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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63)화 (63/180)

63화

황후 셀리나는 오랜만에 막내딸과 티타임을 가졌다. 프리스틴이 베른에 휴양을 다녀온 뒤로 유독 기운이 없어 보여 걱정이던 참이었다.

“프리스틴, 너도 이젠 신랑감을 찾아야 하지 않겠니?”

곧 사교 시즌이 다가오니 프리스틴도 좋은 인연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프리스틴의 표정이 더욱 가라앉았다.

“……어머니, 저는 아직 그럴 마음이 없어요.”

분명 베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자세히 말을 하지 않으니 그저 답답할 노릇이었다.

세간에 도는 얘기로는 벨리아르 공작이 먼 친척을 데려와 후견하는데, 그 영애의 눈이 보라색이라고. 그래서 마녀로 몰려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셀리나는 불안한 느낌에 찻잔을 꾹 쥐었다.

“……너 설마 아직도 벨리아르 공작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니?”

프리스틴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셀리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벨리아르 공작이라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세상에, 아가……. 난 당최 네가 왜 벨리아르 공작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럼 제국에 벨리아르 공보다 나은 신랑감이 있긴 한가요? 저는 일개 귀족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다른 나라 왕자와 결혼하겠다고 하지 그러니. 그게 어미 마음이 더 편하겠구나.”

“제가 머나먼 나라로 시집가는 게 더 낫다는 말씀이세요? 대체 왜 그렇게 공작을 반대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도 그렇고……. 너무 서운해요.”

마음 같아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말을 뭐든 다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벨리아르 공작과 혼인하겠다는 말만큼은 절대 들어줄 수가 없었다. 설령 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셀리나는 처음 황후의 자리에 올라 벨리아르 공작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선득한 공포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처음 만났던 그날과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는 그를 볼 때면 본능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제국의 태양인 황제마저 그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절대 황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괴물, 악마.

셀리나는 늘 마음속으로 공작을 그리 정의하고 짓이겼다. 아무리 저주하고 기도해도 그는 절대 바스러질 것 같지 않았다.

“……프리스틴, 넌 어릴 때부터 공작을 봐 왔잖니.”

“네, 당연히 그렇죠.”

그는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어쩌면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보다 더 위험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프리스틴에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통하지도 않을 것 같고.

“벨리아르 공작은…… 일반 사람들과 달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겪어 보지 않았잖아요, 어머니. 저는…… 벨리아르 공이 아니면 그 누구와도 혼인하고 싶지 않아요.”

프리스틴이 자리를 뜨고, 셀리나는 차갑게 식은 찻잔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프리스틴이 떼를 쓰고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셀리나의 마음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벨리아르 공작, 이름 없는 그는 악마였다.

프리스틴은 씩씩대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대체 벨리아르 공작은 왜 안 된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반 사람과 달라서 안 된다니.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와 혼인하려는 것인데.

어머니와 이런 문제로 대화를 나눌 때면 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에 갇힌 느낌이었다.

“……델리아, 신전에 가야겠어.”

“네, 준비할게요.”

프리스틴은 베른에서 돌아온 뒤로 종종 신전을 찾았다. 뭐든 할 수 있는 것을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드리다 보면 언젠가 신께서 제 바람을 들어주시지 않을까. 신께선 제게 늘 자비로우시니까.

프리스틴은 오늘도 예배당 안의 모든 사람을 물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지시했다.

지난밤 벨리아르 공작이 수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니 며칠 내로 자신을 찾기를.

“안녕하십니까, 황녀 전하.”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프리스틴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자신의 기도를 방해했다는 것에 화가 날 뿐이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보나 마나 미처 얘기를 전해 듣지 못한 어리어리한 수습 신관이겠지.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원래 이때쯤이면 제 실수를 깨닫고 허겁지겁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였다. 프리스틴은 그제야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남자는 불투명한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프리스틴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당신…… 누구야? 신관 맞아?”

“신관……. 뭐, 비슷하죠.”

“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당장 사람을――!”

“벨리아르.”

남자의 튀어나온 이름에 순간 말이 멎었다. 그를 생각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기에, 그 이름이 지금 끼어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뭐?”

