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소만에 갈 때와는 달리 동행하는 인원이 많았다. 에릭과 치치도 가고, 기사 대여섯 명도 동행했다. 짐마차에 실은 짐도 한가득이었다.
에릭은 말에 올라타는 걸 봤는데, 치치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럼 치치는 어떻게 함께 가는 걸까. 아니면 그냥 성에 두고 온 걸까? 분명 같이 간다고 했는데.
대각선에 앉은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평소에도 차가운 표정이긴 했지만 요즘은 특히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 결국 고개를 떨궜다. 머리 위로 짜증스러운 기색이 듬뿍 담긴 말이 날아왔다.
“할 말 있으면 해. 거슬리게 눈 굴리지 말고.”
“……치치는요?”
“열심히 걷고 있겠지.”
심드렁히 주어진 답에 벨라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혹시나 걸어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그는 여지없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눈도 안 보이는 애를…….
“노예니까 당연한 거지. 그렇게 마음 아파?”
“하지만, 여기는 노예제도가 없잖아요. 그럼 치치도…….”
힘들게 걷고 있을 치치의 모습이 상상되어 안쓰러운 마음에 따지듯이 말이 나와 버렸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벨라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그게 끝이야?”
그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당황스러워하는 게 표정으로도 드러났는지 그는 말을 더 얹어 주었다.
“앞도 못 보는 치치가 걷는 게 마음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그에게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그냥 말로만 부탁하는 것을 원하는 건 아닐 테고, 어떻게 해야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부탁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잠시 생각을 마친 벨라는 끝내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벨라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벨리아르는 나직이 조소를 흘렸다. 그는 벨라의 앞을 발로 막았다.
“내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좋은데, 벨라.”
벨리아르는 중간에 말을 쉬며 그녀에게 턱짓했다. 다시 제자리에 앉으라는 소리였다.
“남한테도 그따위로 생각 없이 휘둘릴래? 다시 생각해.”
여태까지 그가 제게 바랐던 건 이런 순종적인 태도였기에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재촉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대체 그의 의도가 뭘까 생각하던 벨라는 아까보다 다채로운 방면으로 범위를 넓혔다.
그러던 중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고, 제법 가능성이 크다는 느낌이 왔다. 말해도 되나 하는 고민이 들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치치…… 걸어오는 거 아니죠?”
“내가 거짓을 말했다는 근거는.”
그가 비스듬히 웃으며 물었다. 벨라는 그가 되물었을 때 정답임을 어느 정도 확신했다.
“공작님이랑 저랑 둘만 가는 게 아니잖아요. 치치가 걸으려면 혼자 오게 할 순 없으니 속도를 맞춰야 할 텐데, 지금 마차 속도는 너무 빠르고…….”
차분히 말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혀끝이 둔해졌다. 벨라는 버릇처럼 고개를 떨궜다. 곧바로 그의 질책이 날아왔다.
“그래서. 말을 할 땐 말끝 흐리지 말고 똑바로 마무리 지어야지.”
벨라는 손끝을 힘주어 맞잡은 채 빠르게 말을 뱉었다.
“뒤에 짐마차도 있으니까 거기에 두셨을 것 같아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잠깐의 정적조차 견디기 힘들었던 벨라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 속절없이 붙들렸다.
“……혹시 제가 공작님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었나요?”
“아니. 잘했어. 앞으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엔 이런 식으로 대처하는 거야. 곧이곧대로 듣지 말고 늘 의심해.”
“네. 그래도…… 공작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 믿을게요.”
얌전히 내뱉는 말에 내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지고 말았다.
“당연한 소릴.”
곧이곧대로 듣지 말고 늘 의심해.
벨라는 그가 했던 말을 혀끝으로 둥글렸다.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머릿속에 잔상을 남겼다.
“……공작님, 저희 소만에 가는 거예요?”
“왜, 소만 가고 싶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어디 가고 싶은데.”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그저, 아무도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으니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었다.
어디 가고 싶냐는 물음에 문득 떠오른 곳은 있었지만 가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곳이었다. 지도에서 보았던, 머나먼 사막. 물이 메말라 모래로 뒤덮였다는 그곳이 조금 궁금했다.
“헤버튼?”
낯익은 도시 이름에 무릎 위로 올려 둔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벨리아르는 느른하게 웃었다.
“헤버튼 지나갈 텐데, 거기서 내려 줄까.”
조금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그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 그런 소릴 해 주었던 걸까. 이제 버려질 테니 다른 사람들 앞에선 멍청하게 굴지 말라고?
“……안 버린다고 하셨잖아요.”
벨라가 침울하게 따지자 벨리아르는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안 버린다고 확언해 준 적이 있었나. 저 작은 머리통엔 가끔 맹랑한 생각이 떠다니는 듯했다.
