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벨라는 저도 모르게 벨리아르의 표정을 살폈다. 황녀의 데이트 신청에 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심 거절하기를 바랐다. 평소처럼 냉정한 말투로 시간이 없다고 칼같이 잘라 내기를. 그러나 그는 제게 축객령을 내렸다.
“벨라, 나가 있어.”
마음대로 붙잡아 앉혀 놓을 땐 언제고, 이젠 나가라고 하는 것이 서운해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벨라.”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앉아 있으니 다시 한번 낮은 부름이 들렸다. 그것은 정중한 경고였다.
결국 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찰나에 스친 황녀가 오만한 얼굴로 이리 말하는 듯했다.
거봐, 너는 그저 공작이 예뻐하는 인형일 뿐이야.
벨라는 굳게 닫힌 응접실 문을 잠시 바라보다 자리를 떠났다.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어쩐지 무게가 실렸다. 침울한 얼굴로 씩씩대며 걷다가 에릭과 마주쳤다.
“아가씨.”
이상하게 에릭을 마주하는 순간 서러움이 북받쳤다. 방금 있었던 일을 그에게 다 말하고 싶었다.
황녀 전하가 공작님께 데이트 신청을 했다고, 공작님이 저를 쫓아내고 둘이서 단란하게 대화를 나눈다고.
그렇다고 해서 에릭이 다정히 달래 줄 스타일은 아니기에 꾹 참고 인사를 건넸다.
“……에릭 경, 식사하셨어요?”
“예, 방금 먹었습니다. 아가씨는요?”
“그럼 저랑 식사해요.”
“……예?”
“공작님은 제가 식사를 하든 말든 관심도 없으실 테니까요. 지금은 혼자 먹긴 싫으니까…….”
에릭은 금방 눈물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로 중얼거리는 벨라를 잠시 내려다봤다. 풍성한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정원에서 드시겠습니까?”
벨라는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정말 같이 식사해 주길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에릭 경 식사하셨다면서요?”
“앉아서 말동무는 해 드릴 수 있죠. 식사 제대로 하시는지 감시도 할 겸. 말하고 싶지 않으시면 그냥 조용히 앉아만 있겠습니다.”
“안 바쁘세요?”
“바쁜 사람 붙잡은 게 누군데요.”
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얼굴로 그런 소릴 늘어놓는데, 어찌 못 본 척 지나갈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예외 없이 무시했겠으나 에릭에게도 벨라는 조금 이상한 존재였다.
“시간 있습니다. 식사하러 가시죠.”
“……고마워요, 에릭 경.”
이렇게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일단 뭐라도 쥐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프리스틴은 공작 저를 빠져나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침실의 테이블 위에는 낯익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벨리아르 공작을 설득하는 대가로 받기로 한 귀한 목걸이였다. 프리스틴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목걸이를 델리아에게 건넸다.
“이걸로 할래.”
델리아는 프리스틴의 목에 목걸이를 바꿔 걸어 주며 흘긋흘긋 눈치를 살폈다.
벨리아르 공작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물어보기 힘든 분위기라 겨우 입을 다무는 중이었다.
“다 됐어요, 전하. 너무 아름다우세요.”
프리스틴은 턱을 틀어 거울을 통해 목걸이를 확인했다. 확실히, 제국 내에서 이 목걸이를 자신보다 훌륭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이 들었다. 그녀는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나, 벨리아르 공작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어.”
델리아는 소리 없이 놀라며 기쁜 얼굴을 했다.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길래 혹여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이리 엄청난 소식이 있을 줄은 몰랐다.
“세상에, 정말요? 축하드려요, 전하! 언제 만나기로 하셨어요?”
“내일.”
“그렇게 빨리요? 역시 공작님도 전하께 마음이 있으셨나 봐요! 그러니까 그리 급하게…….”
“델리아.”
프리스틴이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델리아의 말을 끊었다. 기쁨에 호들갑 떨며 열심히 말을 쏟아 내던 델리아는 순간 눈을 깜빡이며 반문했다.
“네?”
짜악――!
날카로운 마찰음이 허공을 갈랐다. 델리아는 뺨에서 느껴지는 홧홧한 통증에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새하얗게 흐려졌던 눈앞이 서서히 걷히며 냉담한 얼굴의 프리스틴이 드러났다.
