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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68)화 (68/180)

68화

유독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겨우 선잠에 들었다가도 어머니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괴롭혀 대니, 무의식과 현실의 경계에서 몽롱하게 떠돌았다.

무릇 오늘만의 괴로움은 아니었다. 밤마다 이어지는 고통이었고, 정말 괴로워 견디기 힘들 때쯤엔 그가 안식을 주었다.

아마 꿈이었을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촉촉이 잠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달빛으로 어룽진 시야에 그의 모습이 번졌다.

오늘도 정말 힘든데, 그가 나타나 주질 않는다. 울컥 서러움이 북받치며 심장이 쿵쿵 울려 댔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 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초조함이 극심해졌다.

“……공작님.”

잠겨 있다가 겨우 삐져나온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꿈에선 늘 이렇게 부르면 왜, 하고 대답해 주셨는데. 오늘은 정말 그가 나타나는 환몽이 간절했다.

잠깐 비친 꿈에서는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그 디어린 차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어 가는 모습이 낯설고 선득했다.

“공작님…….”

문득, 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기어코 그의 모습을 확인해야 이 불안에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깊은 밤 고요에 물든 복도를 정신없이 더듬어 갔다. 그가 며칠간 저택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무언가에 쿵 부딪쳤다. 단단하고 커다란 것이, 굳센 바위 같았다.

“벨라.”

바위가 저를 받치며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로, 그의 모습으로.

“공작님…….”

“안 자고 왜 돌아다녀.”

잔잔하게 꾸짖는 어투였다. 그 모습이 정말 그인 듯해서 바람 같은 안도가 불어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작님이 안 보이셔서…….”

“그래서 찾으러 나왔어?”

“……네.”

그제야 그가 며칠간 저택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한 꿈이었다.

그가 벨라를 번쩍 안아 들고서 성큼성큼 방으로 향했다. 벨라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는 손길이 평소보다 느릿했다.

“왜 응석이 늘었지.”

“……잠들기 무서워요.”

“그래서, 어떻게 해 줄까.”

꿈이니까, 진짜 그에겐 닿지 않는 말일 테니 마음껏 응석을 부려 보기로 했다. 과감하게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여기 있어 주시면 안 돼요……? 어디 가시지 말고……. 그러면 괜찮을 것 같아요…….”

끔뻑끔뻑 눈이 감겨서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볼 수 없었다. 잠시 말이 없다가, 침대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가 침대로 올라왔다.

목 아래로 팔을 받쳐주고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셔츠에 뺨을 비비니 그의 체향이 코끝으로 짙게 번졌다.

“……바위가 공작님으로 변했어요.”

그가 뒷머리를 꾹 누르는 바람에 살짝 숨이 막혔다. 숨쉬기가 조금 버거워지니 그가 죽을까 봐 걱정되었다. 생각의 흐름이 이상했다.

“공작님, 죽지 마세요…….”

벨리아르는 그 말이 제게 전하는 저주 같다고 생각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자.”

“……네.”

벨리아르는 곧장 제 품에서 색색거리며 잠에 빠져든 벨라를 공허한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감싸고 있던 어깨를 살짝 놓으니 작은 몸이 홀로 움츠러들었다. 그의 미간이 사뭇 좁아졌다.

착하게 저를 찾았으면서, 저 없이는 혼자서 잠들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먼저 안겨 들진 않는 작은 몸이, 조금 짜증 났다.

* * *

치치는 잘 먹는 편이었다. 주면 주는 대로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벨라는 늘 제 몫을 야금야금 떼어 치치의 접시 위로 올려놓았다. 어차피 자신은 배가 불러서 못 먹고 남길 양이었다.

먹기 좋게 잘라 놓은 수플레를 먹던 치치가 갑자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응?”

“계속 이러시면 아데인 경께 이를 거예요.”

“……뭐를?”

“자꾸 저한테 음식을 넘겨 주시잖아요. 이러다가 아데인 경이나 공작님께 들키면 제가 큰일 나요.”

벨리아르나 에릭은 치치에게까지 친절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을 하면 마땅한 벌을 내렸고, 벨라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세상은 오로지 그가 그려 놓은 것들로만 채워졌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아가씨 드세요.”

치치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벨라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수플레를 가져왔다. 그래도 혼자 먹을 때보단 훨씬 입맛이 돌아서 그리 힘들진 않았다.

“치치, 여기서 지내는 게 힘들진 않아?”

“아가씨, 전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어요. 어머니의 신분이 그랬거든요.”

치치에겐 투기장에서 지낼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가히 천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하루하루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아도 되고,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구타를 견디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두 눈을 잃었을 때, 자신의 가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싸울 수 없으니.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아가씨한테 정말 감사해요. 그곳에서 제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거든요. 아가씨가 제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거예요.”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하지 않아.”

“아니요. 아가씨는 제게 가장 커다란 분이세요.”

“정작 내가 네게 해 준 건 아무것도 없어.”

“아가씨, 아가씨는 저를 노예로 보세요?”

