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벨라.”
“네?”
“결혼하고 싶어?”
“……네?”
벨라는 그가 왜 갑자기 결혼을 묻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라 당황스러웠다.
“정말 귀족 영애가 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결혼이 하고 싶은 거야. 솔직하게 말해.”
“저는……. 둘 다 아니…….”
“아, 둘 다야?”
그가 말을 자르며 실소를 흘렸다. 벨라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벨라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줄은 몰랐네. 귀족 영애의 자리도 탐나고, 근사한 남편도 갖고 싶고. 그렇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아니라고 말하려 했으나 턱을 쥐는 그의 손이 더 빨랐다.
벌어진 입술 새로 그의 손가락이 멋대로 침입했다. 이리저리 도망치려는 혀를 지그시 누르니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니라고 해야지.”
억울함에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혀가 눌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흔들어 보려고 했지만 턱을 꽉 쥐고 있어서 그것도 불가능이었다.
혀가 꾹 눌리니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고 있으니 그가 다른 손으로 코를 톡 건드렸다. 그제야 코로 숨 쉬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벨라는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하니까, 정말 성가시네.”
이번엔 대체 뭘 잘못했을까. 억울한 마음에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벨라,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대답을 할 수도 없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으니, 벨라는 열심히 그의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의지를 밝혔다.
“넌 알현식에 참가할 일 없어. 그딴 생각 하지 마. 그저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돼.”
진짜 귀족도 아닌 주제에 감히 황후 폐하를 뵙는 자리에 참석하는 거냐고 물어서 화가 나신 거구나.
당연한 사실인데 괜히 물어봤다. 괜히 물어서 제 처지의 비참함을 다시 상기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벨리아르는 침울하게 잠기는 보랏빛 눈동자를 옭아매듯 응시했다.
“그런 눈빛으로 보니까.”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거지.
실컷 괴롭혀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정신없이 매달릴 때까지 몰아붙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휩쓸린 손가락이 말캉한 혀의 깊은 곳을 꾹 눌러 자극했다.
“흐으…….”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동그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치솟던 짜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그는 기꺼이 손을 거두어 주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내 뒤에 잘 붙어 다닐지나 고민해.”
그의 손이 사라져도 한동안은 얼얼하게 자취가 남았다. 고였던 침을 삼키며 그 아픔을 곱씹고 있는 사이, 그가 손수건에 손을 닦으며 나직이 질책했다.
“대답해야지.”
“……네.”
얌전히 그의 말에 따라야지.
최종적으로 벨라의 뇌리에 콕 박힌 다짐이었다.
* * *
어느 날 에릭 경이 찾아와 의외의 말을 전해 주었다.
“저택 내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정말요?”
“싫으세요?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게 좋으시다면 주인님께 그렇게 전하겠…….”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 밖에 나가는 거 아주 좋아해요. 여기 와서는 에릭 경과 산책도 못 했잖아요.”
“한동안 바빠서 같이 산책은 못 합니다. 당분간은 저택 지리도 읽힐 겸 혼자 다녀 보세요.”
“네, 공작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바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둘은 정말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가 집무실에 있을 땐 그녀를 꼭 불렀는데, 요새는 외출하는 일이 잦은 듯했다.
다음 날, 벨라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소렐 부인에게 견고한 다짐을 전했다.
“저 오늘은 방에서 나갈 거예요.”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머리를 땋아 드릴까요?”
“네, 부인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해 주세요.”
“그럼 실력 발휘를 좀 해 보죠. 오늘 제 목표는 저택의 사용인들이 모두 아가씨께 홀딱 반하는 거랍니다.”
소렐 부인은 의욕 넘치게 빗을 들었고, 자신만만했던 말처럼 결과물은 훌륭했다.
벨라는 거울을 보며 해사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반묶음으로 땋아 내린 머리 모양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볕이 좋으니 화사한 옷이 어울리겠어요.”
소렐 부인은 밝은 노란색 옷을 골라 주었다. 이렇게 작정하고 꾸미니 마치 나들이라도 가는 느낌이었다.
“훌륭해요, 아가씨.”
“감사해요, 소렐 부인.”
“그런데 아가씨,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꾸미셨어요? 무슨 날이에요?”
“그냥 날이 좋아서요.”
“해가 질투하겠어요! 미인이 나오면 구름이 몰려든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그런 칭찬이 너무 낯설고 어색해서 벨라는 멋쩍은 웃음을 달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기분은 엄청 좋은데, 아무래도 제 것이 아닌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함께 휘몰아쳤다.
