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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57)화 (57/180)

57화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나니 번뜩 정신이 들었다. 벨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나신 걸까.

잠시 생각하던 벨라는 순간 아차 싶었다. 성으로 돌아온 후 며칠을 앓아누워 있어서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납치당하기 전 했던 걱정들.

“공작님…….”

“왜?”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 우리 벨라가 뭘 잘못했을까.”

그는 절대 잘못을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 그가 매번 제 몸 상태를 확인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로 안 돌아와서…… 죄송해요……. 일찍 돌아오려고 했는데…….”

“쉿. 뭘 잘못했는지 말하라고 했지, 변명하라고 한 적은 없지?”

납치를 당했었던 건 마땅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 전날에 돌아왔다면 될 일이었으니까.

“잘못했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 돼. 쓸데없이 변명할 필요 없어.”

정신을 차리자마자 잘못부터 빌 걸 그랬다. 그럼 이런 벌을 받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입꼬리가 축 처진 얼굴로 후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머리를 아래로 꾹 누르며 일어섰다.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보고 있어.”

“……언제, 언제까지요……?”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게 언제…….

모래시계의 크기에 비해 가운데 잘록한 부분으로 떨어지는 모래의 양이 너무 적었다.

그의 말대로 착실히 모래가 떨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시간이 매우 더디게 가는 느낌이었다. 가루처럼 고운 모래 한 알 한 알이 눈에 밟혔다.

모래가 떨어지고 있긴 한 걸까. 아래로 쌓이는 모래가 터무니없이 적어서 잘록한 부분이 막힌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벨라는 용기 내어 모래시계를 살짝 흔들어 보았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 그녀가 애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공작님, 모래가 너무 조금씩 떨어져요…….”

“입 다물고, 거슬리게 하지 마.”

아무래도 고장 난 것 같아요.

덧붙이려던 뒷말은 그의 싸늘한 일갈에 혀끝으로 파묻히고 말았다. 벨라는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모래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을 하자.

벨라는 모래시계의 생김새를 살피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판판하게 댄 나무판의 결을 세어 봤다. 그러나 점점 더해지는 팔의 고통과 꿇어앉은 다리가 저리는 것을 잊기엔 역부족이었다.

벨라가 저도 모르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에릭이 들어왔다. 에릭은 그녀를 흘긋 보곤 태연히 보고를 시작했다.

“지금쯤 로드릭이 수도에 도착했을 겁니다. 한 명은 살려 보내서 증언에는 무리가 없도록 했습니다.”

“이번에는 로셀이 그냥 좀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괜히 귀찮게 굴지 말고.”

“로드릭이 보고하고 나서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있는데, 이번엔 성하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아둔하시려고.

에릭이 혼잣말처럼 뒷말을 덧붙였다. 교황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었다.

둘의 대화가 잦아들 때쯤, 벨라가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에릭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눈엔 그나마 벨리아르보다 에릭이 조금 더 인정 있어 보였다.

그러나 에릭 역시 단호히 눈길을 거뒀다. 묘하게 배신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동안 같이 산책하며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벨라는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가 벨리아르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흠칫 어깨를 떠는 모습을 보며 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왜 나랑 눈이 마주칠까. 분명 모래 보고 있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망했다.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벨라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서운했겠네? 에릭이 안 말려 줘서. 좀 말려 주지 그랬어.”

벨리아르는 태연히 에릭을 탓하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어 모래시계를 쥐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벨리아르는 3분의 2 이상 떨어졌던 모래시계를 가차 없이 뒤집어 버렸다. 그는 늘 희망보다 절망을 주는 편이었다.

“아……!”

정말 못됐다. 어쩜 이리 못됐지. 원망이 치솟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커다란 손이 곧바로 뒷머리를 꾹 내리눌렀다.

“내 말이 우습지.”

“아니요…….”

“한 번만 더 눈 돌려.”

그는 보란 듯이 에릭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수고했어, 에릭. 가서 쉬어. 오늘은 벨라가 산책하러 갈 시간이 없거든.”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벨라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채 손끝으로 책을 넘겼다.

