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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67)화 (67/180)

67화

벨리아르는 헛웃음을 내비치며 쓸데없는 상념을 끊어냈다. 우스운 꼴은 이쯤 보이면 충분했다.

“황제 건강 상태는 어때.”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해하는 일이 잦고 비정상적으로 숨이 가빠지는 경우가 가끔 있답니다. 디어린 잎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알아보니, 디어린 잎으로 중독되었을 때 중기 증세와 흡사하다고 합니다.”

“치료 가능성은?”

“이미 그 정도 진행됐으면…… 치료 방법이 불투명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죽진 않겠지만요.”

아주 마음에 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쓸만한 인물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서 해야 하는 일은 그저 고분고분하고 충실히 계약을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레오니스는 영 꽝이었다. 그는 때때로 레오니스를 실패작, 돌연변이라고 칭했다.

“2황자에게 사람 좀 붙여 놔.”

“예, 알겠습니다.”

에릭이 나가고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벨리아르는 비로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그시 눈을 감으니 제게 무릎 꿇고 빌던 벨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평소처럼 그냥 이용하면 될 것을. 그러다 망가지면 버리면 되는데, 왜.

천천히 따지고 보면 이유는 제법 그럴듯했다.

이름이 벨라라서. 눈동자가 예뻐서. 그 외에는 없었다. 아, 은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감겨서.

그러니까,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 자꾸만 이성을 흩트려 놓았다.

“……벨라.”

눈을 감으면, 그 이름이 여전히 반짝이는 햇살 같았다.

* * *

“벨리아르 공작을 만나셨다면서요.”

애가 닳아 먼저 얘기를 꺼낸 건 프리스틴이었다. 레오니스는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폐하를 뵈러 왔길래 겸사겸사 가 봤지.”

“……제 얘기는 하지 않던가요?”

“안타깝지만, 전혀 없던걸. 아, 옆에 재밌는 영애를 끼고 있던데. 공작의 먼 친척이라던가. 눈이 정말 보라색이라 놀랐어.”

레오니스는 순수하게 신기해하며 말을 늘어놓았지만, 프리스틴은 오라버니의 관심사에 동참해 줄 만큼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수도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황궁에 왔는데도 자신을 찾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전하는 좋으시겠어요. 벨리아르 공작이 수도에 오셨으니 이제 마음껏 뵐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요. 베른에서는 전하를 위해 연회도 열어 주었다면서요? 멀어서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이 반지도 그때 벨리아르 공이 선물해 준 거야.”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귀족 영애들은 프리스틴과 벨리아르의 사이가 매우 특별한 줄 알고 있다. 프리스틴이 완전한 숙녀로서 성숙해질 때까지 그가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모두 프리스틴이 만들어 낸 이미지였다. 그가 선물해 주었다며 반지를 자랑할 때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작 반지를 선물 받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아는 그녀로서는 공작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기분이 땅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프리스틴이 날카롭게 대꾸하자 레오니스는 또 한 번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엔 막냇동생의 행동이 그저 철없는 치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프리스틴은 어머니인 황후를 쏙 빼닮았다. 어머니 역시 오로지 황후의 자리를 얻기 위해 아버지와 결혼했을 뿐일 텐데.

그 사이에 사랑은 없었으니, 프리스틴도 아마 그럴 것이다. 벨리아르 공작과 유치한 사랑놀이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의 외모, 권력, 그가 가진 외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 영애가 거슬리는구나.”

“……그런 건 아니에요.”

프리스틴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레오니스 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짜증이 치솟으니 오라버니에게 투정이 나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저 한미한 가문의 영애일 뿐인데. 게다가 그냥 상황이 어려워지니 벨리아르 공작이 후견해 주는 것일 뿐이라고요.”

레오니스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뿐이지.”

가벼운 대꾸에 프리스틴은 더욱 씩씩거렸다. 쌓아 놓은 이미지가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 놓을 수도 없고, 그저 답답한 노릇이었다.

“프리스틴, 이번 사냥대회가 열리면 너도 참여해 보는 건 어때?”

벌써 건국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주 정도 진행되는 건국제 동안 황태자가 주도하여 몇몇 귀족들이 참여하는 사냥대회는 오랜 전통이었다.

그러나 프리스틴은 한 번 구경을 갔을 뿐, 참여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보통 귀족 영애들과 뱃놀이를 즐기는 편이었다.

“농담이시죠, 오라버니? 제가 어떻게 그런 걸…….”

“오라버니가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주마.”

“……저는 짐승을 사냥하는 일엔 관심이 없어요.”

“굳이 짐승을 사냥할 필요는 없지.”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프리스틴은 순간 입을 꾹 다문 채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차근차근 짚어 보았다.

“이번 사냥대회는 이틀간 진행할까 해. 숲에서 야영도 하면서.”

보통은 길어 봤자 한나절,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그러니 레오니스가 꺼낸 말은 꽤 파격적인 것이었다.