“내가 언제 버린대? 헤버튼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베른에 돌아갈 때 주워 갈 테니까.”
“그동안 기사들한테 잡혀가면 어떡해요.”
“그건 무능한 네 탓이지. 귀족 영애라고 당당하게 굴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은 벌 수 있지 않을까?”
벨리아르는 적당히 대꾸해 주면서도 정말 쓸데없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걱정하는 꼴이 우스웠다.
벨라는 문득 그의 말이 걸렸다.
베른에 돌아갈 때? 베른에서 헤버튼을 지나는 것이라면…….
헤버튼에 있을 때의 기억이 갑작스레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벨리아르 공작가의 마차가 기사들을 이끌고 수도로 향하던 것.
“……혹시, 저희 수도에 가는 거예요?”
“오늘은 제법 눈치가 빠르네.”
하지만 수도에 가는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수도는 왜 가는 거예요? 에릭 경이 오래 있을 거라고 하던데…….”
“이럴 땐 또 눈치가 없고. 벨라, 내가 수도에 가는 이유를 일일이 네게 설명해 줘야 할까?”
“……아니요.”
울적하게 가라앉은 벨라의 모습을 보던 벨리아르는 넌지시 물음을 건넸다. 그냥 두려니 찝찝하고 짜증만 더해질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거 있어? 배우고 싶은 거라든가.”
“……말해도 돼요?”
“그런 멍청한 질문은 하지 말고.”
사실 배우고 싶은 건 끝도 없이 많았다. 예전에도 해 보고 싶은 건 많았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감히 바라지도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혹시 그가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하게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음……. 검술이요. 말도 타고 싶어요. 총도 쏴 보고 싶고……. 독 제조하는 법도요.”
벨라는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쭉 읊었다. 벨리아르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아 듣다가 나직이 실소했다.
“아주 좋은 것들이네.”
“공작님, 혹시 마법 같은 거 할 줄 아세요?”
“마법?”
“……죄송해요, 제가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했죠.”
금세 들떠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더니, 또 금세 가라앉았다.
“저는…… 너무 무력한 거 같아요. 그게 싫어요. 차라리 진짜 마법 같은 거라도 부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면 덜 억울할 것 같아요.”
벨리아르는 그녀의 깊은 내면에서 삐져나온 욕망을 알아챘다. 벨라는 과연 자신이 말한 것들의 공통점을 알고 있을까.
그는 벨라에게 왜 그런 것들을 배우고 싶은지 물어보려다 말았다. 제 욕망을 깨닫고서 스스로 상처받아 울상 지을 모습이 뻔히 보이니 벌써 귀찮고 거슬렸다.
“총은 무거워서 안 돼. 검도 마찬가지고. 단검 정도는 괜찮겠네. 그리고 마법은, 네 말대로 터무니없지.”
“그럼 다른 건요?”
“독 제조하는 건 나중에 봐서.”
“말은요?”
이것저것 허락해 주니 신나서 쫑알대는 모습이 제법 볼만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안에 일렁이는 잔혹한 충동에 불을 지피는 꼴이었다.
벨리아르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조금만 여지를 주면 이렇게 버릇이 없어져서.”
나른한 말투가 마차 안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무겁게 뭉쳐 놓았다.
벨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짓씹었다. 내려앉은 시야에 그의 손이 보였다. 그는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이때야말로 그의 발아래 무릎 꿇을 타이밍이었다. 벨라는 주저하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곤 그녀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턱을 쥐고선 물건을 살펴보듯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그는 통통한 입술에서도 특히 붉어진 부분을 꾹 눌렀다.
무언가 불안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입술을 씹어서 상처가 난 곳이었다. 벨라는 말없이 설핏 눈가만 찡그렸다.
“누가 이렇게 내 거에 상처를 내놨지.”
“……죄송해요.”
“죄송할 짓 하지 말고 고쳐.”
수도로 가는 며칠 동안 이따금 닿는 그의 손길은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칠었다.
그리고 며칠 뒤, 벨리아르 공작이 수도 애플리던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각지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 * *
공작의 저택은 한적한 강가에 있었다. 밤에 도착해서 그 풍경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늘 잔잔한 물소리가 흘렀다.
여기서도 당연히 그와 같은 방을 쓸 줄 알았는데, 에릭은 그녀에게 따로 방을 안내해 주었다.
“……저 혼자 자는 거예요?”
“무서우십니까?”
“그렇기보다는……. 그냥, 어색해서요. 어색해서 그래요.”
누가 봐도 의연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벨라는 얼마 가지 않아 제 불안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겐 저도 모르게 생긴 밤의 버릇이 있었다. 납치당한 후로 악몽을 꾸는 빈도가 잦아졌고, 그때마다 달빛 속에서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을 찾았다.
가만히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마음속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방을 쓰지 않는다고 하니, 막연한 불안이 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