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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65)화 (65/180)

65화

“방 안에만 있기 따분해서요. 오늘 날이 엄청 좋네요.”

벨라는 말갛게 웃으며 선수를 쳤다. 혹시 에릭이 이렇게 빨래를 도와주고 있다고 나무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잠시 후 마땅한 걱정이 뒤따랐다. 에릭이 돌아왔다면, 그도 들어오지 않았을까.

“……아, 혹시 공작님도 들어오셨나요?”

“예, 저랑 같이 들어오셨습니다.”

벨라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밖으로 돌아다녀도 된다고 허락해 주긴 했지만, 그가 화를 낼까 봐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버릇이었다.

“방으로…… 돌아갈까요?”

에릭은 ‘예, 그렇게 하세요.’라고 답할까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뒤이어 떠오른 건 사용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쁘게 웃던 모습이었다. 평소보다 화사하게 꾸민 모습을 보니 방 밖으로 나오는 게 제법 기뻤던 모양이다.

“……아니요, 그냥 계셔도 됩니다. 주인님께서 허락하셨으니까요.”

“고마워요, 에릭 경.”

그는 충분히 말 한마디로 저를 방에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벨라는 에릭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에릭의 시선이 다정히 맞잡은 치치와 벨라의 손으로 향했다. 이번엔 딱히 고민 없이 움직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벨라의 앞을 막아섰다.

큰 덩치로 앞을 가리니 벨라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치치의 손을 놓았다.

“옷이 다 젖습니다. 여기서 노는 건 좋지만, 조금 떨어져 계세요. 의자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전 괜찮은…….”

“치치가 안 괜찮습니다.”

에릭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에릭의 뒤를 살폈다. 어디서든 그가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자는 없어도 돼요.”

그러나 이미 그의 말을 들은 누군가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하고 있는데 자신만 의자에 편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설령 일을 돕지 않더라도 그냥 서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벨라의 마음을 알아챈 시에나가 상냥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가씨, 앉아 계세요. 그렇게 서 계시면 저희 마음도 불편해요. 아가씨가 저기 앉아만 계셔도 저희는 기쁘답니다.”

결국 의자에 앉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나고 말았다. 벨라는 홀로 저택 안을 조금 거닐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화병에 꽂아 놓을 꽃을 들고 온 소렐 부인은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그럴 기분은 아니었으나 벨라는 열심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다리가 아파서요. 조금 자야겠어요. 혹시 공작님께서 찾으시면 깨워 주세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한 마음을 덮으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오늘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분명 그것을 알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조금 미웠다.

* * *

“개새끼가 지키고 있는 걸 보니…… 벨리아르 공작이 왔다는 게 사실인가 보군.”

레오니스는 황제의 정원 입구에 서 있는 에릭을 발견하고선 비아냥거리며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에릭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이제 저런 도발쯤은 간지럽지도 않았다.

“요새 어떤가?”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하찮은 개새끼한테 말을 붙이시는 겁니까? 황송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습니다.”

“왜 그리 날을 세워. 아버지를 앞에 두고도 이리 문 앞만 지키고 있는 개새끼가 안쓰러워서 그러는데.”

에릭은 고개를 숙이는 척하며 흘러나오는 조소를 감췄다. 영민하다고 소문난 황태자 전하께서는 자신의 약점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들어가 보십시오.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아버지께선 공작 각하의 앞에서 빌빌 기고 계시니까요.”

그에 반해 에릭은 레오니스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다. 레오니스는 부들거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저 덤덤한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아니면 지하에 잡아 처넣고 피떡이 될 때까지 고문하거나. 아마 언젠가는 그리될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주인만 믿고 설치다가는 오래 못 살아.”

“예, 어차피 오래 살 생각이 없습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다간 치솟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을 게 뻔했다. 레오니스는 이를 빠득 갈며 에릭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벨리아르 공작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알현식 얘기를 꺼냈을 때는 그렇게 화를 내더니, 지금 상황은 대체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하녀들이 들이닥쳐 온몸을 단장시키더니 공작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곳은, 황제 앞이었다.

“남작 부인이 영애를 참 아끼나 봅니다.”

오늘이 알현식 날이라는 것을 벨라는 듣지 못했을 테니 황제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챌 수 없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미소 지을 뿐이었다.

원래 벨라 나이의 귀족 영애라면, 지금 이리 황제의 앞에 있을 것이 아니라 황후를 만나는 알현식에 참석했어야 했다. 물론,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해 적당한 신랑감을 찾는 일반적인 귀족에 한한 이야기였다.

그 뜻을 알아챈 벨리아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제게 보냈으니 마음이 급할 필요는 없죠. 아직 어리니까요.”

가세가 기울었다고 해서 급하게 팔아넘기듯 혼인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벨라도 어엿한 성인이니 이제 마냥 어리다고 볼 순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또래보다 조금 앳돼 보이긴 해서 황제는 따로 말을 더하지 않았다.

