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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59)화 (59/180)

59화

벨리아르는 에릭의 뒤로 삐져나온 서신들을 보며 비스듬히 입매를 비틀었다.

“그것들은 빼돌릴 서신들인가?”

그의 시선이 닿자 서신 뭉치를 든 손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드릴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어차피 다 응하지 않으실 테니…….”

“그럼 내 눈에 보이지 말았어야지. 이리 줘.”

에릭은 여러 장의 초대장을 그의 앞으로 올려 놓았다. 이리 초대장이 밀려든다는 것은, 곧 수도가 떠들썩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건국제가 다가오고 의회가 열리는 시기였다. 자연스레 각 영지에 흩어져 있던 귀족들이 수도로 돌아오게 되고, 사교 시즌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 년 중 벨리아르의 기분이 가장 바닥으로 처박히는 시기기도 했다. 이때는 에릭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매사에 긴장했다.

그는 의례적인 초대장들을 휙휙 넘기며 지루한 듯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모이는 거 참 좋아해. 바글바글 몰려 있으면 재밌나 봐.”

그러다 어느 초대장엔 그의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수신인을 확인하고서 봉투를 열어 보기까지 했다. 내용을 확인한 그는 에릭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 베일리 남작 영애에게도 초대장이 왔네.”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던 벨라는 갑작스러운 관심에 눈이 동그래졌다.

“……네?”

방금 큰 토마토 조각을 입에 넣은지라 한쪽 볼이 볼록해졌다. 벨리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원래 목적이 그거였다는 듯, 볼록해진 볼을 손등으로 슬슬 매만졌다.

“맛있어?”

“네. 공작님은 안 드세요? 에릭 경은 식사하셨어요?”

“저는 먹고 왔습니다.”

그는 포크 쥔 벨라의 손을 잡아 제 입으로 샐러드 한 조각을 찍어 넣었다.

그가 차나 술을 마실 때를 제외하고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본 건 오랜만이라 벨라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면 문득 그의 존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샐러드를 대충 씹어 넘긴 그는 오묘한 표정이었다.

“벨라는 풀떼기를 좋아하는구나. 진짜 토끼도 아니고.”

이러니까 살이 안 붙지.

그는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며 스테이크 접시를 앞으로 당겨 주었다. 그녀가 먹던 샐러드는 멀리 치워지고, 알찬 메인 요리들로 앞을 채워 놓았다.

벨라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벨리아르는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연스레 에릭 역시 그 감상에 동참했다.

고요한 방 안에 벨라가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렸다. 에릭은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이따금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주인이 함께 있는 자리기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벨라는 두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일 만한데도 제법 태연하게 식사했다. 사실, 이런 상황은 그녀에게 꽤 익숙한 것이었다.

벨리아르는 어느새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조용한 미소가 입가로 삐죽삐죽 새어 나오더니, 결국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에릭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너희 둘이 웃겨서.”

늘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에릭에겐 벨라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꽤 고역일 것이다. 이래 봬도 에릭은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다.

벨리아르는 웃음기를 지우고 엄한 목소리로 벨라를 다그쳤다.

“벨라, 테이블에서 팔 치우고 허리 똑바로 세워 앉아.”

“아…….”

그의 지적에 벨라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곧바로 빳빳하게 허리를 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도 모르게 버릇처럼 테이블에 한쪽 팔을 받치고 있었다. 이따금 턱을 괴며 음식을 씹기도 했고.

여태껏 밥을 먹을 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으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처음 성에 왔을 땐 그래도 긴장감에 자세를 바로 하고 있었는데, 익숙해지니 몸은 점점 편한 자세를 찾아갔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곁에 서서 등을 매만졌다. 너른 손바닥이 쓸고 지나가는 곳마다 뜨겁게 불길이 이는 듯했다.

“숲에서 굴러먹다 와서 그런가, 테이블 매너가 엉망이야. 가르치긴 해야겠네.”

“……죄송해요, 고칠게요.”

“뭘 안다고 고쳐. 그리고 내 앞에선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밥이나 똑바로 먹어. 그래도 에릭이 있을 땐 신경 쓰긴 해야겠다.”

에릭의 이야기가 나오자 벨라는 저도 모르게 에릭을 흘긋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왠지 저를 질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좋아하는 에릭은 이런 버릇없는 태도 싫어하거든.”

벨라는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살짝 확인해 본 냅킨은 깨끗했다. 다행히 꼴사납게 입가에 무언가를 묻히며 먹진 않은 모양이었다.

