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에릭은 땅에 널브러진 술병의 잔해를 발로 짓이기며 낮게 혀를 찼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리 술판이라니. 기본이 안 되어 있었다.
“히익!”
그의 시선이 닿자 줄줄이 포박되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중 한 명이 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난데없이 산채를 쳐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 놓은 그들의 손길에 자비란 없었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즉시 목을 그었다. 눅진한 술 냄새 사이로 피비린내가 짙게 피어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같이 얘기하던 동료의 머리가 땅을 굴러다녔다. 눈도 감지 못한 채 목이 잘린 그 모습을 보자 울분이 치밀면서도 공포에 몸이 억눌려 의지를 잃고 떨어댔다.
에릭의 예리한 칼끝이 남자의 목으로 겨눠졌다. 괜히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재수 없게 걸린 것이다.
“마녀가 있는 곳을 말해.”
남자는 ‘마녀’라는 말에 여자 둘을 떠올렸다. 한 명이 있는 곳은 절대 제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다른 한 명은…… 아까 도망친 뒤로 아직 찾지 못했다.
“모, 모릅…… 컥!”
쓸데없이 충성심이 강한 건지, 멍청한 건지.
칼은 일말의 고민 없이 남자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짧은 단말마를 흘린 남자는 제 동료처럼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에릭은 지금 상당히 짜증이 치밀던 참이었다. 어디에 쥐새끼처럼 꼭꼭 숨어 있는지 마녀는 나오지 않고, 제 주인의 물건 또한 보이지 않았다.
처음 산채로 들이닥쳤을 때 남아 있는 인원이 별로 없는 데다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한 것을 보니 아마 도망친 듯싶었다.
마녀를 찾는 것이 우선일까, 아니면 주인의 물건을 찾는 것이 우선일까.
에릭이 잠시 고민하던 중, 수색을 나갔던 자들이 산채로 돌아왔다.
“이, 이게 대체……!”
무리가 처참한 산채의 광경을 보곤 경악하며 곧바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사이, 무리의 선두에 서서 에릭의 얼굴을 확인한 절름발이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다, 당신은…….”
에릭은 제 앞에서 얼어붙은 절름발이를 가늘어진 눈매로 내려다보았다.
게일 발로트.
마녀를 섬기는 집단의 수장이었다. 지난날, 에릭이 성으로 잡아 오고 벨리아르가 직접 일을 지시한 자이기도 했다.
“약속한 시각보다 조금 이르긴 한데,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물론 약속한 장소는 이곳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곳을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기에 게일은 약속 장소를 일부러 먼 곳으로 잡았다.
그러니, 공작의 사람이 절대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소리다. 그것은 곧 끝을 의미하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 역시 그러했다.
“약속한 것을 받으러 왔다.”
에릭의 요구에 게일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직 도망친 여자를 잡지 못했는데. 빠른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었지만 머리가 굳어 잘 돌아가지 않았다.
“부, 분명…… 저희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공작은 마녀만 넘기면 자신들에겐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마침 눈이 보라색인 여자를 발견했기에 일레인 님 대신 그 여자를 넘기려고 했는데……. 그 여자가 도망치는 바람에 일이 단단히 틀어져 버렸다.
“그건 너희들이 약속을 지켰을 때 얘기지. 그래서, 마녀는 어딨지?”
집요하게 마녀의 존재를 묻는 탓에 게일의 뒷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신들이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뒷골목에서 도적질이나 하며 전전하던 자들로 어찌 정예로 훈련받은 기사들을 이길 수 있겠나.
게일은 더 타격이 커지기 전에 상황을 받아들이고 수습해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잠시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모두 무기를 거두고 물러서라!”
그러나 에릭의 눈엔 그저 짓밟힌 벌레가 조금 더 살아 보려고 발악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녀는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그게……. 잠시 문제가 좀 생겨서……. 어,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쓰레기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고, 자신은 그저 주인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될 뿐이다.
에릭이 게일을 지나쳐 산채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눈에 보이는 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사이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뜻을 알아챈 기사들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막무가내로 열어 본 곳 중엔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체가 널브러진 곳도 있었다. 마녀랍시고 마을 사람들을 잡아다 기괴한 주술을 행한 흔적이었다. 같잖은 짓거리였다.
“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게일이 기겁하며 에릭을 만류했지만 그는 딱히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참혹한 광경을 보았으나 에릭은 전혀 동요 없이 다른 건물을 뒤졌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제 주인의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에 있었다.
