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62)화 (62/180)

62화

“여기는 베른과 달리 보고 듣는 이가 많습니다. 혼자 방을 쓰라고 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요.”

“……공작님의 방에 있는 게 익숙해졌었나 봐요.”

“이 방은 쭉 아가씨가 쓰게 될 겁니다.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 인형이라든가……. 꾸밀 것들 있잖습니까.”

제 방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기쁨은 그의 황당한 뒷말에 파묻혀 버렸다. 인형이라니. 대체 에릭의 눈엔 자신이 어떻게 보이길래…….

“……에릭 경, 저 성인이에요.”

이래 봬도 평생을 험한 숲속에서 지냈다. 밤이 되면 흉포한 짐승도 나타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이 찾아온다는 것을 말해 줘야 하나 싶었다.

자신도 좀 멋쩍은지 에릭은 인형을 말하고서 은근히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황당함도 잠시, 벨라는 곧 에릭과 단둘이 있다는 것을 깨닫곤 그를 불러세웠다.

“아, 에릭 경.”

“예, 말씀하세요. 뭐가 필요하십니까?”

벨리아르 공작이 없을 때를 노리고 있었는데 바로 지금이 기회였다.

“에릭 경 손이요. 잠시 손 좀 내밀어 주시겠어요?”

에릭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녀의 앞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확실히 검을 많이 쥔 손이었다. 벨라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포웬에 나갔을 때 산 거예요. 선물이에요.”

에릭은 제 손 위에 올려진 매듭 장식을 낯설게 쳐다봤다. 벨라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 공작님께도 선물 드렸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다니진 못하고, 그냥 간직하고만 있겠습니다.”

“검에 달면 걸리적거릴까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에릭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나 말하기 곤란한지 자세한 답은 내어주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니 서운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래도 선물한 것이니 달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기에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네. 저는 괜찮아요. 괜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에릭은 등불에 불을 붙여 방안을 은은하게 밝혀 주고 나갔다. 나름의 고맙다는 표현인 듯했다.

* * *

온갖 꿈에 시달리느라 긴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잠을 잔 게 맞는지도 확연치 않았다. 짙푸르고 습한 새벽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채로 날이 밝아 왔기에 벨라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활짝 열린 커튼 새로 반짝이는 햇살이 한가득 쏟아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어깨가 흠칫 튀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돌아본 곳엔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노년의 여자가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당황스러움에 더듬거리며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복장을 보니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인 듯했다.

“저는 소피아 소렐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소렐 부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택에 머무시는 동안 제가 아가씨를 보필해 드릴 거예요.”

“……감사합니다, 소렐 부인.”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애꿎은 이불자락만 쥐었다 폈다 하고 있을 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소렐 부인을 돌아보니 빙긋 웃으며 방문 쪽을 눈짓했다. 벨라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제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시에나, 할 일은 다 하고 온 거니?”

“그럼요. 문을 여니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나지 않아요?”

“벌써 빵이 나왔어? 올리버 씨가 고생했겠구나.”

“공작님 오신다고 간만에 부지런을 떤 거죠. 아가씨, 호박파이 좋아하세요?”

열심히 무슨 상황인가 파악하고 있던 벨라는 시에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생각도 하지 않고 답했다.

“아, 네, 네.”

“그럼 제가 얼른 가져다드릴게요. 아, 토마토 주스가 좋으세요, 오렌지 주스가 좋으세요?”

그래도 이번엔 잠시 고민했다. 새콤달콤한 오렌지 주스가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오렌지 주스요.”

“네, 금방 올게요!”

시에나는 발랄한 목소리를 남기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소렐 부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문득, 어젯밤에 에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는 베른과 달리 보고 듣는 이가 많습니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베른의 사용인들처럼 눈동자가 탁하지도 않고 생기가 돌았다.

그래서 이런 생동감 넘치는 저택의 분위기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야 에릭이 했던 말이 조금 이해가 갔다.

“주방 일을 돕는 아이랍니다. 아가씨가 보고 싶었나 봐요. 이 저택에 마님이나 아가씨가 계셨던 적이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저렇게 사용인들이 관심을 보일 텐데, 불편하시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제게 관심이 많았다. 주로 나쁜 쪽이었지만. 경계와 불안이 담긴 관심에 익숙할 뿐, 시에나가 보여 주었던 순수하고 긍정적인 관심이 싫은 건 아니었다.

“괜찮아요.”

“올리버 씨가 만든 호박파이는 아주 일품이랍니다. 단 걸 드시면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네.”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렇다고 침실 자체가 불편한 건 아니었고, 그저 마음속 깊이 박힌 불안 때문이었다.

