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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56)화 (56/180)

56화

벨리아르는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앞을 응시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시선은 충분히 느껴지기에 시간이 갈수록 치치의 고개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오히려 눈이 보이지 않은 후로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까딱이던 그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에릭, 혀까지 뽑아 놨어?”

그제야 치치는 숨 막히던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다. 뭐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며 재빨리 말을 골랐다. 제국과 맞닿아 있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기에 제국 말을 알아듣고 구사하는 데엔 큰 무리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며 전한 감사 인사는 매우 간결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많이 해 본 적이 없어 말주변이 없던 탓이다.

“이걸 눈치가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벨리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진열해 놓은 곳으로 다가갔다. 장식품처럼 진열해 놓았지만 실제로 그가 사용하는 무기들이었다.

무감한 시선이 무기들을 훑었다. 그는 평소처럼 별 고민 없이 칼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검집에서 칼을 빼 들자 치치의 어깨가 바짝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치치의 앞으로 다가갔다. 곧이어 치치를 향해 칼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 칼이 공기를 가르며 올라가는 소리 같은 것들을 세세하게 담고 있던 치치는 뒤로 재빠르게 물러서며 칼을 피했다. 생각해서 나온 행동이라기보단 몸을 밴 버릇이었다.

벨리아르가 제법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치치를 바라봤다. 일부러 느리게 휘두르긴 했지만, 조금 더 빠르게 했어도 상관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목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그런 감각과 민첩성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목을 베어 버릴 작정이었다.

“상의 벗어.”

갑작스럽게 내려진 지시에 치치는 영문을 모르고 당황스러워했다. 게다가 자신의 몸 상태를 알기에 선뜻 지시를 따르기엔 망설임이 컸다.

치치가 머뭇대자 설핏 인상을 구긴 벨리아르가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간결한 동작이었다.

선득한 칼날이 치치의 옷을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놓았다. 이번엔 소리를 듣고 피할 겨를도 없었다. 치치는 그제야 날것의 공포를 느꼈다.

살이 베이진 않았지만, 그것이 더 문제였다. 그 정도의 섬세한 검술을 지닌 공작의 존재가 더없이 두려워졌다.

“살고 싶으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짜증 나게 굴지 말고.”

서늘한 일갈에 치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공작은 자신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칼끝이 잘린 앞섶을 건드려 양옆으로 벌렸다. 뒤이어 간결한 동작으로 상의를 아예 벗겨 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치치의 몸을 훑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땐 말라 보였으나 훤히 드러난 몸은 자잘하고 단단한 근육이 잡혀 있었다.

게다가 몸 곳곳엔 수없이 많은 상처가 있었다. 단순히 맞아서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주로 칼에 베이거나 격투로 찢어진, 전장에서 험하게 구른 기사들에게나 있을 법한 상처였다.

“어디서 일했다고?”

“수도원에서 잡일을…….”

치치의 배를 걷어차는 움직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치치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최대한 감내하려 몸을 웅크렸다.

“끅…….”

“짜증 나게 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연스럽게 그의 발아래 꿇어앉는 자세가 되었다. 벨리아르는 칼끝으로 치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치치, 마지막이야. 네게 온정을 베푼 아가씨를 슬프게 만들지 않으려면 잘 대답해야겠지?”

온기라곤 전혀 담기지 않은 차가운 쇳덩이는 치치에게 꽤 익숙한 것이었다. 비릿한 쇳내가 느껴지는 듯했다.

“투기장에서…… 있었습니다.”

“그 눈은.”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 치치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곧바로 칼날의 방향을 틀었다. 넓적한 단면이 아니라 날카로운 칼날이 턱 아래를 곧바로 겨누었다. 살짝 닿는 것만으로 살이 찢어졌다.

또 주저했다간 다음 기회가 없을 것임을 치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런 식으로 경고를 해 주는 건 그 나름의 자비였다.

“……싸우다가 다쳤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서…… 그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하탐에 있던 노예 시장을 뜻했다.

“투기장에서 자랐다고.”

“……네, 그곳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벨리아르는 치치가 있었던 투기장 역시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험하고 잔인한 격투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태생부터 밑바닥이네.”

비아냥거리듯 하는 말에 가느다란 웃음이 배어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치치의 표정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한 번 피식 웃은 벨리아르가 칼의 단면으로 치치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칭찬이니까.”

이후로 벨리아르는 치치에게 몇 가지를 지시했다.

* * *

며칠을 고열로 앓아누워 있었더니 날짜 감각이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났더라.

가만히 지나간 시간을 세어 보다 끔찍한 화형식이 떠올려 버렸다. 벨라는 곧장 상념을 끊어 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버릇처럼 고개를 돌려 그의 책상을 쳐다봤다. 아까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공작의 붉은 눈과 곧바로 마주쳤다. 그는 여느 때처럼 지시했다.

