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벨라는 침실에서도 잘 내려다보이는 정원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이번에도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으려는 치치를 겨우 말려 벤치에 앉도록 만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살짝 불안하긴 해서 그의 침실이 있는 쪽을 흘긋 쳐다봤다. 햇빛 때문에 바깥에서는 창문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치치를 바깥에서 꿇어앉게 둘 순 없었다. 대화 내용이 그에게 닿지 않는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아?”
“네?”
벨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치치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지하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온몸에 만연했던 멍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살도 조금 붙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누가 막 괴롭히진 않았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오로지 벨리아르 공작이었다. 치치를 험하게 대했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
이름도 치치가 뭐야. 좀 성의 있게 지어 주지.
벨라가 공작에 대한 불만으로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치치의 입가로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아니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미안해.”
“아가씨께서 왜 미안하세요?”
지하에 갇힌 치치를 본 후로 내내 마음속을 맴돌던 말이었다. 과연 치치를 이곳에 데려온 게 잘한 일일까 싶었다. 도와 달라고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
그때 괜한 오지랖을 떨지 않았더라면, 치치에게 조금 더 나은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제게 치치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지만, 벨라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성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결국 치치도 온전히 그의 소유였다.
과연 정말 순수하게 제 부탁 때문에 치치를 구해줬을까. 그렇다면 치치를 제게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보냈어야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치치는 제게 감긴 또 하나의 족쇄였다. 그래서 매몰차게 대해 볼까도 생각했었다. 관심 없는 척 굴면 그가 족쇄를 풀어 줄까 봐.
하지만, 그라면 쓸모가 없어진 족쇄를 망가트릴 것이다. 가차 없이 부수고 버리겠지.
벨라는 그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그가 치치를 이용할 빌미를 주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자신이 말을 잘 들으면 되는 것이다.
“나한테 존댓말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불가능해요, 아가씨.”
“……그럼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편하게 하는 건?”
“저는 이게 편해요.”
그게 편하다고 하니 벨라는 더 권유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마음 편해지자고 치치에게 곤란한 일을 떠맡길 순 없으니까.
“원래 이름은 뭐였어?”
“……치치요. 제 이름은 치치예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다시 묻지 않았다.
“혹시, 하탐에서 지냈던 얘기해 줄 수 있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어떤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아무 얘기나 다 좋아.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 너랑 친해지고 싶고…….”
치치는 눈을 감고서도 그녀가 있는 방향을 똑바로 인지했다. 그래서 가만히 내려 감은 눈을 보고 있으면,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는 수도원에 있었어요. 그곳은 다양한 사람이 찾았는데…….”
치치는 어머니의 기억을 빌려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치치가 전해 주는 낯선 나라의 이야기는 마치 동화 같았다. 다 커서 듣는 동화는 때때로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 * *
그는 며칠에 한 번, 그마저도 정해 주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치치와 만나게 해 주었다. 아마 그냥 본인이 내킬 때 한 번씩 보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벨라는 고요한 방안에 홀로 있었다. 그는 사냥을 간다고 하며 에릭도 데리고 가 버렸다. 평소라면 지금은 에릭과 산책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창문에 기대어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눈이 내리니 창문은 열지 말라고 했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포슬포슬 내리는 눈송이를 따라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창문으로 옅게 손자국이 남았다.
“……이럴 때 치치랑 만나게 해 주지.”
벨라는 곧 자신의 상태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심심했다.
그는 아직도 그녀가 혼자 방 밖으로 나가는 건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한 번 몰래 바람 좀 쐬고 올까 했지만, 치치를 떠올리고선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여기서 보면 그가 오는 모습이 보일까.
아예 의자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창문 너머로 낯익은 새가 날아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의 말도 잊고 얼른 창문을 열었다.
“……이게 뭐야?”
새가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작은 편지 봉투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봉투를 집자 새는 순순히 놓아주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쓰여 있지 않은 편지를 열어 보았다.
[포웬에서의 나들이는 어땠어요?]
아, 이 새는 엘리아스의 새구나. 어쩐지, 야생의 새라고 하기엔 사람 손길에 너무 익숙해 보였다.
“음…….”
편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내용이 짧았다. 저 한 문장이 끝이었다.
새는 날아가지 않고 그녀의 손으로 총총 다가왔다. 친근하게 부리를 비비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아, 혹시 답장을 기다리는 거니?”