요즘 매일 밤 기사들에게 쫓기거나 어머니가 화형당하던 날의 기억을 꿈으로 꾸곤 했다.

그리고 오늘은 꿈에서 벨리아르 공작을 보았다. 그는 창가에 기대선 채 흐느끼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한 악몽 사이로 그런 꿈이 스며드니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오는 길이 고되셨죠? 가뜩이나 공작님과 같은 마차를 타고 오셨으니 지치실 만하죠. 저는 충분히 이해한답니다.”

소렐 부인은 벨라를 창가에 놓인 테이블로 이끌었다. 의자에 앉으니 네모난 창문으로 잔잔하게 물결치는 강가가 보였다. 푸른 잔디밭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였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뭐든 물어보셔도 좋아요. 저는 아가씨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고 싶답니다.”

“……제 눈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단순히 눈동자가 보라색이라고 무서워하거나 경멸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더 무서운 공작님을 모시니까요.”

“아…….”

어쩐지 매우 이해가 가는 답변이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벨라는 곧 풀어지듯 웃고 말았다.

곧이어 경쾌한 노크 소리가 울리고, 시에나가 따끈따끈한 호박파이와 오렌지 주스를 들고 나타났다. 트레이 위에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도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아가씨. 드시고 모자라시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왕창 갖다 드릴게요.”

“공작님께는 갖다 드렸니? 아데인 경께는?”

“두 분은 일찍 외출하셨어요. 그리고 오늘은 제인이 당번이라구요.”

“어째 공작님이 오시는 날엔 늘 제인이 당번인 것 같구나?”

“기분 탓이에요. 그리고 제인이 가위바위보를 못 하는 걸 어떡해요?”

둘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시에나가 방을 나서고, 그녀와 눈을 마주친 소렐 부인은 푸근한 미소로 답했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벨라는 먼저 입을 뗐다.

“공작님께서 수도에 자주 오세요?”

소렐 부인은 어느새 가져온 빗으로 자연스럽게 벨라의 머리칼을 빗겨 주었다. 부스스하던 은빛 머리칼이 능숙한 손길을 거치자 찰랑찰랑하게 정돈되었다.

“자주는 아니고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오세요. 특히, 이 시기엔 꼭 오시죠. 건국제 때문에 사교 행사가 잦은데 그런 데엔 전혀 참여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보시지만요.”

그러고 보니 곧 건국제가 열릴 시기였다. 건국제가 열리면 전국이 떠들썩했지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벨라는 늘 고요한 숲에 잠겨 있었다.

“건국제……. 그런데 건국제는 아직 시간이 조금 이르지 않나요?”

“공작님은 늘 건국제보다 일찍 오셨다가 늦게 가세요. 베른의 겨울을 싫어하시거든요.”

“그렇구나…….”

은근 베른의 겨울을 기대했었는데. 그럼 겨울 동안은 베른에 가지 못하는 건가 싶어 옅은 아쉬움이 번졌다.

벨라는 먹기 좋게 잘린 호박파이를 한 입 먹어 보았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살짝 눈이 커졌다. 소렐 부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물었다.

“입맛에 맞으세요?”

“네, 정말 맛있어요.”

아침이라 입맛이 별로 없어 잘 못 먹을 줄 알았는데, 호박파이는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더 드릴까요?”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벨라가 편하게 먹도록 잠시 빗질을 멈추었던 소렐 부인이 다시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포근한 손길에 사뭇 졸음이 밀려왔다. 나른해지려는 눈꺼풀을 가볍게 만들려고 새콤한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이번엔 아가씨가 계시니 공작님도 사교 행사에 참여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사교 행사라면, 귀족들의 모임을 말하는 걸까. 한 번도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 그저 상상만 해 보았다. 아주 머나먼,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저는 그냥 공작님을 따라온 거라…….”

“아가씨도 어엿한 성인이시니 이제 데뷔탕트로 나서셔야죠. 알현식 때 황후 폐하께 인사도 올리고요.”

데뷔탕트, 알현식, 황후 폐하.

버거운 단어들이 휘몰아치자 절로 졸음이 달아났다. 아마 소렐 부인은 자신을 베일리 남작 영애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니 이리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숲에 살던 비루한 벨라는 죽었다 깨어나도 얻지 못하는 것.

마치, 귀족 영애의 모습을 한 잘 다듬어진 인형이 된 느낌이었다.

자신이 감히 황후 폐하를 뵙고 인사를 올리다니, 상상하는 것조차 무서운 소리였다.

그녀의 표정이 사뭇 가라앉자 소렐 부인은 능숙하게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