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꽃…… 안 좋아하세요?”
그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지금 그딴 질문을 할 때가 아니지.”
웬 꽃다발인지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황녀 전하께서 보내신 꽃이에요. 문 앞에서 에릭 경을 만나서…… 제가 대신 들고 왔어요.”
그는 말없이 벨라를 응시했다. 아니, 꽃다발을 보는 걸까. 시선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으니 괜스레 조급해졌다.
황녀가 준 꽃다발이 아니라, 오늘 특히 신경 써서 꾸민 자신을 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러워질까 봐 잘 입지 않던 흰색 원피스까지 입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내심 그가 버리라고 말하길 기대했다. 예전에 황녀의 친필 편지도 읽지도 않고 버리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뒤이은 그의 말이 벨라의 마음을 진득한 늪으로 끌어내렸다.
“화병에 꽂아 놔.”
“……네.”
대놓고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키지 않는 손을 움직였다. 표정까지 밝게 할 자신은 없어서 뾰로통한 입을 굳이 집어넣지 않았다.
조용히 창가에 놓인 빈 화병으로 다가가 꽃다발을 풀었다. 보라색 꽃들 사이에 황녀가 직접 쓴 것 같은 카드가 있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에요.]
못된 마음인 건 알지만, 그가 황녀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꾸만 성의 연회에서 그가 황녀를 감싸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은 다 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응어리진 것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벨라는 카드를 그에게 전하지 않고 조용히 창가에 올려 두었다.
발견하면 어쩔 수 없고, 혹여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런 것쯤은 황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겠지. 겨우 카드 하나 전해지지 않는 정도로는.
벨라는 서운한 손길을 움직이면서도 꽃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화병으로 옮겼다.
“다 했어?”
“네, 여기에 둘까요?”
“네가 놓고 싶은 곳에 놔둬.”
그의 말에 벨라는 화병을 둘 곳을 물색했다. 그의 책상 위는 싫고, 그가 창가에 자주 기대어 있으니 거기도 싫다. 소파 테이블 위도 그의 시선이 자주 닿는 곳이니 안 되고…….
“그럼…… 여기에 둘게요.”
벨라는 결국 벽 한쪽에 놓인 장식장 위로 화병을 올려 두었다. 속으로 꽃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내 못된 욕심 때문에 네가 해를 잘 못 보겠구나.
“그래, 잘했어.”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그러나 벨라를 바라보지 않고 손에 든 서류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며칠 전, 분명 그는 저를 원했었다. 제게 마음 없는 키스를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저 단순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제 마음이었다. 제 마음이 그때와는 달랐다.
“할 말 있어?”
장식장 앞에 선 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그녀의 시선이 거슬렸는지 그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네?”
“거슬리게 왜 거기 서 있어.”
“아……. 소파에 앉아 있을까요?”
그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일자로 뻗은 눈매가 매섭게 일그러졌다.
“벨라, 내가 널 불렀어?”
“……아니요.”
“그럼 용건이 있으니까 온 거 아니야. 단순히 저 꽃다발 전해 주러 온 거야? 할 말은 똑바로 하라고 했지.”
날카롭게 쏟아지는 질책에 숨을 쉬는 것이 빠듯해졌다. 그의 분노 어린 시선을 받아 내는 것이 버거워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 발로 자신을 짓밟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온 걸까.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그저, 그가 보고 싶었고 그의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무언가 이유를 대야 하긴 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시에나, 건국제 땐 보통 뭘 하는 거야?”
“음, 저는 귀족분들의 행사는 잘 몰라요.”
“괜찮아. 나는 보통 사람들이 뭘 하는지 알고 싶어서 물은 거야. 귀족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별로 관심 없어.”
“마을 곳곳이 축제 분위기예요. 건국제 기간엔 깊은 밤에도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답니다. 잔치 음식을 만들어서 이웃끼리 나눠 먹기도 하고요. 아, 당연히 축제니까 볼거리도 많아요.”
“신기하다……. 정말 좋을 것 같아.”
“아가씨, 공작님께 건국제 구경하고 싶다고 부탁드려보세요. 그래도 축젯날인데,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그럴까.”
맞아, 지금 건국제 이야기를 꺼내 봐야겠다. 베른에서도 가끔 밖으로 나가게 해 주었으니 조금의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사고가 있었지만.
“공작님, 저…….”
무거운 공기에 억눌려 다물린 입을 겨우 뗐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 그는 날카롭게 말을 잘라냈다.
“짜증 나게 굴지 말고 할 말 없으면 나가.”
순간 말을 잃었다. 어떻게 말해야 그가 들어줄까 하던 고민이 가득하던 머릿속도 새하얗게 지워졌다. 입을 다문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하니 그가 피곤하다는 듯 읊조렸다.