“그에 대한 기도를 올리고 있던 거 아닌가요? 제가 잘못 짚었나요. 표정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을 것 같았다. 프리스틴의 눈매가 경계심을 품고 날카롭게 변했다.

“오지 마. 저리 가! 내게 허튼짓하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야.”

“닮긴 닮았네요. 아주 이상적이에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자가 바짝 다가오자 불투명한 천 너머로 생김새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윤곽만 보일 뿐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순 없었다.

잠시 탐색에 빠져 있던 프리스틴의 앞으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가 내밀어졌다. 제법 값비싸 보이는 종이에는 짧은 주소만이 달랑 적혀 있었다.

“그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 이곳으로 찾아오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정체도 밝히지 않는 당신의 뭘 믿고?”

“글쎄요. 믿고 안 믿고는 전하의 선택이시죠.”

남자는 프리스틴의 손에 친절히 종이를 쥐여 주었다. 그러고선 허리를 숙이더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었다. 남자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당신의 앞날에 대지의 축복이 깃들길.”

순간, 여신의 축복을 읊는 모습이 상당히 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굴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도 흩어지고 말았다.

쿵――!

갑자기 난 큰소리에 프리스틴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소리를 들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차 싶어 다시 돌아보았을 때, 남자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배실 안엔 짙은 고요가 맴돌았다.

프리스틴은 제 손에 들린 종이를 가만히 쳐다보다 와락 인상을 구겼다.

“……감히, 날 놀려?”

당장 종이를 찢어 버리려 했으나, 손이 멈칫거렸다. 종이를 세차게 노려보던 프리스틴은 결국 종이를 챙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 * *

해가 하늘의 중간쯤 기울었을 때, 벨리아르 공작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무실로 들어가 여지없이 벨라를 불러들였다.

“이리 와.”

소파에 앉았던 벨라는 그의 부름에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벨리아르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야지.”

언뜻 피곤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이럴 때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간 어찌 될지 모르니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두어 걸음 떨어져 선 벨라의 손목을 잡아당겨 코앞에 세워 놓았다.

서슴없이 배를 만지는 그의 손길에 놀란 벨라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다행히 그가 배를 만져 보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었어요. 아침에는 시에나가 호박파이를 가져다줘서…… 그거 먹었어요. 오렌지 주스랑 우유도 마시고…….”

“여기서는 잘 먹네. 음식이 입에 맞아?”

“네, 맛있어요.”

“성의 요리사를 바꿔야 하나.”

나직이 중얼거린 말에 벨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가 쓸모없어진 요리사를 죽일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뭇 떨리는 입술이 다급히 움직였다.

“아니, 아니에요. 성의 음식도 맛있어요. 정말이에요. 어제 피곤하고 힘들어서…… 그래서 오늘은 조금 많이 먹은 거예요.”

벨리아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벨라를 보며 실소를 삼켰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 알고나 있을까.

어설픈 변명이 가상해 기꺼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쭉 그렇게 잘 먹으면 얼마나 좋아. 살이 영 안 붙잖아.”

벨라는 문득, 그가 왜 이리 제 살을 찌우는 것에 집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동통하게 살이 오르면 잡아먹기라도 할 생각일까.

“앞으로는 잘 먹을게요.”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휘어졌다.

“네 입에서 그 소리 또 한 번만 더 나오면, 침실에서 훤히 보이는 정원에 요리사를 거꾸로 매달아 놓을 거야.”

순간 놀란 마음에 그의 시선을 빤히 마주 보았다. 서늘한 눈매를 믿어야 할지, 옅게 미소가 깃든 입매를 믿어야 할지.

“……농담하신 거죠?”

“농담으로 들렸어? 큰일이네.”

벨라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려다가, 그의 눈동자에 이채로운 빛이 서리는 것을 보곤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분위기를, 대화의 주제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마침, 아침에 소렐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공작님,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말해.”

“저도 알현식에 참여하나요?”

‘알현식’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벨라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조심 말을 덧붙였다.

“보통 귀족 영애들은 성인이 되면 알현식에 참여해서 황후 폐하께 인사를 올려야 한다고…… 그래서…….”

벨리아르는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길이 치솟는 걸 느꼈다. 입안 가득 험한 말이 맴돌았다.

그딴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

사용인들의 입단속을 다시 철저히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지껄이면 곤란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제 아가씨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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