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은근히 물어오는 말투가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생경한 공포였다.
“……네?”
“어디 가서 자유롭게 살라고 하면, 그럴래?”
“……왜요?”
“내가 물었으니까 넌 대답을 해야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성을 나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가 주는 것들은 저를 옭아매는 족쇄이기도 했지만, 위험에서 저를 지켜 주는 가시 방패이기도 했다.
“도망치려고 했잖아.”
“그건…….”
헛된 희망에 물들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이젠 자신을 경멸하는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스스로 눈을 가려 저를 어둠 속으로 가두고 싶지도 않았고, 언제 기사들이 들이닥칠까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더 이상은…….
“……아니요. 싫어요……. 공작님은 절 죽이지 않을 거잖아요. ……바깥에 나가면 전 죽을 거예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견고한 요새에 웅크려 있는 것이 너무도 아늑하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가혹한 세상과 맞붙고 싶지 않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 손길이 마치 칭찬하고 어르는 것 같아 벨라는 은근히 뺨을 기댔다.
“그러네. 그러다 그 마녀처럼 내게 잡혀서 불에 타죽을 수도 있겠다.”
태연히 하는 말이 섬뜩했다. 그가 자신을 내보낸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만들거나.
“……저 내보내실 거예요?”
“글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야. 말을 조금 안 듣는 것 같아. 성가셔.”
일부러 귀찮은 기색을 풍기며 중얼거린 말엔 약간의 웃음기가 서려 있기도 했다.
그는 벨라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안에 들어차는 작은 손을 꽉 쥐어 보기도 하고, 얇은 손마디를 뭉근히 쓸어내리기도 했다. 끝내 그의 손끝에 붉은 반지가 걸렸다.
그는 음습한 눈빛으로 벨라를 응시하며 반지를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이든 해야 할 타이밍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자신을 무심히 부러트릴 것만 같았다.
“……저 매듭 장식 말이에요. 제가…… 만든 거예요.”
웬만하면 평생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흔적 없이 가라앉았던 수치심이 금세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얼굴로 확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어김없이 그의 손이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는 옆으로 시선을 틀었다. 책상에 기대 세워 놓은 검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매어 놓은 매듭 장식을.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린 벨리아르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깃들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을 받아 내는 건 조금 버겁지만,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아 다행이었다. 그가 엄지로 눈 밑을 쓸었다.
“정말 예쁜 거 말곤 쓸모가 없구나.”
그 말은 벨라에게 다른 수치를 가져다주었다. 손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침울해졌다가, 이상한 오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성의 일을 배울까요? 배우면 잘할 수 있어요.”
“뭘 잘할 수 있는데.”
뭐든 제 쓸모를 입증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려 미세하게 변한 그의 말투와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빨래나 청소 같은 건 특별히 재주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밤 시중은.”
그가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차마 자각하지 못한 모멸감이 선득하게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네?”
허리를 감고 있던 단단한 팔에 점점 힘이 더해졌다. 그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휘며 압박을 가했다. 뱀에게 얽힌 느낌이었다.
“그것도 배우면 잘할 수 있겠어?”
머릿속에 거센 번개가 한 번 내리친 듯했다. 그 뒤로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데,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 나온 김에 지금 가르쳐야겠네.”
벨리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릎 위에 앉혀 놓았던 벨라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고, 공작님.”
멀어 보였던 그의 집무 공간과 침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 들었다. 빠르게 침대로 다가간 그가 벨라를 침대 위로 내던졌다.
버둥거리는 몸을 거세게 짓눌렀다. 다소 우악스러운 손길이 허리를 쓸고 올라가자 옷자락이 말려 올라갔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던 원피스가 허벅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공작님……!”
벨라는 다급히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얇은 옷이 가차 없이 뜯겨 나갔을 것이다.
“어디서 손을 대. 손 안 치워?”
벨라는 치미는 울음을 삼키려 필사적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차마 힘주어 붙잡지도 못한 손이 애처롭게 떨어졌다.
벨리아르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잔혹한 성정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하게 부풀었다. 제 감정을 통제하는 데에 능숙했던 그는 지금 상당히 짜증스러웠다.
그는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손을 거뒀다. 그제야 벨라는 억눌렀던 숨을 토해 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노는 게 네 일이야.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짓 하겠다고 짜증 나게 굴어.”
그는 푹신한 이불을 끌어와 목 아래까지 덮어 주었다. 매몰찬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손길이었다. 그는 은연중에도 가면을 벗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눈을 덮었다.