에릭의 무자비한 손길이 지하를 가리고 있던 문에 닿았다. 그 앞은 차마 정리하지 못한 핏자국이 그득했다.
에릭은 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을 발로 짓이겨 보았다. 누구의 피일까. 아직 비릿한 냄새가 가시질 않은 것을 보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게일이 옆에서 우물쭈물하며 식은땀을 흘려 댔다. 어차피 들통날 일이니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는 게 우선이었다.
딱 봐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게 보여 에릭은 낮게 숨을 내쉬곤 문을 열어젖혔다. 새까만 어둠 속에 잠긴 계단을 고민 없이 밟아 내려갔다.
이런 어둠에 익숙한 에릭의 눈엔 계단에서 지하까지 이어진 핏자국이 확연히 보였다.
음습한 지하로 내려가니 한 개의 문이 있었다. 그 안엔 누군가 의자에 묶여 있었는지 바닥에 피로 물든 밧줄이 흩어져 있었다.
에릭은 밧줄을 집어 들어 가만히 살펴보았다. 수많은 가닥이 차례차례 끊어진 행태를 보니 날카로운 것으로 단번에 잘라 낸 건 아니었다. 밧줄의 단면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던 에릭이 나직이 헛웃음을 흘렸다.
“……도망을 가셨네.”
에릭이 중얼거린 소리에 게일이 지레 놀라며 다급히 외쳤다.
“차, 찾고 있습니다! 숲이라서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최대한 타이밍 맞게 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작은 아가씨를 너무 얕본 모양이다.
험한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그 가냘픈 몸으로 어찌 도망가셨을까. 평생을 마녀로 쫓겨 도망 다닌 경험 덕분인가?
에릭은 성의 아가씨를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삼켰다. 이 정도 피를 흘렸다면 필시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곧 잡혀 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면, 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흘리게 했다는 거겠지. 힘없는 여자애 하나 똑바로 간수 못 해선.
에릭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게일을 쳐다봤다.
“마녀에 대한 충성심이 참 대단한가 보네.”
에릭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비아냥거렸다. 게일은 그가 자신들이 마녀를 빼돌린 것으로 생각한다고 단정 지었다. 이럴 땐 그저 발을 빼는 것이 답이었다.
“……저희도 마녀를 경멸합니다! 하지만 하도 극악무도해서 어쩔 수 없이……. 저, 저흰 그저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하찮은 변명을 곱씹던 에릭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에릭의 시선이 게일을 지나쳐 문 너머로 향했다. 바깥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게일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발 더 이상 일이 틀어지지 않길 바라는 모습이 불안한 표정으로 선연하게 드러났다. 에릭은 그 불안을 조금 달래 주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 도망친 마녀는 내가 무사히 잡아 왔으니.”
에릭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게일의 표정이 기대로 펴지는 것을 보며 그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개새끼가 주인을 닮아 가네.”
언젠가 누가 했던 말이 조금 공감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제 주인에게 이런 방식의 일 처리밖에 배우지 못했다. 딱히 불만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이거 놔! 놓으라고――!”
날카로운 소리가 좁은 계단에 부딪혀 안쪽까지 흘러들었다. 제법 익숙한 목소리인지, 잠깐이나마 희망이 들어찼던 게일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기사들에게 붙잡힌 마녀가 꼴사납게 질질 끌려들어 왔다. 그 모습을 확인한 게일의 얼굴이 무너져내렸다.
“이, 일레인 님……!”
검은 머리의 여자가 기사들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음에도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질렀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을 마녀라고 칭하며 사람들을 홀려 이런 집단까지 만들더니, 정말 제게 무슨 힘이라도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기껏 해 봐야 힘없는 마을 사람들을 잡아다 해괴한 짓거리나 해 대는 주제에.
짧은 순간, 게일의 얼굴이 벽으로 처박혔다.
“커헉!”
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게일은 제 뒷목이 에릭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단단한 손이 가하는 힘이 워낙 강해 저항하려 버둥거릴수록 벽에 짓이겨지는 고통만 더해질 뿐이었다.
“끄윽…….”
에릭의 시선이 일레인에게로 향했다. 형형하게 빛내며 저를 죽일 듯이 쏘아보는 눈동자는 파란색보다는 조금 더 짙은 남색이었다.
이리 어두운 곳에서 언뜻 보면 보라색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에릭은 짧게 한숨을 내쉬곤 코가 부러져 피를 질질 흘리는 게일을 향해 읊조렸다.
“그러게, 잡아 오랄 때 제대로 잡아 왔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정말, 인간들은 신의 손아귀 안에서 한순간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