. 저번에 그리 깜찍한 짓을 했는데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이렇게 절절매는 꼴이 재밌기도 하고.”
황녀가 그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면 아주 훌륭한 작전이었다. 처음부터 이리 과감하게 나왔다면 그가 한 번쯤은 눈길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태껏 황녀의 행보와는 전혀 달랐으니,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는 유추도 가능했다.
“이번에도 아가씨와 함께 가십니까?”
“아니.”
에릭은 저번에 황녀가 보낸 꽃다발을 보고 시무룩해하던 벨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 소식을 알게 되면 또 혼자 방에 처박혀서 울 것 같았다.
“나중에 알면 서운해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에릭.”
“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
에릭은 잠시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보다 그의 장난감이 망가질까 더 걱정한 꼴이었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며 황녀의 초대장을 찢었다.
“내가 벨라의 기분에 맞춰서 행동해야 할까?”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이러다 내가 벨라를 죽이겠다고 하면 막아서기라도 하겠어.”
그럴 리가.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언젠가 그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저는 직접 벨라의 목숨을 앗아 가야 할 수도 있었다.
* * *
황궁의 요리사로서는 때아닌 날벼락이었다. 세상의 어떤 요리든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황녀의 주문은 상당히 해괴하고 난감한 것이었다.
“산딸기와 쑥을 넣고 스튜를 끓여 오시랍니다. 아, 그리고 이것들을 이용해서 다른 요리도 준비해 주세요. 귀한 분께 드릴 음식이니 차질없이 준비하라 이르셨습니다.”
요리사는 순간 제 눈과 귀가 잘못되었나 했다. 산딸기와 쑥이라니, 가난한 평민들이나 뜯어먹을 법한 허접한 풀떼기들은 또 무엇이고.
산딸기와 쑥을 넣고 끊인 스튜……. 이런 조합은 아무리 엉망인 여관이라도 내놓지 않을 음식이었다.
하지만, 황실 전담 요리사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이런 해괴한 주문이라도 조화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실력 아니겠는가.
“으랏!”
요리사는 우렁차게 기합을 넣고선 요리를 시작했다. 쑥의 쌉싸름한 맛을 가리기 위해 온갖 귀한 향신료를 동원했다. 그렇다고 과하게 쓰면 오히려 풍미를 망치니 적당한 맛과 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산딸기가 있으니 설탕의 양은 조금 줄였다. 최종적으로 스튜의 맛을 보았을 때, 요리사는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인은 재료를 가리지 않는 법이지.”
더불어 주어진 야생 풀들로는 특제 드레싱을 얹어 샐러드로 만들었다. 드레싱이 훌륭하니 싸구려 풀들로도 색다른 맛이 났다.
프리스틴은 긴장 어린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벨리아르의 표정을 살폈다. 테이블로 하나둘씩 오르는 요리들을 보며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프리스틴은 순간 그 남자에게 또 속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산딸기와 쑥으로 만든 스튜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잘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합이었다.
지금이라도 이딴 요리들을 싹 물리고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해야 하나 망설이던 순간, 그가 스튜를 한 입 맛보았다. 프리스틴의 입술이 긴장으로 메말랐다.
“……어때요, 벨리아르 공?”
“음.”
그가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조용히 웃는 모습에 프리스틴은 섣불리 마음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