“거슬리게 하지 말고 자.”
벨라는 그의 명령에 눈을 꾹 감았다. 힘을 풀면 저도 모르게 눈이 떠질 것 같은 강박이 일었다. 그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숨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불을 더 끌어 올렸다. 조용히 물기가 스미는 눈가를 이불로 꾹 찍어 눌렀다.
눈을 감고 있을수록 잠이 온다기보다 더욱 정신이 선명해졌다. 그의 사소한 움직임이 세세하게 귓가로 울렸다.
그 소리를 물감 삼아 새까만 도화지에 그의 모습을 그렸다. 최대한, 다정한 가면을 쓴 모습으로. 그러는 동안은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 * *
“실제로 마녀가 있었다고 해서 그 영애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어찌 확신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그리 독단적으로 마녀의 존재를 처리하다니요.”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에 로드릭은 애써 한숨을 삼켰다. 안 그래도 나머지 범인 셋을 이송하는 과정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둘이 사라졌다.
뒤늦게 시신을 발견하긴 했지만, 이미 모습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살해당한 뒤였다.
다행히 한 명은 데려와 증언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완벽주의 기질이 있는 로드릭에겐 이런 상황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마녀를 베른에서 처리한 일은 제게 책임을 물으십시오.”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에 로셀은 가늘게 숨을 흘렸다. 제 흥분을 자각하고 다스리려는 노력이었다.
“……경의 노고를 압니다.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경은 이만 이 일에서 물러나도 좋습니다. 며칠간 휴가를 줄 테니 푹 쉬고 오세요.”
한마디로, 이번 일에서 손 떼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이번 일을 마무리하지 않고 더 끌고 가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미 명백하게 결론이 나온 사건인데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짐작은 갔지만 로드릭은 굳이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알량한 권력 싸움의 내면을 보게 되는 순간, 사직서를 내던질지도 몰랐다.
“혹시, 재조사를 명하실 겁니까?”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 영애에게서 마녀와 관련된 것은 어떠한 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벨리아르 공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조사에 아주 협조적으로 나왔고 이번엔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부디, 이성적으로 판단해 주시길 감히 청하겠습니다.”
로드릭이 구구절절 옳은 말만 했다는 것을 로셀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번 기회는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속 쓰릴 뿐.
“……경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휴가를 주겠다는 말은 다른 뜻이 없으니 호의로 받으세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로드릭은 교황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혀로 씁쓸한 감정이 맴돌았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이면을 엿본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맞은 편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로드릭은 걸음을 멈춘 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상관이자 기사단장인 루크 아이솔루스였다.
“……단장님.”
“성하를 뵙고 오는 길인가? 내가 없는 동안 경의 노고가 크다고 들었네. 내가, 참……. 면목이 없어.”
그는 진심으로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아닙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뭐, 그까짓 상처가 별건가. 그 핑계로 나도 좀 쉬려고 그런 거지.”
아무렇지 않은 듯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서 오히려 수치심이 드러났다.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기사단의 수장인 그가 공작에게 어깨를 뚫려 요양했다는 건 상당한 치욕인 듯했다.
“들어가 보십시오. 성하께서 단장님을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이리 회복한 모습을 보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 수고했네.”
로드릭은 제 어깨를 두드리고서 멀어져 가는 루크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벨리아르 공작의 성에서 머물렀던 며칠 동안 마음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이 심어졌음은 분명했다.
신은 과연 옳은가.
스스로 던진 물음에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 * *
벨리아르는 로드릭의 이름으로 온 편지를 훑어내렸다. 중간중간 조소를 내비치던 그는 이내 에릭 쪽으로 편지를 던졌다.
“읽어 봐.”
편지를 읽은 에릭은 제법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잘 처리했나 봅니다. 성하께서 또 날뛸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아마 벨라에 대한 사건은 여기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니 걱정을 조금 내려 두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애초에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갔기에 걱정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벨리아르는 그 대목에서 웃었다.
“오랜만에 내기할까.”
벨리아르가 나른히 묻자 에릭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일 년 안에 관둔다에 걸겠습니다.”
“나는 삼 개월 안에 걸지.”
“꽤 우직해 보이던데요. 그래도 삼 개월 이상은 버티지 않겠습니까?”
우직하니까, 너무 우직해서 오히려 부러지기 쉬운 것이다. 벨리아르는 픽 웃으며 턱짓으로 편지를 가리켰다.
“원래 저런 놈이 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