목적지 없이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딘가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치치, 팍팍 밟아야지! 그렇게 설렁설렁해서 깨끗이 빨리겠어?”
“……이렇게요?”
“그래, 옳지! 아유, 잘하네.”
소리를 따라가니 너른 정원에 사용인들이 모여 이불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커다란 대야에 들어가 열심히 빨래를 밟고 있는 치치의 모습이었다. 벨라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곳으로 다가갔다.
“어머,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사용인들은 반가운 웃음으로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그중엔 저번에 봤던 시에나도 있었다.
“아가씨, 그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다니시면 어떡해요……. 공작님은 뵈셨어요? 일찍 외출하시긴 했는데.”
“아니요, 못 뵀어요.”
“아쉬워라……. 이 모습을 보셨으면 분명 웃으셨을 텐데!”
그래도 시에나는 종종 봤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벨라는 사용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치치의 앞으로 다가갔다.
“치치, 나야.”
치치는 벨라의 목소리를 듣고선 곧바로 방향을 알아챘다. 다급히 맨발로 대야에서 빠져나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뭐 하고 있었어?”
“아데인 님께서 여기저기 도울 일 있으면 도우라고 하셔서……. 이불 빨래하고 있었어요.”
“나도 같이하자. 도와줄게.”
“안 돼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빨래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옛날에 해 본 적 있어요.”
“잘하시든 못하시든 안 돼요. 그러다 혹시 공작님 눈에 띄면 큰일 나요.”
맞는 말이었다. 그가 밖으로 나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왠지 치마를 걷어붙이고 빨래를 하고 있으면 그가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래도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치치가 다시 대야에 들어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그럼 제 손 좀 잡아 주시겠어요? 팍팍 밟으려니까 중심 잡기가 조금 힘들어서요.”
“아, 그럴까?”
벨라는 반색하며 얼른 치치의 손을 붙잡았다. 고된 일을 많이 했는지 생각보다 손이 거칠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에나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럼 아가씨 옷에 물 안 튀게 조심히 해야 해!”
안 그래도 치치와 시간을 보내고 싶던 차였는데 잘됐다. 치치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벨라 역시 손을 꼬옥 잡아 주며 같이 미소 지었다. 부디 이 미소가 치치에게 온전히 닿길 바라며.
“치치, 밥은 먹었어?”
“네, 빵이랑 햄이랑 주스 먹었어요. 아가씨는요?”
“나도. 올리버 씨가 빵을 정말 맛있게 구우시는 것 같아.”
성에서 먹었던 빵도 맛있었지만 저택의 빵이 더 입맛이 맞는 건 사실이었다. 덕분에 아침 점심으로 먹는 양이 더 늘었다.
“아가씨, 안 힘드세요?”
“내가 힘든 게 뭐 있어. 열심히 빨래하는 치치가 힘들지.”
“아가씨랑 같이하니까 전혀 안 힘들고 재밌어요.”
“다행이다.”
치치와 함께 있으면 절로 이안 생각이 났다.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저번에 보낸 편지는 이안에게 잘 도착했을까.
제 주소를 적지 않았으니 답장이 올 리가 없는데도 저도 모르게 답장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치치는 좋겠다, 아가씨가 손도 잡아 주시고.”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하녀 한 명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치치는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네, 좋아요.”
“어머, 치치! 너 귀 빨개졌어.”
“아…….”
정말 치치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벨라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치치가 부러워지네. 이렇게 상냥한 아가씨를 곁에서 모시니 말이야.”
별로 잘해 준 것도 없는데.
과분한 말에 이번엔 벨라의 얼굴이 옅게 붉어졌다. 치치는 이번에도 고민 없이 답했다.
“네, 그것도 정말 좋아요.”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구나.”
하녀가 놀리듯 말했지만 치치는 제법 당당한 얼굴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사용인들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베른은 어때요? 여기보다 훨씬 추울 텐데.”
베른에서 한바탕 마녀 소동이 일었다는 소식은 저 남쪽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나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것이 섬세한 배려인지, 아니면 철저한 입단속의 결과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벨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모조리 지워 냈다. 햇살 좋은 날에 사람들과 일상 얘기를 나누며 웃는 행복을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그때, 사용인들의 말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곧이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돌아본 곳엔 에릭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에릭 경.”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