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담에서 뛰어내렸다. 그 바람에 하필 원피스 끝이 덩굴에 걸려 부욱 찢어졌다. 아랫단이 길게 찢겨 여차하면 뛰다가 걸려 넘어질 것 같았다.
쫘악――!
벨라는 너덜너덜해진 아랫단을 아예 찢어 내버렸다. 게다가 밤이라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아 뛰어내리며 발목을 살짝 접질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쫓아오는 사람들은 차마 가시덩굴을 넘어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담 앞에서 잠시 우물쭈물하던 무리는 결국 입구 쪽으로 빙 돌아 그녀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도망갈 시간을 벌었다.
겉옷과 후드가 있긴 했지만 종아리를 덮던 원피스가 짧아지니 풀이며 나뭇가지에 다리가 마구잡이로 쓸렸다. 하지만 잡히면 고통스럽게 불에 타 죽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지금, 그런 자잘한 상처에 아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하아, 하아……!”
벨라는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이를 악물고 달렸다. 깊은 숲속을 향해 뛰면 뛸수록 울창한 나무에 가려 달빛조차 스며들 틈이 없었다.
혹여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까 최대한 다리에 힘을 주고 뛰었건만, 그래도 높이 튀어나온 덩굴이 있었던 모양이다. 온 힘을 다해 뛰던 만큼 덩굴에 걸려 넘어질 때의 충격도 상당히 컸다.
“아흑…….”
손이며 무릎이 거세게 쓸려 따가운 통증이 확 느껴졌다. 순간 생리적인 아픔에 눈물이 울컥 차올랐지만 잽싸게 눈가를 훔쳤다.
여기서 울어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울음은 왠지 모르게 의지를 흩트려 놓았다. 꿋꿋하게 일어서 다시 달리려는데, 뒤에서 날아온 외침이 그녀를 꿰뚫었다.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주위를 샅샅이 뒤져!”
남자가 소리치는 소리에 벨라는 다급히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횃불을 든 무리가 여기저기를 비추며 범위를 좁혀 들었다.
이 정도로 가까이서 소리가 들린다는 건 이미 뛰어봤자 늦었다는 뜻이다. 오히려 섣불리 뛰어나갔다간 눈에 더 잘 띌 수도 있었다.
평균보다 몸집이 작으니 더욱 무시받기 쉬워서 그것도 큰 콤플렉스였는데, 이럴 땐 도움이 되었다. 남들이었다면 완전히 숨을 수 없었겠지만 벨라가 최대한 몸을 웅크리니 바위 뒤로 말끔히 가려졌다.
벨라는 최대한 숨소리를 죽인 채 사람들이 저를 찾지 못하고 지나쳐 가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도 여태까지 잡히진 않았으니, 무사히 도망가게 해 달라는 기도는 여신께서 들어주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부디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아야 할 텐데.
“어, 저기서 뭔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심장이 저 아래로 쿵 하고 곤두박질쳤다. 저를 발견한 건가 싶어 심장이 온몸을 울리도록 거세게 뛰어 댔다.
그러나 다행히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지지 않고 멀어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살짝 빼 확인해 보니 숲에서 들리는 다른 소리를 착각한 모양이었다.
무리가 잠시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벨라는 살며시 앞으로 나아갔다. 계속 이 자리에 있다간 언젠간 들키고 말 테니 최대한 움직여야 했다.
벨라는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정말 고약한 성정을 지녔을 거라고 생각했다. 늘 확신보다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온갖 불행은 다 떠안겨 놓고, 희미한 빛 한 줄기 내려주며 살라고 하니. 한낮 인간일 뿐인 저는 그저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뒤를 쫓는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어느 정도 달아났다 싶을 때,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여 보면 무리의 발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것으로조차 안심할 수 없어 벨라는 하염없이 숲을 헤쳐 갔다. 안락한 성에 파묻혔던 몸은 숲에 내던져지자 금세 옛 기억을 되찾았다.
벨라는 본능적으로 어렴풋이 들리는 물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갈증에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조금 더 가니 얕게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허겁지겁 물가로 다가가 급한 대로 목을 축였다. 다행히 그 주위론 나무가 별로 없어 하늘도 확인할 수 있었다. 벨라는 곧바로 별자리를 찾아 방향을 잡았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딱 북쪽이었다. 지금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오로지 공작의 성뿐이었다.
어떻게든 거기까지만 가면, 그러면 안전할 것이다. 혹여 거기까지 쫓아오더라도 공작의 손에만 닿을 수 있다면…….
