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으슥한 숲길로 들어섰을 때, 프리스틴은 그냥 돌아갈까 몇 번이나 고민했다. 시녀나 하녀 없이, 게다가 호위 병사도 없이 오로지 홀로 나온 길이라 더욱 불안이 짙었다.
정리되지 않은 풀잎이 드레스 자락에 감길 때마다 프리스틴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윽…….”
아무래도 헛소리에 홀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 분명했다. 정체도 모르는 남자의 말만 믿고 덜컥 이런 곳에 홀로 오다니.
당장이라도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커다란 나무 사이로 어느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여기예요. 잘 찾아오셨네요.”
“당신은…….”
눈을 가릴 듯 말 듯 내려온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살짝 구불거렸다. 언뜻 보면 금발로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절대 흔한 머리색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욱 흔치 않은 초록의 눈동자를 가지고 숲에 나타나니 그 존재가 더욱 선명하고 맑았다. 눈매를 고이 접어 웃는 모습에 프리스틴은 잠시 멍하니 눈길을 빼앗겼다.
“설마 못 알아보시는 건가요? 그런 천 쪼가리에 가려질 미모가 아닌데…….”
“……그리 말하니 알겠구나. 신관이 아니었어?”
“그게 중요한가요.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남자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프리스틴은 무시한 채 길을 안내하라 눈짓했다. 남자는 제법 상처받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전혀 진심으로 보이지 않았다.
숲길을 조금 더 걸으니 제법 커다란 오두막이 나타났다. 엉망이었던 오는 길과 달리 오두막과 그 주위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남자의 거처인 듯했다.
“……수도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차 드릴까요?”
“됐어. 한가하게 담소나 나누자고 온 거 아니야.”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프리스틴의 어깨에 두툼한 담요를 덮어 주었다.
“코끝이 빨간데요.”
살짝 손끝만 스쳤을 뿐인데 프리스틴은 바로 남자를 경계했다.
“뭐 하는 짓이야?”
날 선 눈초리에도 남자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테이블의 의자를 빼 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함부로 손대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당장 기사를 끌고 올 거야.”
“네, 그러시죠.”
정말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불안하긴 했지만, 그것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계기이기도 했다.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드러내도 별 상관없을 사람 같아서.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났다.
남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말없이 빙긋 웃곤 했다. 덕분에 프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따라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단속해야 했다.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프리스틴이었다. 결국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내가 찾아온 이유, 알고 있지?”
남자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진실하지 않은, 작위적인 미소 같아서 문득 소름이 돋았다. 순간 괜한 짓을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 남자의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고. 게다가 이런 인적 없는 곳에서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다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별안간 긴장감에 어깨가 굳어졌다.
“전하, 제국의 이름이 왜 블루벨인지 아십니까?”
“그게 내 목적과 상관있는 얘기인가?”
“저는 지금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 드리려는 건데요. 뭐, 그게 싫으시다면 저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나누다 가셔도 되고.”
뜬금없이 꺼낸 꽃 얘기가 벨리아르 공작과 얼마나 큰 연관이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국의 이름은 블루벨이었지만, 단순히 그뿐이었다. 제국을 상징하는 꽃은 에델바이스였다.
“……벨리아르 공작이 정복 전쟁 때 지대한 공을 세운 건 알고 있어. 마지막 전쟁이 끝나고, 검이 꽂힌 자리에 블루벨 꽃이 피어 있었다지. 그래서 블루벨이 된 거 아니야?”
마치 건국 신화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이백여 년 전의 일이니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벨리아르 공작만이 그 기억을 갖고 있겠지만, 그가 과거의 이야기를 매우 싫어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블루벨 꽃을 좋아하거든요.”
“……벨리아르 공이?”
“그에게 잊지 못한 오랜 연인이 있다는 건 아시나요?”
프리스틴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오랜 연인?
그런 건커녕 그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조차 본 적이 없었다. 여자와 관련해서라면 아주 작은 스캔들도 없었기에 프리스틴은 그 사실을 알고서 더욱 그를 가지고 싶어 했다.
“그런 건……. 들어 본 적 없어. 내가 아주 오랜 시간을 지켜봤는데, 그런 말은 가당치도 않아.”
“얼마나 오래 지켜봤는데요?”
“한…… 십여 년? 십 년 조금 넘었지.”
열 살 무렵에 그를 처음 보았다. 그때 태산처럼 커 보이던 공작은 지금도 올려다봐야 하는 존재였다.
문득 흘러간 세월을 회상하며 상념에 잠기던 찰나, 남자가 낮게 웃었다. 마치 웃음을 참으려다가 실패한 듯한 모습에 프리스틴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불쾌해. 웃지 마.”
남자는 애써 웃음을 가다듬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와 대화하게 되면, 블루벨 꽃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세요.”
