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는 대놓고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순간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레오니스의 표정이 약간의 당황으로 물들었다.
“듣던 대로 눈 색이 특이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혹시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벨라가 아닌 벨리아르에게 향한 사과였다. 벨라는 그저 이런 불편한 상황이 얼른 지나가길 빌었다. 굳이 황태자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으나, 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귀족 영애를 그렇게 빤히 보면 누가 봐도 무례이고 결례지. 황태자 신분으로 그러시니, 안 그래도 마음 여린 우리 아가씨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
차마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지, 레오니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벨리아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레오니스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점점 분위기가 위험해지자 황제가 헛기침을 하며 제 아들을 재촉했다.
세상에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레오니스는 벨라를 향해 제대로 사과를 전했다.
“……미안합니다, 영애. 나쁜 뜻은 없었어요.”
레오니스가 빠르게 말을 내뱉고선 바로 시선을 거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벨라가 무언가 답을 주기도 전에 레오니스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차는 드셔 보셨습니까?”
벨리아르는 선뜻 차의 향을 한 번 맡은 후 가볍게 한 모금을 머금었다. 차를 음미하던 그는 담백한 감상을 내놓았다.
“나쁘지 않네.”
세상의 모든 것을 제 발아래에 두는 오만한 태도였다. 황족일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레오니스는 그럴수록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표정은 웃음으로 포장하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이번엔 그에게 케이크를 권했다.
“이 케이크는 제가 요리사의 디저트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레몬과 어우러지는 맛이 상당히 훌륭합니다.”
그는 먹는 것에 딱히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케이크에 손을 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벨리아르는 포크를 들어 케이크로 손을 뻗었다.
그가 케이크를 한 입 먹으니 상큼한 레몬 향이 번졌다. 안 그래도 살짝 허기가 지는데 새콤달콤한 냄새가 더욱 입맛을 자극하는 듯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는 벨라에게 먹어 보라고 권유하지 않았다. 조금, 아주 조금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정원에서 빠져나오자 피곤이 몰려왔다.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벨라, 배고팠어?”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그가 물었다.
“……조금요. 아주 조금.”
“레몬 좋아해?”
“오늘은 맛있어 보였어요.”
“못 먹게 해서 서운했겠네.”
다정한 말투로 맞장구를 쳐주니 억누르고 있던 속상한 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점심으로 케이크 먹어도 돼요?”
“레몬 케이크?”
“……네.”
마치, 레몬 케이크를 못 먹게 해서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 마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라, 유치한 태도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냥 해 본 소리였다고 하려던 찰나, 그의 말이 더 빨랐다.
“그렇게 해.”
그렇게 차의 기억이 잊혀 갈 무렵, 황태자가 저택으로 선물을 보내 왔다. 그때 그 차였다.
* * *
한동안 저택 어딜 가든 은은한 레몬 향이 맴돌 정도로 레몬을 이용한 요리가 많이 나왔다. 특히 티 테이블에 디저트로 많이 올랐다.
“왜 안 먹어. 레몬 좋아한다며.”
그가 차를 따르며 테이블 중간에 놓인 레몬 타르트를 눈짓했다. 황태자가 보내준 차인지 또 독특한 향이 났다. 물론, 오늘도 그녀의 앞엔 찻잔이 없었다.
“네, 좋아하긴 하는데…….”
“차 마셔 볼래?”
“네, 주세요.”
차 맛이 궁금하긴 해서 냉큼 답했더니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지만, 그녀로서는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요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그냥 문득, 그가 제게 차를 주고 싶지 않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저도 그거 마시고 싶어요.”
“안 돼. 잘못 먹으면 독이 되니까 나중에 커서 마시렴.”
수면 깊이 파묻혀 있던 기억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지금 그의 모습이 어쩐지 흐릿한 어머니의 기억과 닮아 있었다.
“……공작님께요.”
한 번 떠오른 기억의 파편을 집어 드니 잊고 있던 자잘한 조각들이 자석처럼 엉겨 붙었다.
“왜 독이 되는데요? 어머니는 마시잖아요. 저도 먹어볼래요.”
“아까 오렌지 먹지 않았니?”
“맞아요.”
“이건 신 과일과 먹으면 안 되는 차야. 처음은 괜찮지만 계속 쌓이면 아주 아플 거란다. 그래도 먹어 보겠니?”
“……아니요. 안 먹을래요.”
어렸을 때 신 과일을 무서워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맞아, 그 차 때문이었는데.
독이 된다고 하니 차를 마시지 않아도 막연히 신 과일이 무섭고 껄끄러웠다.
디어린 잎으로 만든 차. 그게 왜 이제야 떠올랐을까.
차의 향이 독특해서 은근 중독성이 있긴 하지만, 과일뿐만 아니라 산미가 있는 음식은 많기에 남부 사람들도 즐겨 먹지는 않는 차였다.
그러고 보니, 음식을 잘 입에 대지 않던 그가 요즘 들어 그 차를 마시며 디저트를 꼭 챙겨 먹었었다. 그것도 레몬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순간 벨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혹시 그의 몸 안에서 이미 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초조해졌다.
“……공작님.”
“왜?”
“그 차가 입에 맞으세요?”