치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벨라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나는 그저 너랑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야. 너와 나는 전혀 다를 게 없어.”

“……제게 그렇게 말해 주고 대해 주는 사람은 아가씨뿐이에요. 그러니 부정하지 마세요. 저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벨라는 순간 먹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더 노력해서…… 꼭 네게 자유를 줄 거야.”

“네, 그때가 오면 저는 자유롭게 아가씨 곁에 머물게요.”

“그게 뭐야. 자유를 줬는데 날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해?”

“아가씨께서 제게 주신 자유를 마땅히 활용했을 뿐이에요.”

제 의지로 선택한 거라면, 그렇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치, 혹시 소원 있어?”

“소원이요?”

“응, 꼭 이루고 싶은 소원.”

벨라는 치치의 입에서 나올 말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치치가 하는 말을 고이 담아 뒀다가, 언젠가 꼭 이루어 주고 싶었다.

“……여동생을 만나고 싶어요.”

“여동생이 있구나. 몰랐어.”

“네, 그 아이도 어디론가 팔려 갔는데……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못 봤어요. 언젠가 꼭 만나고 싶어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니, 제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거든요.”

그럼 여동생도 소만 어딘가에 있을 텐데. 지금 자신으로서는 소만은커녕 제국 내에 있다고 해도 찾아줄 수가 없었다. 처절한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에 섣불리 약속해줄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치치가 오히려 그녀를 달랬다.

“아가씨,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아마…… 그 아이는 죽었을 거예요.”

치치는 동생의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도 초연히 웃었다.

* * *

며칠 뒤 벨리아르가 저택으로 돌아왔고, 프리스틴이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벨라를 불러 곁에 앉혀 둔 건 십여 일 만이었다. 그가 불렀을 땐 기뻤으나, 벨라는 지금의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니, 창문으로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불편한 자리였다.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것 아닙니까?”

“공작에게 할 말이 있었던 거지, 저 영애까지 필요했던 건 아니에요.”

대놓고 불쾌하다는 시선이 닿자 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둘 사이에 낀 방해꾼이 된 것 같았다.

“은밀히 둘이서만 해야 할 이야기입니까? 그럼 주위를 모두 물리겠습니다.”

사실 할 이야기는 정해져 있었고, 사냥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주위를 모두 물리라 하기엔 과했다.

그렇다고 저 영애만 내보내라고 하자니 너무 속이 뻔히 보이고. 공작 앞에선 너그럽고 상냥해 보이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발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말씀해 보세요.”

“건국제가 다가오니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사냥대회 일을 상의하셨어요. 이번엔 숲에서 야영하며 이틀간 진행하는 건 어떻냐 물으시더군요. 물론 귀족들이 참여하는 자리이니 최대한 불편하지 않도록 준비할 예정이에요.”

“황태자 전하께서 꽤 파격적인 생각을 하셨네요. 귀찮고, 번거로우실 텐데. 그래서 제게 의견을 물으러 오셨습니까?”

“아무래도 벨리아르 공작의 의견이 중요하니까요. 제가 공과 각별한 사이이니 직접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프리스틴은 은근슬쩍 그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그 속내가 뻔하기에 벨리아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른 의미로 황녀는 매번 그를 웃게 만들었다.

“어떻게 생각해, 벨라?”

“……네? 저, 저요?”

벨라는 순간 제게 말을 걸어오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언뜻 들어도 절대 자신이 의견을 내세울 거리는 아니었다.

“그럼 벨라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네게 묻는 거야. 사냥대회에 참가하고 싶은지.”

그래도, 그가 물었으니 대답해야 한다.

베른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황녀가 말하니 막연한 거부감이 앞섰다. 게다가 사냥대회라면 짐승을 사냥하는 것일 텐데, 그런 곳엔 가고 싶지 않았다.

총알 한 발에 무참히 목숨을 잃었던 토끼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불쾌함에 속이 울렁거렸다.

“……저는, 별로 참여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대답에 프리스틴이 미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벨라는 말해 놓고 순간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그는 사냥을 좋아하니까 그런 행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 탓이다.

습관처럼 그의 눈치를 살폈다. 벨리아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인간들이 우글우글 모이는 그런 행사 따위 질색이었다. 하지만, 이틀간 야영이라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라에게 토끼도 잡아 줄 겸.

“황태자 전하께 참여하겠다고 전하세요.”

벨라는 애써 표정을 다듬었다. 어차피 자신의 대답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굳이 왜 물은 걸까.

프리스틴이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네, 알겠어요.”

대화는 끝났다. 의도한 바를 이루었고, 제 손에 쥐게 될 목걸이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프리스틴은 어쩐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일어서서 응접실을 빠져나가려던 프리스틴은 빙글 돌아 그를 불렀다.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아, 벨리아르 공. 중요한 말을 빠트렸네요.”

대체 왜 망설여야 할까.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자신이 뭐가 무서워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모든 이들은 자신을 사랑했다.

프리스틴은 빙긋 웃으며 당당히 말을 꺼냈다.

“다음 주에 시간 되시면 저랑 데이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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