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처음 마주했을 때와 달리 응접실의 분위기는 제법 편안했다. 그건 아마, 둘의 쟁점이던 사건이 해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녀의 자백도 받았고 증거도 확실합니다.”
막 숲에 다녀왔는지 로드릭에게선 찬 기운과 함께 흐릿한 나무 향이 번졌다. 벨리아르는 여유로운 태도로 그에게 따듯한 차를 건넸다.
“우리 아가씨에 대한 혐의는?”
“모두 무효 처리될 겁니다. 베른에서 일어났던 해괴한 짓이 누구의 소행이었는지도 모두 밝혀졌으니 영애께서 더 이상 오해받으실 일은 없을 겁니다.”
로드릭은 아까부터 애꿎은 찻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마 빳빳이 고개를 들고 공작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정말 마녀가 아닐까 의심하는 건 섣부르다고 여겼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했다. 자신도 그런 생각을 조금이나마 떨쳐 낼 수 없었기에. 어차피 똑같이 간사한 마음을 가진 한낱 인간이었다.
실제로 베일리 남작 영애는 마녀 집단에 납치당하는 노고까지 겪었다. 그 덕분에 그들의 소굴을 알아내어 이리 소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벨리아르 공작 역시 마녀와 결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리 조사에 협조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열심히 마녀의 뒤를 캐고 있을 줄 어찌 알았겠나. 거창하게 조사단을 꾸려 왔지만 정작 자신이 한 건 공정하지 못한 의심뿐이었다.
“성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까.”
증거가 명백하니 이견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벨리아르는 그런 이성적인 부분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로드릭도 그것을 어렴풋이 알기에 살짝 걱정이 들었다.
분명 마녀를 잡고 명확한 증거도 확보했으니 후련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제가 잘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경이 알아서 잘하겠지.”
“마녀는 저희가 신전으로 이송하겠습니다.”
“아니. 여기서 바로 처리했으면 하는데.”
“예?”
마녀를 직접 처리하겠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로드릭은 얼떨결에 반문했다.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엉망으로 굴러갔다. 어떠한 과정이 있든, 마녀의 처분은 한 가지였다. 공작도 그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설마…….
로드릭의 표정이 옅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벨리아르는 태연히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꼬아 앉은 다리 위로 올려진 손가락이 까딱였다.
“내가 성격이 좀 급해서. 어차피 신전으로 데려가서도 화형에 처할 것 아닌가? 그냥 여기서 태워 버리면 서로 편하지.”
설마 했던 걸 직접 말로써 들으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사실 마녀의 화형은 그리 깔끔한 과정이 아니기에 귀족들은 보는 것조차도 극도로 꺼렸다.
대놓고 끔찍하다고 여기기도 하고. 그런 일을 자신의 성에서 직접 하겠다니. 로드릭으로선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원칙을 중시하는 그가 섣불리 받아들이기엔 걸리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마녀를 화형에 처하려면 정해진 절차가…….”
“내가 잡았으니 내가 처리하겠다는데, 문제 있나? 구색은 다 맞춰 주지. 신관은 옆 도시 신전에서 데려오면 될 거고, 마침 대신전에서 온 기사들도 아주 많은데. 그 정도면 참관인도 충분하지.”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들이라 로드릭은 고심했다. 신관도 있고, 그의 말대로 대신전에 지원 요청한 기사들이 마침 도착한 터라 참관인도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벨리아르가 대신전에서 온 기사들을 언급한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뭐가 무서워 지원요청까지 했냐고 은근히 비꼬는 투였다.
“마녀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신전으로 이송해서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어.”
로드릭은 끝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시죠. 성하께는 제가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마무리하지.”
* * *
화형식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절차를 진행할 신관이 있고 화형대만 준비되면 끝이기에 딱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침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화형대가 놓였다.
곧 화형식이 시작될 것이다.
벨리아르는 전반적인 것은 에릭에게 맡겨 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이불에 파묻혀 있는 벨라가 눈에 담겼다.
그는 고민 없이 침대로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잠든 건 아니었는지 스르륵 눈이 떠졌다.
“아직도 열이 조금 있네.”
“네…….”
열기에 잠긴 목소리가 퍽 애처로웠다. 벨리아르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곤 허리를 세웠다.
“일어나.”
열이 올라 발갛게 익은 얼굴로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그는 창가로 걸음을 옮겨 커튼을 살짝 들춰 보았다. 곧 시작할 듯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를 불렀다.
“이리 와.”
뭉그적거리면서도 착실히 제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벨리아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창가에 기대어 기꺼이 손을 뻗어 주자 덥석 붙잡아 오니, 그는 또 한 번 생각했다. 주워 오길 잘했다고.
이불 속에 파묻혀 자다가 나온 몸은 평소보다 더 말랑하고 따끈해서 화덕에서 갓 나온 빵 같았다. 그러니 고소한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리 없는 데도 허기가 지는 듯했다.
“앗…….”
그는 벨라를 제 쪽으로 잡아당겨 창문을 보도록 세워 놓았다. 어디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품 안에 가둔 뒤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옅게 새는 숨이 흐트러졌다. 잔뜩 열이 오른 몸에 차가운 손끝이 닿으니 살갗의 작은 돌기가 예민하게 솟아올랐다.