“왜 이리 말을 안 듣지.”
“……죄송해요.”
떨리는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조용히 무릎에 고개를 파묻곤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의 감정은 늘 헤아리기 어려우니까. 오늘은 그저 그의 기분이 특별히 안 좋았던 것뿐이라고.
그가 화를 내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니길 빌었지만, 떠오르는 이유들은 모조리 다 제 마음을 짓밟는 것들뿐이었다.
벨라가 일부러 구석에 놔두었던 화병이 어느새 그의 책상 위로 놓여 있었다. 벨리아르는 무심한 손길로 늘어진 꽃잎을 톡톡 건드렸다.
“황녀가 보냈던데.”
권태로운 음성이었다. 에릭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에릭, 내가 좋아하는 꽃이 뭔지 알아?”
“……블루벨 아닙니까?”
“그럼 가장 증오하는 꽃은.”
그러니까, 그는 블루벨을 가장 사랑함과 동시에 가장 증오했다. 단순히 꽃일 뿐인데, 지독한 애증이라고 생각했다.
에릭은 그동안 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는 성의 화원에서 블루벨이 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정원사들이 숱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모두 그 꽃 때문이었다. 미처 피지 못한 꽃망울을 잘라 내서, 시기를 잘 맞추지 못해 꽃이 듬성듬성 피어서. 그 외에도 허망한 이유가 많았다.
“……화원에 항상 피어 있는 꽃이길래 싫어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 귀하게 여기던 꽃을, 그는 손으로 그러쥐어 무참히 짓이겼다. 화병에 고이 꽂혀 있던 꽃이 엉망으로 추락했다.
“제법 깜찍한 짓을 하네.”
얼핏 웃음기 서린 말투였으나 그의 기분이 상당히 언짢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에릭은 볼품없이 줄기만 남은 꽃병이 제게 날아올까 싶어 몸을 긴장했다. 애초에 피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행히 그는 손으로 화병을 쳐냈다. 평민들의 몇 달 생활비 정도인 값비싼 꽃병이 산산조각이 났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왜 이리 엇나갈까. 프리스틴도 그렇고, 레오니스도 그렇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릭?”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받아 주면 어디까지 가나 봐야지.”
벨리아르는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렇게 숨어서 깔짝거리는 놈은 뻔했다.
태생이 그런 존재였다. 남 앞에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비겁하게 뒤에 숨어 조종하기만 하는.
그는 그런 존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 *
시간에 무뎌지는 만큼 오래된 기억들은 희미해지기도, 잊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 기억은 이른 아침에서 시작되었다. 벨리아르는 열심히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느릿하게 따라갔다.
울창한 숲으로 햇살 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해사하게 웃으며 그 사이를 팔랑팔랑 뛰어가는 벨라의 모습은 사랑스러운 요정 같았다. 그러니 붙잡아서 제 품 안에 오롯이 가둬 놓고 싶었다.
벨라가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서서는 들뜬 얼굴로 그에게 손짓했다.
“벨리아르, 이것 좀 봐!”
녹음의 숲에서 사뿐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벨리아르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은실 같은 머리칼에 입술을 묻고서 낮게 웃었다.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여기 꽃이 폈어. 봐 봐.”
벨라가 땅을 가리키며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나 벨리아르는 꽃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그녀의 몸을 지분거리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응, 그러네. 예쁘다.”
“꽃이?”
“아니, 네가.”
마음 같아선 더 세게, 힘껏 끌어안고 싶었으나 그녀의 몸은 너무 연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아파했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나약한 존재인가?
품 안에 들어차는 몸이 너무도 가녀려서 가끔 불안했다. 이대로 연기처럼 사그라들까 봐. 아니면, 자신이 주체하지 못하고 망가트려 버릴까 봐.
“꽃을 보라니까!”
“네가 이렇게 예쁜데 꽃을 왜 봐.”
그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진지하게 답하자 벨라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정말 바보야.”
그녀가 가슴팍을 밀어내자 그는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벨라가 꽃을 자세히 보려 그 앞에 쪼그려 앉았고 그 역시 옆에 앉았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땅에 피어 있는 보라색 꽃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보라색 눈으로 보라색 꽃을 보며 웃으니, 벨라는 보라색이 인간으로 변한 것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 꽃이 그렇게 좋아?”
“응, 내가 여기 지나다니면서 계속 지켜봤거든. 오늘 드디어 꽃이 폈지 뭐야. 너무 예쁘지 않아?”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응.”
아직 풀잎에 고인 새벽이슬이 선명했다.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이 꽃을 보겠다고 숲을 헤쳐 오다니.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그녀의 옷에 묻은 풀잎들을 떼어 냈다. 무언가 묘한 낌새를 눈치챈 벨라가 그를 홱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