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치치와 평화로운 낮을 즐기다가 갑작스레 끌려온 벨라는 영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벨라는 벨리아르가 외출한 줄 알고 있었다.
“……저택에 계신 줄 몰랐어요.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조심스레 묻자 그는 포도주를 마시며 비스듬히 웃었다. 붉은 술이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왜, 내가 저택에 있어서 싫어?”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표정은 치치랑 노는 걸 방해받아서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인데.”
벨라는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으나 혹시나 그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바꿔야 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는…… 공작님이 집무 보실 때 옆에 앉아 있는 것도 좋아해요.”
쑥스러운 듯 조곤조곤 뒷말을 잇는 동안 볼이 발갛게 물들어 갔다. 그는 창가에 잔을 내려놓고서 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그녀가 다가오자 때늦은 가을 향이 풍겼다. 바람에 묻은 강물 내음이 스며들어 촉촉하게 익은 사과 같기도 했다.
고분고분 제 말을 따르는 모습에 마음속의 불길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대신, 다른 쪽으로 불꽃이 번진 듯하니 벨라에겐 이래저래 안타까운 일이었다.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벨리아르는 그녀의 팔을 확 잡아당겨 제 품 안에 가두었다.
그러다 벨라의 손이 잘못 스치는 바람에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와장창 깨어졌다.
날카로운 파편이 흩어지는 소리에 놀란 건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건지, 벨라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붙었다.
그녀는 곧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공작님.”
“가만히 있어야지.”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위험했다. 저릿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가 복숭아뼈 아래에 고였다. 이럴 땐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았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글쎄.”
분명 바깥에서 불쾌한 일이 있으셨던 거다. 자신을 다루는 손길이 묘하게 거칠고 급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화가 났을 때 종종 그랬다.
그의 품에선 짙은 포도주 향이 배어 나왔다. 달콤하고 씁쓸한 것이, 딱 그와 어울리는 향이었다.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그에게 온전히 삼켜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권태로운 포식자 앞에 놓인 토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살짝 발을 뒤로 빼는 미세한 움직임에도 그는 단호히 나무랐다.
그녀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인형처럼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뿐이었다. 그의 화가 풀릴 때까지. 언제부터인가 그의 분노는 오로지 벨라의 몫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의 기분이 빨리 풀어질지 고민했다. 그리고 이어진 행동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벨라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벨라의 키는 그의 어깨에 겨우 닿는 정도였기에, 살짝 뒤꿈치를 들어 매달리듯 해야 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나른히 웃었다.
“우리 벨라는 참 겁도 없지.”
“……저는 세상에서 공작님이 제일 무서워요.”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말도 안 듣잖아.”
“……죄송해요. 이제부터 정말 가만히 있을게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로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가느다란 허리를 서서히 옥죌수록 작은 몸의 무게가 온전히 제게 쏠렸다.
답답한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자세를 풀지 않는 것이 기특해서 허리를 받쳐주었다. 등을 살살 쓸어내리자 동그란 뺨이 가슴팍에 닿았다.
조금 지친 듯 따끈히 내뱉는 숨이 태초부터 잔혹했던 그의 성정까지 말랑하게 풀어놓았다.
“그래, 착하네. 이렇게 착하게 굴면 얼마나 좋아.”
아까까지만 해도 벨라가 오면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놓을 생각이었다. 발아래 꿇려놓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맹랑한 머리통에 확실히 각인시켜 줄 참이었는데.
여차하면 에릭이 잡아 놓았을 치치를 끌고 와 엉망이 된 꼴을 보여 주고 주제를 알게 할 생각이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하지만 이리 예쁘게 굴면, 아무리 그라도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그 사실을 깨닫자 벨리아르는 생경한 느낌에 불쾌감이 올랐다.
자신이 무언가를 함에 앞서 고민하게 되는 것이, 단호하게 쳐내지 못하고 잠시나마 망설이는 것이. 분명 스스로 베푼 자비가 아니었다.
그래서 찰나에 어리석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벨라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우리 벨라는, 저를 홀리기 위해 어머니가 보낸 악마가 아닐까.
“무슨 생각해.”
벨라는 그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어떻게 하면 공작님의 기분을 풀어 드릴까 하고요…….”
귓가로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졌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너른 가슴팍에 얌전히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동그란 머리를 쥐고서 살살 매만졌다.
“이 머리통은 매번 기특하고 맹랑한 생각을 하네.”
“……공작님,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뭐가 궁금할까.”
느른하게 되묻는 음성에 벨라는 안도했다. 처음보다는 그의 화가 많이 풀린 듯했다. 차마 덮어 놓을 수 없는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들던 참이라, 최대한 그의 기분이 좋아야 했다.