“저, 전하…….”
“너는 다 좋은데, 그 입이 문제야.”
“흐윽…….”
“내일 외출할 거니까 준비해. 너랑 나랑 둘만 갈 거야. 괜히 다른 소리 새어 나가지 않게 알아서 조심하고.”
델리아는 꾸역꾸역 울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네, 전하.”
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녀가 때리면 군말 없이 맞아야 하는 처지였다.
델리아는 황급히 일어서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모습을 싸늘히 노려보던 프리스틴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너는 눈치도 없니? 아니면 더 얻어맞고 싶어서 그러고 서 있는 거야?”
“죄, 죄송해요, 전하. 이만 물러가 볼게요!”
델리아가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갔다. 프리스틴은 고요한 침실에 홀로 선 채 차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그 다정하던 눈빛과 목소리가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그 계집애에겐 그리 물어놓고, 내겐…….
“전하, 제가 드릴 대답을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요, 저는 몰라요. 그저, 벨리아르 공이 제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뿐이에요. ……숙녀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에요. 저는 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공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전하께서 부끄러움을 감수하셨다고 해서 제가 응해야 합니까?”
“……벨리아르 공.”
“욕심이 과하십니다. 원하시는 대로 사냥대회는 참석할 테니 다른 것은 욕심내지 마세요. 제가 전하께 이리 정중하게 대하는 것 또한, 의미 없는 짓이니 허튼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볼게요. 그 영애를 데리고 계시는 것 또한…… 의미 없는 행동이신 거죠?”
그리 물었을 때, 그는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그리 할 일 없어 보입니까?”
프리스틴은 늘 마음에 둔 사내에게 구혼장을 받지 못했다고 눈물을 보이던 영애들을 꼴사나워했다. 그깟 사내 마음 하나 얻지 못해서 추하게 질질 짜는 꼴이 같잖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황궁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프리스틴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드레스 자락을 꾹 쥐고서 숨을 가다듬었다.
벨리아르 공작만 사내인가. 당장에 저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줄을 서라 명하면 수도 바깥까지 줄이 이어질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도저히 벨리아르 공작이 아니면 안 되었다. 대체 무엇이 그리 진득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그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벨리아르.”
“그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 이곳으로 찾아오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프리스틴은 품 안에 지니고 있던 쪽지를 꺼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지 궁금했다.
* * *
벨리아르 공작의 저택은 방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잔잔하고 풍부하게 흐르는 거대한 강을 끼고 있으니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창문으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촉촉한 수채화 같은 배경에, 동화 속 공주 같은 벨라. 그 옆에 거슬리는 놈 하나만 치우면 완벽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벨라는 치치와 잔디밭에 커다란 돗자리를 펴놓고 샌드위치를 나눠 먹는 중이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때때로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벨리아르는 창가에 서서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에겐 찻잎으로 우려낸 차나 도수 높은 술이나 별다른 것이 없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벨라의 웃음소리가 자그마한 요정이 속삭이는 것처럼 귓가로 스며들었다. 그는 포도주잔을 살짝 기울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귀도 막아 버릴 걸 그랬나.”
주제도 모르고 그녀에게 향하는 저 다리도, 겁대가리 없이 손을 뻗는 저 팔도, 모조리 부러트려 뜯어내 버리고 싶었다.
“언제든지 명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뒤에 서 있던 에릭이 진심으로 답했다. 벨리아르는 순간 그러라고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그럼 또 울고불고 난리가 나겠지.
우는 모습이 예뻐서 좋다만, 그건 저를 위해 울 때만 해당하는 소리였다. 고작 갖고 놀라고 던져 준 장난감 때문에 그리 우는 건 상당히 언짢았다.
말없이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을 살피던 에릭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들어오라고 할까요?”
“됐어. 그냥 놔둬.”
저리 순수하게 즐거워하는데, 굳이 방해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벨라의 행동을 본 순간, 당장 창문을 깨부수고 나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강물에 처박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울면서 잘못을 빌고,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오로지 제게 매달리며 헐떡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저 새끼는 손이 없나.”
에릭 역시, 벨라가 치치의 입에 마들렌을 넣어 주는 것을 보고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 주인의 실낱같은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벨라 데려와.”
그냥 놔두라고 한 지 불과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