“……그다음은?”
“그건 다음에 알려 드릴게요. 우선은, 그것부터.”
“그게 끝이야? 장난해?”
프리스틴은 기가 찬 듯 쏘아붙였다. 단순히 그 한마디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견고한 성을 함락하려면 작은 틈부터 비집고 들어가야 합니다. 절 믿으세요.”
과연 그 말이 벨리아르 공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가 헛소리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니 한 번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알았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뭔데요?”
“그……. 음.”
프리스틴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치맛자락을 꾹 말아쥔 주먹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벨리아르 공이, 나를 따로 만나 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허공을 쏘아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숙녀가 만남을 신청하면 예의상으로라도 받아 주는 것이 관례인데, 그는 너무도 쉽게 제 손길을 내쳤다. 그 사실을 누군가한테 말한다는 건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뭐, 꼭 만나서 얘기해야만 진심이 전해지는 건 아니죠.”
남자가 협탁 위에 올려져 있던 편지 한 통을 집어 들었다. 짧은 내용을 읽어내려가다 피식 웃고는 프리스틴에게 흔들어 보였다.
“이렇게 서신으로 전하는 방법도 있고.”
프리스틴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뱉었다. 남자가 다 알면서도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벨리아르 공은 이제 내 편지를 읽지 않을지도 몰라. 저번에도…… 읽지 않았거든.”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반응하니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수치스럽던 일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행동으로 보여 주세요. 때로는 말보다 작은 행동 하나가 더 큰 파장을 일으킬 때도 있으니까요.”
행동이라……. 겨우 그런 말 한마디에 그가 흔들린다면, 행동도 그리 거창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러나 한 가지 문제라면 블루벨은 보통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핀다는 것이다.
“혹시, 블루벨 꽃을 지금 구할 수 있어?”
“그건 제게 맡겨 두세요.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많이. 블루벨로 꽃다발을 만들 거야.”
“알겠어요.”
“여기로 사람을 보낼게. 그 아이를 통해 전해 주면 돼.”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어떻게? 황궁에 어찌 들어오려고.”
“신전에도 몰래 들어갔는걸요. 전하의 침실도 몰래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제국 내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 수도의 황궁이었다. 그런 곳을, 게다가 내밀한 황녀의 침실을 몰래 드나들겠다는 소리를 하는 것은 이 남자가 유일할 것이다. 프리스틴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벨리아르가 반응을 보이면, 다시 저를 찾아오세요.”
“……나더러 또 여길 오란 말이야?”
“안 오셔도 돼요. 하지만, 그러면 전하께서도 아쉽고 저도 아쉽겠죠.”
“당신은 뭐가 아쉬운데?”
“당신과 이렇게 담소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프리스틴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무례하구나.”
“그냥 심심할 때 찾아와도 돼요. 저는 늘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음 날, 해가 밝았을 때 프리스틴의 테이블 위엔 약속대로 블루벨 꽃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 * *
에릭은 저러다 집무실의 문손잡이가 닳아 없어지진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이 지켜본 것만 해도 십 분 가까이였다. 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는 무심히 벨라를 지켜보다 문득 자신이 들고 있는 꽃다발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를 보았다. 보라색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벨라가 들고 있으면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릭은 끝내 발을 움직여 그녀의 가까이 다가갔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니 그제야 제 존재를 깨닫고 흠칫 놀라며 돌아본다.
“……에릭 경.”
“거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아……. 공작님을 뵈려고요. 안에 계실까요?”
모든 감각에 예민한 그가 이리 문 앞에서 서성대고 있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 대체 언제 들어올까 시간을 헤아리고 계실지도.
“예, 오늘은 나가지 않으실 겁니다.”
“근데 웬 꽃이에요?”
벨라가 에릭이 들고 있는 꽃다발을 보며 물었다.
“주인님께 온 꽃입니다.”
“가까이서 봐도 돼요?”
방금까진 그렇게 울상이더니 꽃을 보고선 표정이 살짝 펴졌다.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쪽으로 꽃다발을 기울여 주었다.
“와아……. 진짜 예뻐요. 이거 성의 화원에 있던 꽃이네요?”
그녀가 순수하게 기뻐하며 웃으니 또 몹쓸 호기심이 또 고개를 쳐들었다. 에릭은 담담하게 꽃다발의 출처를 밝혔다.
“황녀 전하께서 보냈더라고요.”
“아…….”
순식간에 그녀의 눈매며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에릭은 한 가지를 확신했다. 기어코 제 주인이 벨라의 마음까지 틀어쥐었다는 것을. 어떤 마음인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아가씨께서 전해 주시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커다란 꽃다발을 안아 든 벨라는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꽃을 들고 들어가면, 그가 조금은 웃는 얼굴로 봐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