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깊은 밤, 벨라의 상처를 치료한 의사가 방을 빠져나갔다. 셋만 남은 침실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벨라는 정신을 잃은 뒤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벨리아르는 이불을 들춰 보며 그녀의 상처를 꼼꼼히 확인했다.
이따금 흉하게 남은 상처로 시선이 닿을 때면 단정한 눈매가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그 변화를 에릭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제 실수입니다.”
벨리아르는 질책하는 대신 가볍게 웃고 말았다. 어차피 마녀의 소굴로 밀어 넣은 건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곳에서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쁘지 않을지도. 이토록 고된 길을 걸어 제게 돌아왔으니 무언가 확실히 깨달은 게 있겠지.
벨리아르는 상처로 엉망이 된 벨라의 손목으로 시선을 내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주워 오길 잘했어.”
“……예?”
“기특하잖아. 집도 잘 찾아오고.”
벨리아르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벨라가 손가락에 착실히 끼고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아늑히 지배욕을 채웠다.
“그래도 말없이 외박은 좀 너무했지. 잘한 건 잘한 거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사실 그날 그냥 집으로 돌아왔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금처럼 벨라에게 집으로 잘 돌아왔다며 칭찬해 주었을 것이고, 마녀의 소굴을 찾아내는 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든 그가 원하는 결과로 나타났을 것이다.
“발로 뛰어오기엔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 밤도 깊었고, 대부분이 숲이라 길도 험했고요.”
에릭이 넌지시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지금 벨라의 상태가 매우 엉망이었다. 처음 제 손으로 고른 원피스는 찢기고 더러워져 거의 넝마가 되었고, 팔이며 다리며 성한 곳이 없었다.
억지로 밧줄을 풀어낸 탓에 손목이 특히 상처가 심했다. 살짝살짝 건들면 정신을 잃고 잠든 와중에도 미간이 움찔거렸다. 접질린 발목도 발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만큼이나 고생했으니 조금 봐주는 게 어떻겠냐는 어투에 벨리아르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휘었다.
“마냥 예뻐해 주면 버릇 나빠져.”
“지하에 지금 가 보시겠습니까? 산채는 다 정리했고 증거도 다 확보해서 보존해 놓았습니다.”
“남은 건 죄를 인정하는 것뿐이네.”
사실 증거가 워낙 명확하니 자백도 필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교황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테니, 로드릭에게 확실한 카드를 쥐여 보내는 것이 나았다.
“그 마녀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다 저주해서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라고 난리던데요. 귀가 아파서 잠시 도망쳤습니다.”
‘저주’라는 말에 벨리아르는 참지 못하고 조소를 흘렸다.
인간들은 늘 한 가지의 부류로 묶이지 않았다. 대다수는 마녀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경멸했지만, 가끔은 오히려 동경하는 경우도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하기도 하고.
“로드릭 앞에서 자백할 입만 멀쩡하면 되잖아. 살아서 주둥이만 놀릴 줄 알면 다른 건 필요 없지.”
“태울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 앞에 내놓으려면 그래도 팔다리는 잘 붙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 에릭의 생각이었다.
더 확실히 하려면 아예 교황의 눈앞에다 그 마녀를 던져 주는 것이 낫겠지만, 무슨 의도인지 벨리아르는 직접 처리하는 것을 택했다.
“응, 태울 거야. 성안에서.”
벨리아르가 가만히 창가 쪽을 주시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에릭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서 잘 보이는 곳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에릭은 침대에서도 잘 보일 만한 위치를 미리 봐두었다. 며칠 후, 마녀의 화형이 집행될 것이다.
* * *
여러 꿈을 꾸었다. 신전의 기사들에게 쫓기기도 하고, 공작에게서 도망치려 필사적으로 달리기도 했다. 분명 그에게서 달아나는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간절히 그를 찾고 있었다.
어느새 뒤쫓아오는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였고, 얼른 그에게 닿길 빌며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다 저 멀리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에게 가기만 하면, 그의 손을 잡기만 하면……. 지독하고 달콤한 안도였다.
그를 몇 걸음 앞에 둔 채 넘어지고 말았다. 다급히 뒤를 돌아보니 형체 없는 불안이 어둑한 그림자가 되어 저를 덮쳐 왔다.
절박한 순간에도 그는 제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닿는 것만으로 얼어붙을 만큼 냉정한 눈빛이 저를 꿰뚫었다.
번뜩 시야가 트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른거리는 눈앞에 그토록 간절했던 공작의 모습이 비쳤다.
아직 꿈의 감정이 깨어지지 않은 탓인지, 순간 마음이 놓이며 설움이 북받쳤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를 새가 없었다.
“흑, 흐윽…….”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울음을 토해 냈다. 창피함도 잊고 그저 서러운 감정에 휩쓸리며 아이처럼 울어 댔다.
눈을 떠야 하는데.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문득 불안해졌다. 혹시 우는 게 꼴 보기 싫다며 가 버리진 않을까 해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는데 계속해서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오는 바람에 별 효과가 없었다. 손에 감긴 것이 눈가의 연한 살과 마찰하며 자극을 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벨리아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들어 있던 중에도 종종 눈물을 흘리곤 했기에 깨어나자마자 저를 보고 우는 건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의 신경에 거슬리는 건 발갛게 부어올라 짓무른 눈가였다. 안 그래도 성한 곳이 별로 없는데 스스로 상처를 늘리고 있으니.