고상하고 깔끔한 것에 목숨 거는 귀족들이 과연 숲에서 하룻밤을 지내려고 할까.

“귀족들이 동의할까요?”

“네가 벨리아르 공작을 설득해 봐. 공작만 동의하고 참여한다면 싫다고 할 귀족은 없겠지.”

레오니스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자고 해봤자 귀족들은 난색을 보이겠지만, 벨리아르 공작이 동의하면 누구도 싫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제게 돌아오는 이득은요?”

레오니스가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시녀에게 눈짓했다. 곧 시녀가 조그맣고 고급스러운 상자를 고이 받쳐 들고 나타났다.

“이게 뭐예요?”

“열어 보면 알아.”

레오니스는 제법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그럴수록 프리스틴은 새초롬한 마음을 굳혔다. 그래 봤자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것이겠지.

그러나 상자를 열어 보았을 때, 프리스틴은 감탄하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거 어떻게 구했어요, 오라버니?”

오색 빛이 감도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그 빛깔이 참으로 다채롭고 신비로워서 악마의 보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세공하는 사람에 따라 보석의 빛깔이 달라지기도 했다. 레오니스가 그녀의 앞에 내민 것은 언뜻 보기에도 귀해 보였다. 아무리 금화를 많이 준다고 한들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보고 있던 프리스틴이 목걸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상자를 탁 닫아 버리는 레오니스의 손이 더 빨랐다.

“공작의 승낙을 받아 오시지요, 황녀님.”

“……칫, 알았어요.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이상하게 자신감이 생겼다. 벨리아르 공작이 자신을 찾지 않는다면, 먼저 찾아가면 될 일이다. 귀한 목걸이를 보고 나니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프리스틴, 사냥대회는 너한테도 기회인 거 알지?”

대략 이유가 짐작 가긴 했지만, 프리스틴은 모르는 척 말간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요?”

“공작이 참여하면 그 아이도 데려오겠지. 이틀간 진행될 테니 사이사이에 시간도 많을 테고. 사냥을 해야 하니 무기도 많고, 어디서 화살이 날아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오라버니의 말이 제법 달콤하게 들렸다. 평생 관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무기에 조금 흥미가 생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일단, 활 쏘는 연습을 하러 가 볼까?”

프리스틴은 기꺼이 레오니스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 * *

벨라는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마주했다. 축 처진 입꼬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빙긋 웃어 보았다. 마음이 기쁘지 않아 그런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빗기만 해 주세요.”

“아가씨!”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소렐 부인의 질책 어린 목소리에 아차 싶었다.

“……아. 음, 그냥 빗기만 해 줘.”

“아주 좋아요. 잘하셨어요.”

며칠 전부터 벨라는 사용인들에게 하대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사용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에릭에게 잘못 걸린 것이 화근이었다.

“아가씨, 사용인들에겐 하대를 하셔야죠. 그러면 사용인들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도 제가 어떻게…….”

“아니요, 그건 아가씨 뜻과 상관없습니다. 앞으로는 무조건 하대하도록 하세요. 제게는 편하신 대로 하셔도 상관없지만, 사용인들에겐 절대 안 됩니다.”

“……네, 노력해 볼게요.”

“다음에 또 사용인들에게 존대하는 모습을 보이시면, 그땐 이렇게 좋은 말로 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벨라를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잘 몰랐었는데, 에릭이 어느 사용인을 붙잡고 혼내는 걸 본 뒤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입안에 칼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뱉는 말들이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 뒤로도 거의 한 시간 동안 붙잡혀 여러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마침 식사 시간이 다가와 소렐 부인이 구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언제까지 이어졌을지 생각만으로 아득했다. 벨라는 괜스레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오늘은 치치랑 점심 식사를 같이해도 될까?”

“그럼요. 이따가 치치를 방으로 데려올게요. 그런데 아가씨, 오늘은 나가지 않으세요?”

요즘 소렐 부인의 소소한 취미는 벨라를 꾸며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벨라도 기뻐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았었는데, 요 며칠간 날이 갈수록 표정이 안 좋아졌다.

“……아무래도 공작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

그날 이후로 그는 벨라를 찾지 않았다. 어제는 결국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집무실로 찾아갔었는데, 일 때문에 며칠간 외출했다는 소식만 안고 돌아왔다.

“아니에요, 제게는 아가씨 잘 보필하라고 당부하고 가셨는걸요.”

이럴 땐 자신이 그에게 다른 사람과 별다른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것이 서운했다.

자신을 이리 방치해 놓는 것이 그가 주는 벌 같았다. 매일 곁에 두는 것이 그녀에겐 안락한 속박이었음을 눈치챈 걸까.

조금은 특별해지고 싶었다. 욕심을 내자면, 에릭보다 더…….

끝내, 철저히 선을 긋는 다정한 가면을 벗겨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면 안에 어떤 모습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온전히 그의 모습으로 자신을 대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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