곧이어 테이블 위로 따뜻한 차가 올랐다. 차의 향이 퍼지자마자 벨라는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어디선가 맡아 본, 분명 익숙한 향이었다.

“황태자가 남부에서 공수해 온 차입니다. 공께서도 차를 즐겨 드시니 수도에 오시면 꼭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벨리아르는 여상하게 대꾸하며 찻잔을 톡톡 건드렸다. 그의 관심은 딱히 차에 있지 않은 듯했다.

“요즘 대주교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몸을 사리는 거겠지요.”

황제가 벨리아르 공작에게 존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시선을 의식해 말을 조금 낮추었지만, 이리 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높이는 것이 황제로서도 편한 듯했다.

“음.”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손끝으로 찻잔을 덧그렸다. 벨라는 그 손길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의 기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너무 집중하느라 그가 한 번씩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꼬리를 휘며 찻잔의 능선을 톡톡 건드렸다. 덩달아 벨라의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혹시…… 갈아엎을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 정도까진 아니고. 적당히 때를 봐서 손발 정도는 잘라 놓을 생각입니다. 자꾸 기어오르는 것 같아서.”

어차피 들어도 모를 내용이니 벨라는 대화에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독특한 향도 계속 맡다 보니 익숙해져서 나중엔 향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애써 기억을 파헤쳐 봤지만 어째 갈수록 머릿속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 결국 벨라는 작게 한숨을 내쉰 채 디저트 포크를 쥐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앞에 놓인 레몬 케이크를 한 입 먹어 보려는데 테이블 밑으로 다가온 손이 팔을 붙잡았다.

“상황은 저희 쪽에서 알아보고 전달해 드릴 테니 폐하께서는 제가 지시할 때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그는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가며 벨라에게 시선을 한 번 주었다.

포크 내려놔.

그의 눈빛에 담긴 뜻이었다. 이젠 눈짓만 해도 그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아차릴 지경에 이르렀다. 벨라는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벨라는 순간 케이크를 준비해 준 황제 앞에서 너무 무례했나 싶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제국의 태양인 황제를 대하는 자리인데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갑자기 기사들이 들이닥치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황제는 도리어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공의 뜻대로 하시지요. 그런데 혹시…… 케이크가 입에 안 맞으십니까? 다른 다과를 내어오라고 하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영애가 아침을 먹고서 살짝 체기가 있어서요.”

제가요?

아침부터 워낙 바빠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오히려 허기가 지던 참이었다. 살며시 그를 바라보자 벨리아르는 빙긋 웃어 주었다.

“이런, 그렇군요. 그럼 차라도 드세요, 영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는 한낱 귀족 영애에게까지 말을 높여 주었다. 단순히 귀족 영애라면 절대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공작이 옆에 끼고 아끼는 모습을 보인 탓이었다.

케이크를 못 먹게 했으니, 벨라는 눈치껏 차에도 입을 대지 않았다.

그는 황제와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 그녀의 허벅지 위를 가볍게 다독였다. 얌전히 잘 있다고 칭찬해 주는 듯해서 벨라는 다시 허리에 힘을 주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다 자리가 조금 지겨워질 무렵, 번뜩 정신을 들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황제에 이어 황태자라니. 차마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 또 한 명 나타났다. 레오니스는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다가왔다.

“벨리아르 공께서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왔습니다. 혹 두 분께서 대화 나누시는 데 방해가 된 건 아닌지요?”

“괜찮습니다. 벨라,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려야지.”

벨라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처음 황제를 만났을 때처럼, 긴장감에 얼어붙은 입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베일리 남작가의 벨라 베일리입니다.”

레오니스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여유로운 미소를 곁들였다. 친절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리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황제보다는 프리스틴 황녀와 닮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꺼림칙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가 운이 좋은가 봅니다. 공께서 꼭꼭 숨겨 두신 보물도 보게 되고. 반갑습니다, 영애.”

보물이라고 칭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별로 칭찬 같지 않은 말이었다.

“제가 대화에 참여해도 괜찮겠습니까?”

벨리아르가 황제에게 허락의 의미로 눈짓했다.

“앉거라.”

레오니스의 얼굴로 탐탁지 않은 기색이 서렸다가 곧장 사라졌다. 오직 벨리아르만이 그것을 눈치채곤 조용히 비웃을 뿐이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벨리아르 공께서 오랜만에 수도에 오셨으니 근황을 여쭤보고 있었다.”

“아, 그렇습니까?”

레오니스는 버릇처럼 대꾸하며 눈으로는 벨라를 훑었다. 탐색하듯 노골적인 시선에 벨라의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아르가 입매를 비틀며 나직이 읊조렸다.

“우리 아가씨 뚫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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