[카비나시아 대륙의 신화]

그가 읽으라고 준 책이었다. 딱히 신을 믿지 않는 그녀에겐 그저 사람들의 상상으로 빚어진 허황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책을 던져 준 후 그는 제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어느새 달이 선명한 밤이었다. 어쩌면 그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그를 흘끔흘끔 쳐다봤지만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벨라는 책을 덮고 가만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가 또 화를 낼만 한 게 무엇이 있을까. 혹시 포웬에서 자신이 했던 일을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따라붙는 기사가 없었는데.

“아.”

그러다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물건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선 놀라 입을 막았다. 그래도 그는 벨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또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잘못한 건 아니고, 그의 화를 풀어 줄 수 있을 만한 물건이었다. 그에게 선물하려고 직접 만들었던 매듭 장식이 이제야 떠올랐다.

벨라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침대에서 내려가 서랍으로 다가갔다. 침대에서 가까이 놓인 서랍은 암묵적으로 벨라의 것이었다. 금화 주머니도 여기에 넣어 놓았었다.

살며시 서랍을 여니 포웬에서 샀던 물건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벨라는 그중 매듭 장식과 지도를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벨리아르의 주위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생각이 바뀌었는지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겼다.

곁에서 알짱대니 벨리아르도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의 황당한 시선이 벨라를 좇았다.

벨라는 한구석에 놓여 있는 그의 검 앞에 섰다. 떨리는 손끝으로 검의 손잡이에 매듭 장식을 걸었다. 그러고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벨리아르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가져와야지.”

“아…….”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듭 장식이 달린 검을 그에게 넘겨주려니 내키지 않았다.

검에 달린 매듭을 자세히 살펴보던 벨리아르가 낮게 조소를 흘렸다.

“형편없네.”

칭찬해 주면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벨라는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손수 만든 매듭 장식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그의 검에 달려 있으니 더욱.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벨라는 발갛게 익은 얼굴로 세계지도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얼른 주제를 바꾸고 싶었다.

“……공작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뭘까.”

“지도예요. 세계지도.”

그걸 몰라서 묻겠니. 벨리아르는 설명해 보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채근했다.

“……저번에 밖에 나갔을 때 샀어요.”

“잘했어.”

이런 걸 샀다고 하면 혹여 화를 낼까 봐 긴장했었는데, 의외로 그는 나무라지 않았다. 긴장에 조여들었던 몸이 조금 풀어졌다.

“사막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여기.”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을 따라 벨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제국 땅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와, 멀다…….”

그녀가 순수하게 감탄하자 벨리아르는 풀어지듯 웃고 말았다.

“마음에 들었나 봐, 그 모래시계.”

모래시계 자체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게 제 팔을 그렇게 괴롭히지만 않았다면 훨씬 좋아했을 것이다.

벨라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진 모래시계를 한 번 쳐다봤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상당히 예쁘긴 했다.

“……네.”

벨리아르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중심을 잃은 벨라는 그가 힘을 주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얼떨결에 그의 무릎에 앉게 된 벨라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허리를 감은 단단한 팔을 풀어내기엔 턱도 없었다. 결국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진 얼굴이 아래로 떨어졌다.

“……죄송해요.”

벨라는 버릇처럼 사죄했다. 땅에서 떨어진 발이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어릴 때도 이런 기억이 없는데, 다 커서 누군가의 무릎에 앉아 있다니. 어색하고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조금 괴롭혔다고 금세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러게. 버릇이 없어서 어쩌지.”

질책하는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대체 그의 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속절없이 휘둘릴 수밖에.

“옷 망가져서 속상하겠네.”

그가 말한 옷이 어떤 옷인지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소만에서 그가 사 준, 포웬에 나갈 때 입고 갔던 옷이었다. 벨라는 그가 그 옷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주신 옷이 많으니까 괜찮아요.”

“그래?”

“네, 그게 더 마음에 들어요.”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그 옷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가 지어 준 옷들보다 특별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옷보다는 그런 기억이 즐겁고 소중했다. 옷이 망가진 거지, 추억이 망가진 건 아니니까.

벨리아르는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예쁜 말을 하네.”

그는 마땅히 제 것처럼 그녀를 만지작거렸다. 벨라는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짙게 배어나는 소유욕이 달가웠다.

절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리라곤 절대 생각지 못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만큼 충격적이었다.

“벨라, 여기서 나가라고 하면 어떡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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