“……저 이제 다 먹었어요.”

힘없이 포크를 내려놓자 그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꾹 눌러 앉히듯 했다.

“나는 이런 태도를 싫어하고.”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에 벨라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러고선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천천히 다 먹고, 소파에 앉아.”

눈매는 서늘하게 굳어 있으니, 명백한 가짜 미소였다.

“……네.”

벨라는 얌전히 답하며 그가 앞으로 놓아 준 스테이크를 집중적으로 입에 넣었다. 이미 배가 찼지만, 거북한 포만감이 목구멍에 차오를 때까지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엔 그가 지시했던 것을 잊지 않고 소파로 가 앉았다. 에릭과 이따금 대화를 나누던 벨리아르는 그 모습을 보고선 의외의 말을 꺼냈다.

“에릭, 치치 데려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순간 벨라는 치치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죄책감이 일었다.

잠시 후, 에릭이 치치를 들여보내고선 사라졌다. 늘 점심을 먹고선 에릭과 산책하러 갔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밀리거나 생략인 모양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의 치치가 눈을 감은 채 소파 옆에 서 있었다. 벨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벨리아르에게 시선을 두었다.

“둘이 놀고 있어.”

그는 벨라 쪽으론 눈길을 주지도 않은 채 말했다. 바쁘고 귀찮으니 알아서 하라는 소리 같았다.

벨라는 치치 쪽으로 어색하게 몸을 틀고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이안을 떠올렸다. 치치도 갓 성인이 되었다고 했으니까, 태어난 달은 별로 차이 나지 않았다.

그는 동생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친구나 다름없었다. 치치를 이안처럼 생각하기로 하니 조금은 답이 보이는 듯했다.

“여기 소파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보았으나 치치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 낯선 곳이니까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구나.

벨라는 혹시 자신의 배려가 부족해 치치가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걱정했다. 그녀가 직접 소파의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치치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아……. 저, 소파로 앉아도 되는데……. 그렇게 앉으면 다리 아플 거야.”

걱정되는 마음에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다가, 또 아차 싶었다.

제국 말로 하면 알아들을까, 소만에서 왔는데.

자꾸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이 한껏 미워질 무렵, 치치가 입을 뗐다.

“저는 이게 편해요.”

“……제국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조금은 할 줄 알아요. 하탐에서 일할 때 제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많아서 그때 배웠어요.”

조금 할 줄 안다는 말은 겸손이었다. 치치는 거슬리는 것 없이 제국 말을 유창하게 했다.

벨라는 바닥에 꿇어앉은 치치를 내려다보는 것이 불편해 소파 앞쪽에 걸터앉다시피 했다. 최대한 몸을 낮췄다.

차라리 같이 바닥에 앉는 것이 나았겠지만, 그러면 그가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 뒤로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좋지 않은 생각을 털어 냈다.

“……그때,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치의 감사 인사에 벨라는 조용히 발을 동동거렸다. 그렇게 인사를 받을 만큼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

“나한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한 건 없는데…….”

오히려 자신이 고맙고 미안하다고, 그런 얘기를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있는 공작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 해도 그의 눈치가 보여 불편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벨라는 결국 그를 불렀다.

“……저, 공작님.”

“왜.”

“치치랑…… 산책하고 와도 될까요?”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었다. 막상 내뱉고 나니 온몸을 울릴 만큼 심장이 거세게 뛰어 댔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똑똑.

갑작스러운 소리에 벨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여기서 벗어나지 마.”

창문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범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네, 저기 앞에만 있을게요.”

얼른 치치와 함께 방문을 나섰다. 방에서 나오니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벨라는 후련하게 숨을 내쉬며 치치의 손을 잡았다. 치치의 몸이 놀란 듯 움찔거렸다.

“……아가씨?”

“이 장소는 낯설잖아. 익숙해지기 전까지만 내가 안내해줄게. 아, ……혹시 기분 나빠? 멋대로 손잡아서 미안해.”

“……그럴 리가요.”

치치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는 것으로 싫지 않음을 표현했다. 벨라는 그제야 편안히 웃었다.

“여기는 복도라서 앞에 아무것도 없어. 계단 나오면 얘기해 줄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치치에게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세세히 말해 주었다.

이안처럼 대하자고 생각하니 그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건 처음이었지만, 벨라는 친구로서 순수하게 치치가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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