벨라는 지금 순간, 벨리아르 공작의 손이 매우 간절했다. 답답하게 느껴지던 높은 성벽이 그리웠다. 제 발목을 감싸던 족쇄마저 몸을 꽉 옥죄는 아늑함을 주었다. 애초에 그의 손에 사슬을 건네준 건 자신이었다.
바깥엔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평범한 삶, 안온하고 소소한 행복, 그런 게 있다 한들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바보같이.
얼마나 그렇게 달리고 걷길 반복했을까.
숲 너머로 달빛이 스미는 걸 보며 홀리듯 움직였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을 제치고 나가자 잘 다듬어진 길이 나왔다. 공작의 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넓게 펼쳐진 길 사이로 고요한 바람이 나부꼈다. 마치 바람이 저를 미는 듯해 벨라는 그저 지친 몸을 떠맡겼다.
다리가 제 것이 아닌 것 같고, 온 몸뚱이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땅에 쓰러져 피곤에 절은 눈두덩이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긴 그가 없었다.
부디 그의 발끝에라도 엎어져야 집으로 잘 돌아왔다고 덜 나무라지 않을까.
또 어딘가로 도망가려 했다고, 그렇게 오해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니 반드시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 무엇도 놓을 수 없었다.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에 거대한 성문이 어렴풋이 비쳤다. 이미 한계에 부닥친 몸을 필사적으로 이끌었다.
“……?”
성문을 지키던 기사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벨라를 발견하곤 눈가를 찌푸렸다.
옷은 찢어지고 드러난 살결은 온통 피투성인 데다, 위태롭게 걸음을 내딛는 모습이 달빛 아래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방랑자가 길을 잃고 헤매다 여기까지 왔나 싶은 그때, 깊게 눌러쓴 후드 바깥으로 은빛 머리칼이 살풋 흩날렸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본 기사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아가씨?”
이 성에 속한 사람 중에 벨라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기사는 어디에서든 그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보호하라 지시받았다.
그녀가 점점 가까워지자 기사는 확신했다. 동시에 어제부터 하달받은 특별 지시를 상기했다.
“당장 문 열어!”
벨라가 오는 즉시 성문을 열 것.
그 안엔 여러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가 마차를 타고 복귀하든, 어쩌든. 기사는 당연히 마차를 타고 나갔으니 마차를 타고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저 지시는 따로 신분 확인할 필요 없이 바로 문을 열라는 뜻일까 정도의 고민이 들었을 뿐이었다.
거대한 문이 묵직하고 큰 소리를 내며 반쯤 열렸을 때, 기사는 얼른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겨우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벨라가 메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공, 작님……. 공작님은요……?”
탁하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가 성안을 느릿하게 훑었다. 초점 없이 움직이던 눈동자가 누군가를 발견하곤 선뜻 빛을 머금었다.
“공작님이요? 각하께선 지금…….”
“손 치워.”
서릿발처럼 차갑게 날리는 목소리에 기사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틀었다.
기척 없이 다가온 벨리아르 공작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둘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기사가 붙잡고 있는 그녀의 팔로.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했다. 손이며 다리도 피투성이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는 상태라 기사는 아주 짧은 순간 고민했다.
그러나 공작의 시선이 저를 향하는 순간, 기사는 곧바로 손을 놓고 벨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한 번 휘청이던 벨라는 넘어지진 않고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벨리아르는 무정한 태도로 그 모습을 방관했다. 조금 다가가 줄만 하건만, 지독히도 냉정한 모습에 지켜보는 기사가 도리어 마른침을 삼켰다.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벨라의 눈가로 물기가 일렁일렁 차올랐다. 그제야 접질린 발목이며, 온갖 데에 쓸린 몸이 쓰라린 고통에 아우성쳤다.
거의 다 가까워졌을 때, 벨라가 손을 뻗었지만 그는 붙잡아 주지 않았다. 애처로운 모습을 보며 나긋하게 지시할 뿐이었다.
“이리 와야지.”
아직 두어 걸음이 남지 않았나.
벨라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그 두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알고 있을까. 짧은 시간 스쳐 간 그 두 걸음이 세상의 어떤 길보다 험난하고 괴로웠음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걷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야 더 간절해지는 법이었다.
“공……작님…….”
벨라가 품으로 안겨 들자 짙은 숲 내음이 풍겼다. 초록을 머금은 풀잎이 짓이겨졌을 때의 그 향이었다.
벨리아르는 아주 오랜만에 그 짙은 녹음의 향을 맡았다. 오랜 심연 속에 파묻혀 있던 향은 좋지 않은 기억의 편린까지 모조리 끄집어냈다.
“벨라.”
그의 낮은 부름을 듣고서야 벨라는 가녀린 의식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