“향이 조금 독특하긴 한데, 나쁘지 않아.”
자칫 잘못하면 황태자에 대한 불순한 언사로 들릴 수 있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고 민감한 주제라는 것을 벨라도 모르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을까.”
그가 또다시 찻잔을 입에 대는 순간, 고민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 차…… 안 드시면 안 돼요?”
“이유는.”
“……그 향이 너무 세서요. 속이 좀 안 좋아요. 그러니까…… 안 드셨으면 좋겠어요.”
미쳤나 봐. 어떻게 그런 소릴 대놓고…….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입이 멋대로 움직인 후였다. 손바닥으로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벨라는 치맛자락을 꾸욱 틀어쥐며 초조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가 계속 디어린 차와 레몬을 먹으며 독에 중독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벨리아르가 미간을 좁히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이유라면, 내가 이 차를 마시지 않는 게 옳을까, 네가 나가는 게 옳을까.”
공작님께서 차를 마시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의 눈빛에 억눌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조금 돌려서 말했다.
“제가 나가는 건…… 안 돼요.”
그럼 그가 무엇을 먹는지 지켜볼 수 없었다.
“오늘따라 짜증 나게 구네.”
내용은 위태로웠지만 말투는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래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그가 타르트로 손을 뻗었을 때, 벨라는 얼른 그 타르트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일순, 황당함을 가득 담은 시선이 내려앉았다.
아직 남은 타르트는 많았다. 혹시나 그가 또 타르트를 먹으려 할까 봐 벨라는 열심히 타르트를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에 집중했다.
“……뭐 하는 짓거리야?”
그는 기가 차는 듯 실소를 흘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벨라는 레몬 타르트로 가득 차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양 볼을 어떻게 하지 못한 채 그를 마주 봤다. 생각보다 수분기가 적어서 목구멍으로 바로바로 넘길 수가 없었다.
“버릇이 좀 많이 없었는데, 어떻게 생각해?”
대답을 해야 하니 얼른 턱을 움직여 바삐 씹어 삼켰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 드러난 짜증이 더욱 짙어졌다.
“……죄송해요.”
“이럴 땐 죄송하다는 말로 끝내는 게 아니지.”
벨라가 입을 꾹 다무니 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새콤달콤한 레몬 타르트의 맛과 향이 이질적이었다.
“왜 그랬는지 설명 안 해? 계속 그렇게 입 다물고 있을래.”
그와 대화하는 순간엔 늘 벽에 몰린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높고 거대한 벽 사이에 갇혀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은 느낌. 벨라는 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향이…… 이상했어요.”
“무슨 향.”
“예전에 제가 살던 남부에 디어린이라는 풀이 있어요. 향이 특이해서 말려서 차로 마시기도 하는데, 산미가 있는 것과 함께 먹으면 독으로 작용해요.”
그는 딱히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래서, 내가 독에 쓰러질까 봐 타르트를 다 집어 먹었어?”
“……네.”
제 앞을 막은 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러다간 새카만 어둠이 저를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아서, 벨라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몸을 웅크렸다.
“……벨라.”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공작님께서 위험해지실까 봐 그랬어요.
그는 변명하는 것을 싫어하니 그 말은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손가락 사이로 얽힌 머리칼을 한 번 거세게 움켜쥐었다. 손이 사라진 후에도 아릿한 통증이 옅은 잔상으로 남았다.
“나가.”
나직이 울리는 그의 목소리 역시.
벨라가 잔뜩 풀 죽은 채 방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에릭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마 분위기가 매우 형형하리라 생각했는데, 주인의 모습이 상당히 의외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핏 입가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주인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벨라가 버릇이 없어진 것 같아서 어떻게 잡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전혀 기분 좋을 일이 아닌데, 제 주인은 왜 그리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지 에릭의 상식선에선 이해가 어려웠다.
고심하며 서 있는 에릭을 향해 벨리아르가 찻잔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 차, 지속적으로 산미랑 만나면 독이 쌓인다며. 쓰러져서 크게 앓거나, 오래 중독되면 죽는다며.”
“예, 제가 그렇게 보고드렸습니다.”
“근데 왜 반응이 없지. 이 맛대가리 없는 차를 꾸역꾸역 다 마셨는데.”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닐 테고.
“……주인님.”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차를 살펴보는 벨리아르의 모습에 에릭은 황당한 숨을 삼켜야 했다.
“차의 독 성분을 확인하고 싶으셨으면 제게 먹이지 그러셨습니까. 주인님께선…….”
독이 통하지 않으시잖습니까.
에릭은 자신이 대체 왜 이런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벨라에게 먹여 보려고 했는데.”
그건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요즘 그는 벨라와 있을 때 항상 차와 레몬으로 만든 디저트를 준비시켰다.
“그러다 죽어 버리면 어떡하나 해서.”
이건 반만 이해가 갔다. 그가 벨라를 특히 아끼는 건 확연한 사실이니 죽을까 봐 조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제 주인이 인간의 죽음에 대해 고심하는 게 조금 낯설 뿐이었다.
“인간이 그리 쉽게 죽진 않습니다.”
“아프면 또 울 거 아니야.”
이건……. 이때쯤 돼서 에릭은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예.”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