“그만.”
무의식적으로 계속 눈가를 문지르는 손을 잡아 내리니 잔뜩 젖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본다.
벨리아르는 손끝으로 그녀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작은 손길에도 쓰라린지 벨라는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봐, 계속 비비면 더 아프겠지.”
그는 능숙한 손길로 벨라의 손목에 난 상처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엉망이네.”
어떠한 감정이 묻어 나오지 않는 건조한 중얼거림이었다. 커다란 손이 벨라의 이마를 덮었다. 뜨겁게 달군 돌처럼 뜨뜻했다.
“지금 어때.”
상태를 묻는 말에 벨라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벅차게 일렁이던 눈물이 이미 뺨으로 난 길을 타고 후두둑 흘러내렸다. 그대로 드는 감상을 말했다.
“……눈물이 뜨거워요.”
“열 나서 그래.”
별로 다정한 말도 아닌데 괜스레 설움이 짙어졌다. 실컷 울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점점 아픔이 몰려왔다.
벨라는 또 느껴지는 아픔을 그대로 말로 옮겼다. 어떠냐고 물었으니까.
“머리도 무겁고…… 온몸이 아픈 것 같아요. 여기저기가 다 쓰라리고 아파요……. 그리고…… 추워요.”
온몸을 다쳤으니 당연히 온몸이 아프겠지.
작은 투정에 그는 짧게 답했다.
“몸살이야.”
정말 열이 끓는지 숨을 내쉴 때마다 더운 공기가 흘러나와 코끝을 적셨다. 가만히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던 벨라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공작님.”
“말해.”
“누가 저를 납치했어요…….”
“어쩌다가.”
“성으로 돌아가려고 마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뒤로 잘 생각이 안 나요. 그 사람들이 저를…… 누군가한테 넘기려고 했어요…….”
“누구한테?”
누구더라. 그들이 누군지 말을 했었나? 꿈처럼 조각조각 난 기억의 파편을 헤집었다. 그 사이에서 그들이 저를 두고 나누었던 대화는 선명했다.
“저 여자가 신성한 불꽃으로 정화될 거란 소리다. 마녀가 잡힐 테니 우린 당분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어.”
분명, 저를 화형시킨다고 했다.
그곳에서 도망치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천천히 불길에 휩싸인 채 끔찍하게 비명을 내지르고 있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누가 목을 죄는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친 거대한 공포가 온몸을 꽉 짓눌렀다. 어느새 벨라는 다시 숨을 꺽꺽대며 울고 있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저를, 저를……. 흐윽……. 불에 태운다고…….”
벨리아르는 손으로 그녀의 눈을 덮었다. 손바닥에 촉촉한 눈물이 스며들었다.
“저런, 안 좋은 소릴 들었구나.”
그녀의 눈을 가린 건, 무감한 얼굴로 안쓰럽다는 듯이 말하는 제 표정을 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눈을 감겨 놓은 손이 아래로 내려가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차분히 도닥였다.
“괜찮아. 제대로 숨 쉬어. 지나간 기억일 뿐이야.”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그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벨리아르는 희미한 미소를 건넸다. 보석 같은 눈동자는 이렇게 눈물에 잠겨있을 때 특히 아름답게 빛났다.
“그러니까, 혼자 밖에 나가면 그렇게 위험하잖아. 멋대로 외박까지 하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그건 나중에.”
벨라는 입을 꾹 다문 채 열심히 그를 눈에 담았다. 작은 움직임에도 놓칠세라 쫓다가, 언뜻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와 대화하는 지금이 좋았다. 이상하게 그의 곁에 있으면 깊은 늪에 잠기는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을 내맡기는 그 느낌이 오히려 편안했다.
“그놈들 혼내 줄까?”
대답하려 입을 벙긋거렸지만 물기에 목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벨라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기억해?”
“……네.”
“그래. 그럼 이제 다시 자.”
그가 일어서려는 듯하자 조급함이 일었다.
“공작님…….”
“자라니까.”
처음엔 그저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다가, 나중엔 꼭 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요.”
“아프다면서.”
“그래도…….”
차마 적극적으로 붙잡진 못하고, 소심하게 소매 끝만 부여잡은 손을 벨리아르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마디가 얇아서 거세게 쥐면 부러질 것 같았다.
“정신이 없으면 겁도 없어지나 보네.”
나직이 중얼거린 말에 벨라는 되려 손끝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그의 눈길을 끌었다.
어차피 자신이 원하는 건 안정된 삶이었다. 그저, 남들처럼 살아가는 평범한 삶 말이다.
이제는 정말 완전히 깨달았다. 바깥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건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제국이 무너지면 달라질까.
그것보단 다음 생을 기원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그러니, 제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저, 여기서 살고 싶어요…….”
벨리아르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찰나의 정적에도 초조해져 애원을 덧댔다.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는 제 소매를 붙잡은 벨라의 손을 떼어 내 이불 아래로 넣어 주었다.
“그럼 말을 잘 들어야지.”
가슴께에 있던 이불을 끌어 올려 목까지 덮어 주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답답하게 몸을 옥죄었다.
“자.”
“……네.”
짤막한 지시에 벨라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공작의 발아래 엎드려 그가 주는 평온에 몸을 맡기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는 결코, 남의 손에 저를 던져 주진 않을 테니까.
그런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