“벨라.”
벨리아르는 눈앞에 드러난 새하얀 목을 뭉근히 쓸어내리다 경동맥이 지나는 곳을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얇은 피부로 빠르게 뛰는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가 나직이 웃으니 가볍게 날아온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긴장돼?”
눈을 감고 들으니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심장까지 파고들어 온몸을 뒤흔드는 듯했다. 위험한 느낌이 들어 얼른 눈을 떴다.
“……잘 모르겠어요.”
그는 벨라의 머리 위에 한쪽 손을 올리며 커튼을 톡톡 건드렸다.
“커튼 열어.”
그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니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느라 호흡이 살짝 가빠져 있었다.
벨라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열었다. 창문 너머의 광경을 본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저게…… 뭐예요……?”
“그러게. 저게 뭘까.”
그는 여상히 답하며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예상했던 것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녀의 반응이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탓이다. 이건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가 죽어서라도 너희들 모두 저주할 거야! 사지를 다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라고! 아악――!”
여자가 기사들에게 끌려오며 발악하는 소리가 닫힌 창문을 꿰뚫고 침실까지 전해졌다. 제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마구잡이로 악 지르는 소리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니도 저렇게 소리를 질렀던가?
기억과 현실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벨라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마음 같아선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의 단단한 몸이 가로막았다.
“공작님……. 저…….”
그는 벨라의 양어깨를 붙잡은 채 움직이지 못하도록 얽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붉어진 귓가에 속삭였다.
“저 사악한 여자가 죽인 사람이 몇인 줄 알아?”
벨라는 고개를 숙인 채 바들바들 떨었다. 눈을 질끈 감을수록 깊은 심연 위로 덧그려지는 끔찍한 기억이 선명해졌다.
귓가로 스며드는 그의 목소리가 고립되려는 그녀를 억지로 끄집어내곤 했다.
“대여섯쯤 되던가. 짐승처럼 매달아 놓고 피를 뽑았다던데. 저런 사람들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까지 마녀로 핍박받는 거야.”
그가 턱을 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마 저항할 수 없으니 화형대에 불이 붙는 모습을 보며 벨라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저기 남자 보여?”
화형대 앞에 묶인 채 꿇어앉은 남자 셋이 있었다. 그중 두 명은 벨라도 누군지 알았다. 한 명은 숲에서 저를 탐하려던 자였고, 다른 한 명은 무리를 지휘하던 그 절름발이였다.
벨리아르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그녀의 손목을 살짝 힘주어 잡았다.
“흣…….”
그의 손아귀에 갇힌 손목에서 작열감이 올랐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놈들은 수도까지 가지 못할 거야. 아마 도적 떼에게 습격을 받아 끔찍하게 죽을 것 같은데. 온갖 고통이란 고통은 모두 느끼며 아주 천천히 죽어 갈 거야. 그 정도면 우리 벨라 성에 찰까?”
어지러운 머릿속에 그가 납치한 자들을 혼내 줄까 묻던 장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래.” 하며 작게 답했다. 그 음성이 심히 부드럽고 다정해서 울컥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사이 바깥에선 화형대에 붙은 불이 화르륵 타올랐다. 악에 받친 비명이 점점 고통에 물들었다. 물러설 수도, 도망칠 수도 없으니 벨라는 최대한 숨을 곳을 찾았다. 지금은 오로지 저를 가두고 있는 그의 품뿐이었다.
벨라는 돌아서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원하면 들어줄까 싶었다.
“……안 볼래요. 보기 싫어요…….”
“왜. 마녀가 잡혔으니 적어도 베른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됐잖아. 기뻐해야지?”
벨리아르는 바깥의 처절한 비명이 짙어질수록 제품으로 파고드는 벨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옷으로 스며들었다. 작게 얼룩진 옷감에서 느껴지는 촉촉함이 생소했다. 그래서 불쾌하지 않았을까. 그 물기가 번져 저를 모조리 적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까는 허기가 지더니, 지금은 나른한 포만감이 기분 좋게 퍼졌다. 여차하면 사라질까 싶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제 안에 가두듯 했다.
“어떻게 해 줄까. 말해.”
벨라는 온전히 그의 품에 기댄 채 귀를 틀어막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차단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귀를 세게 막아도 끔찍한 비명이 떠나지 않았다.
“창문…… 창문을 닫아 주세요……. 흐윽, 제발…….”
그의 시선이 흘긋 창문에 닿았다.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벨라. 고개 들어서 나 봐.”
그녀가 고개를 내젓자 벨리아르는 억지로 턱을 들어 올려 저를 보게 만들었다.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주어도 금세 물기가 번졌다.
화형식을 보며 극도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짐작이 확실해졌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을 때 그런 장면을 본 것이다. 불안에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그뿐이었다.
“누가 널 죽일 수 있지?”
초점이 어긋났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스며들었다.
“……공작님이요.”
그녀가 제 약한 부분을 드러낼수록, 그것은 벨리아르의 손에 쥔 사슬을 더욱 견고히 만들었다.
가여운 벨라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