작은 새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삑삑대며 울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벨라는 얼른 제 간식으로 두었던 빵을 가져왔다. 뭐든 주고 싶었다. 빵을 최대한 작게 부스러기 내어 앞에 뿌려 주니 작은 부리가 열심히 움직였다.
“그거 먹으면서 잠시만 기다려 줘. 금방 쓸게.”
그런데, 무엇으로 답장을 쓰지.
곤란한 시선으로 방안을 살폈다. 잠시 머뭇거리던 벨라는 결국 조심스럽게 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정갈하게 정돈된 책상에서 그의 분위기가 풍기는 듯해 쉽사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벨라는 결국 그가 늘 쓰던 펜에 손을 댔다. 혹시 건드렸던 티가 날까 봐 빠르게 편지 뒤쪽에다 답장을 쓰고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고선 새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주지, 하며 머뭇거리고 있으니 새가 부리로 봉투를 콕 물어 갔다.
새는 마치 인사를 건네듯 짧게 울고는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갔다.
“고마워. 조심히 가. 나중에 또 와.”
자유로이 날갯짓하며 멀어져가는 새를 바라보던 벨라는 버릇처럼 창문을 꼭 닫았다.
* * *
요즘 들어 부쩍 성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마치 전에 연회를 열었을 때처럼 말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그녀의 호기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마차가 여러 대 움직였고, 사용인들은 무언가를 분주히 들고 날랐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기사들도 여럿 보였다.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에릭이 그녀의 옷을 여러 벌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종종 하녀 대신 벨라가 입을 옷을 챙겨 오곤 했다.
“아가씨, 옷 갈아입으세요.”
벌써 산책하러 나갈 시간이던가?
그는 옷을 침대에 올려 두며 의아한 벨라의 시선에 대꾸했다.
“오늘은 산책하러 가는 거 아닙니다.”
“네? 그럼요?”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에릭은 자세한 답을 해주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벨라는 일단 옷을 갈아입었다. 에릭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오세요.”
일단 그를 따라나서긴 했지만, 불안한 마음까지 지우진 못했다.
“에릭 경, 어디 가는 거예요?”
“마차 타러 갑니다.”
불현듯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그날도 이렇게 에릭을 따라갔다가 마차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놀고 오라던 그의 목소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벨라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에릭은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저, 또 나가는 거예요?”
“싫으세요?”
“저 안 나가도 되는데……. 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냥 방에 있으면 안 돼요?”
이번엔 그에게서 따로 들은 말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내보낸다는 건……. 새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반지를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릭은 무감하게 말을 뱉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네? ……정말요?”
“네. 주인님도 가시고 저도 가고, 하물며 치치도 가는데, 아가씨는 혼자 여기 계세요.”
“……네?”
“오래 걸릴 겁니다. 그동안 밥 잘 챙겨 드시고 잘 놀고 계세요. 아, 혼자 나가시는 건 위험하니 방안에만 계시고요.”
그는 높낮이 없는 말투로 차분히 말을 쏟아 내곤 냉랭하게 등을 돌려 걸어갔다.
“저, 에릭 경……!”
에릭이 빠르게 멀어지자 벨라는 다급히 걸음을 뗐다. 뛰다시피 하며 그의 뒤로 바짝 붙어 걸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만 나가는 게 아니에요?”
“다 같이 가는 건데, 아가씨만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죠. 주인님도 아가씨가 가기 싫다고 하시면 그냥 두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난 또. 그가 정말 자신을 성에서 내치려는 줄 알았다. 다 같이, 게다가 치치까지 가는 거라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제야 벨라는 조용히 에릭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던 그가 순간 멈추는 바람에 하마터면 등에 부딪힐 뻔했다. 에릭은 그녀에게로 돌아서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계속 따라오십니까? 방으로 돌아가세요.”
냉정한 표정에 농담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문득, 그 모습이 누군가와 매우 겹쳐 보였다.
“……에릭 경.”
“예, 말씀하세요.”
“공작님을 많이 닮으신 것 같아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살짝 비꼬아도 통하질 않으니 괜히 억울한 마음만 커졌다. 에릭은 종종 들어온 말이었기에 전혀 타격이 없었다.
“……저도 갈래요. 갈 거예요.”
에릭은 오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기분 탓인지,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 것 같았다.
“당연히 가셔야죠. 주인님께서 지시한 건데. 따라오세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한 말투였다. 애초에 선택지 따위를 준 적이 없다는 듯.
에릭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벨라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에릭의 등을 잠시 쏘아봤다. 그러다 멀어질까 싶어 다급히 발을 움직였다.
결국, 어디 가는지 알려 주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