“이리 와.”

벨라는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뎌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벨리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이마에 손등을 대 보았다.

“열 내렸네. 상태 어때.”

몸 여기저기에 붕대가 감겨 있긴 했지만 통증은 거의 없었다. 식은땀에 옷이 푹 절어 있지도 않고 쾌적했다.

지금 기분은 어떠니.

벨라는 자신에게 물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묘하게 안정적이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네.”

그가 바닥을 툭툭 차며 말했다.

“앉아.”

벨라는 순간 당황스러움에 손끝을 움찔거렸다. 거하게 열병을 앓고 난 후라 머릿속이 몽롱해진 것 같았다.

어디에 앉으라는 거지?

의아하게 그를 한 번 보니 단호한 시선이 바닥을 가리켰다.

절대 편하게 앉으라는 뜻은 아닐 테니……. 잠시 머뭇거리던 벨라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정답이었나 보다.

“선물 하나 줄까?”

“……선물이요?”

“우리 벨라가 좋아할 것 같은데.”

그는 언뜻 기분 좋은 것처럼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향했다. 벽 한쪽의 장식장이었다.

벨리아르는 안에서 유리로 만들어진 물건을 꺼내 들고 왔다. 안에 고운 가루가 잔뜩 담겨 있고 유리의 가운데 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낯선 물건을 벨라의 두 손 위에 얹어 놓았다. 그가 들고 있을 때도 제법 커 보이던 것은 제법 무게가 나갔다.

“다리에 손은 닿게 하지 말자. 잘할 수 있지?”

“……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냥 무조건 답했다.

처음 보는 물건에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벨라는 고운 가루가 가운데 잘록한 부분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빤히 바라봤다.

벨리아르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더니 물건 위로 손을 얹었다. 기분 탓인지, 그가 일부러 무게를 더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그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이해가 갔다. 다리에 손이 닿지 않게 하려니 팔이 아파졌다.

그녀가 점점 불안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리아르는 태연하게 대화를 건넸다.

“모래시계야. 본 적 있어?”

“아니요. 처음 봐요.”

“이걸로 시간을 재는 거야. 이 모래가 아래로 다 떨어질 때까지.”

“아…….”

고운 가루가 모래였구나. 왜 유리병의 모양이 이렇게 특이했는지도 단박에 이해가 갔다.

신기함에 순간 팔이 아픈 것도 잊어버렸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모래시계의 무게가 존재감을 더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아주 멀리 가면 사막이 나와. 들어 봤어?”

“……아니요.”

“거긴 물이 메말라서 온통 모래뿐이거든. 특히 어떤 지역의 모래는 이렇게 황금빛이야. 거기 모래를 담아서 만든 거야. 어때, 색이 예쁘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담긴 모래시계는 특히 값비싸게 거래되었다. 말 그대로 황금빛이라 귀족들 사이에 아주 인기가 많은 것이었다.

저 멀리 사막의 나라에서는 일찍이 희소성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저 특정한 지역의 모래를 퍼 담아 만들면 되는 것이지만, 일부러 생산을 제한했다. 적게 만들수록 가치가 올라가니 성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지역의 모래는 외부로 가져 나갈 수 없도록 나라에서 철저히 관리했다.

그깟 모래가 뭐라고.

벨리아르는 황금빛 모래시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시 한번 인간들의 아둔함을 비웃었다. 그는 일부러 커다란 모래시계를 주문했다. 그만큼 값도 올라갔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 예뻐요.”

그래도 벨라가 예쁘다고 하니 값비싼 모래시계는 본분을 다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벨라는 지금 그의 말이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그대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손이 다리에 닿지 않도록 하려니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벨라는 모래시계 위에 얹어진 그의 손을 흘끗 쳐다봤다.

분명 누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가 모래시계 위에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미세한 진동이 타고 내려와 그녀의 손바닥까지 전해졌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무게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벨라의 표정이 점점 울상 졌다.

“선물을 받았는데 표정이 왜 그 모양일까. 마음에 안 들어?”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그런데, 뭐.”

“……팔이, 너무 아파요…….”

“다리에 닿을 것 같아?”

“네, 네…….”

그가 다정히 물으니 희망이 깃들었다. 무거우면 이제 그만 내려놓고 일어나라고 해 주지 않을까, 하는.

그러나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마주한 순간, 유리 같던 희망이 와장창 깨져 버렸다. 냉혹한 눈빛에 등골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어쩌지, 그럼 내가 좀 화가 날 것 같은데.”

아, 그의 다정함은 늘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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