“황녀 전하와…… 데이트하기로 하셨나요?”
“어떻게 내 기분을 풀어 줄까 고민한다더니, 왜 그쪽으로 생각이 흘러갔지.”
사뭇 차가워진 목소리에 살며시 어깨가 굳었다. 그래도, 그가 어떻게 대답했을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대답해 주세요.”
“했으면. 감히 그딴 걸 물은 대가는 감당할 수 있고?”
어차피 제게 그 대가를 묻는다면, 이왕 내뱉은 거 대답이라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공작님께서 황녀 전하와는 만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누가 너더러 그딴 걸 생각하래. 오냐오냐해 주니까 아주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고 하네.”
그가 강하게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깊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상당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치미는 것을 애써 억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나직이 명령했다.
“키스해.”
잠시 머뭇거리던 벨라는 살풋 눈꺼풀을 내리며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로 입을 맞추었다. 떨림을 고스란히 머금은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가 고개를 숙여 주지 않으면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추는 것이 꽤 버거웠다. 애석하게도 그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다.
“공작님……. 고개를 조금만…….”
“벨라, 키스가 뭔지 몰라?”
그녀가 한 건 키스라고 하기에도 우스운, 단순한 입맞춤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벨라의 뺨이 사과처럼 붉게 익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자 따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그는 벨라의 애처로운 상태를 봐주지 않고서 냉랭하게 질책했다.
“똑바로 해.”
벨라는 서러운 마음을 억누른 채 다시 그의 입술로 매달렸다. 그래도 이번엔 그가 조금이나마 고개를 숙여 주었기에 아까보다는 수월해졌다.
입을 맞추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할 수 있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와 나누었던 키스를 떠올렸다. 다정함이라곤 없던 거친 키스뿐이었다.
혀를 움직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심하게 그의 입술을 혀로 살짝 건드려 보았다가, 오히려 자신이 놀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살며시 눈을 떴다가 짙은 눈동자와 마주하고선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짧게 숨을 내쉰 그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안 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다시금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눈을 질끈 감고서 혀로 그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제법 과감해진 행동에 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고 서투르기만 한 입맞춤이 오히려 그를 자극했다. 이리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그에겐 나름 고역이었다.
아래로 확 피가 쏠리는 느낌에 그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의 인내심은 상당히 한계점이 낮았다.
그는 벨라의 뒷머리를 움켜쥐며 살짝 잡아당겼다. 자연스레 벌어진 입술을 가르며 파고들어 서툴렀던 혀를 붙잡아 마음껏 휘감았다.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모르는 여린 살덩이를 얽고 잡아당기며 괴롭혀 댔다.
낮에 샌드위치와 마들렌을 먹더니, 입안이 온통 고소하고 달았다. 강하게 느껴지는 허기에 그는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탐하고 혀를 유린했다.
벨라의 몸이 자꾸만 아래로 처지자 벨리아르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들어 올려 책상에 앉혔다.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더운 숨결이 드나들었다.
그는 다시 입술을 맞부딪치고 빨아들이며 그녀를 가쁘게 몰아붙였다. 원피스 안으로 들어간 손이 통통한 허벅지를 쓸어올렸다. 그의 손길이 위로 향할수록 벨라는 흠칫거리며 몸을 떨었다.
벨라가 뒤로 벗어나려 바르작거리자 그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허리를 더욱 바짝 감아 속박했다.
“흣…….”
단단한 나무줄기에 얽힌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빠듯하고 버거운 열락에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덩이에 덴 듯 뜨거웠다. 아랫배로 선득한 감각이 모였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생소한 만큼 무섭기도 해서 절로 눈물이 샘솟았다.
벨리아르가 다시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로 눕혔다. 그가 제 위로 올라타자 벨라는 그의 옷자락을 와락 쥐었다.
손을 뻗는 그를 반사적으로 밀어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각하지 못하는 새에 흘린 눈물이 어느새 뺨을 온통 적셔 놓았다. 벨라는 흐느끼듯 그를 불렀다.
“흐윽, 공작님…….”
정염에 물든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울음 그쳐.”
제 아래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니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밀려 달아났던 이성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벨리아르는 작게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깊은숨을 내쉬며 조용히 울음을 삼키는 벨라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울리는 건 뭐든 즐겁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땐 또 기분이 한없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듯했다.
제 시선이 닿자 어깨를 흠칫거리며 올라간 옷자락을 슬슬 끌어 내리는 모습이 또 신경을 긁어 댔다. 그는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사뭇 갈라진 목소리로 지시했다.
“……벨라, 방으로 돌아가.”
이대로 있다간 제 손으로 그녀를 망가트릴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