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뭐야, 너는 술 안 마셔?”
“대장이 여기 지키고 있으라고 했어요.”
문 바로 앞에서 얘기하는 건지 말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에이, 이 즐거운 날에 그러면 쓰나. 너도 가서 마셔. 내가 대신 보고 있을 테니까.”
“정말입니까?”
“그래, 그래. 아, 잠시만 있어 봐.”
순간 문이 벌컥 열리자 벨라는 의자에 기대어 축 늘어진 자세로 눈을 감았다. 아마, 문을 열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면 눈치챌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새까만 어둠 위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덧칠해졌다. 눈을 떠서 상황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눈을 굴리면 눈두덩이 위로 티가 날까 봐 최대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술 냄새가 훅 풍겼다. 눈을 감았음에도 샅샅이 살피는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정신을 잃었나 본데?”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 문을 대충 당겨 닫았다.
“가 봐. 내가 문 앞에 지키고 있을게.”
“감사합니다!”
곧이어 누군가 계단을 빠르게 밟고 올라가는 소리가 나더니 점점 잦아들었다.
“허, 참.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
새로운 문지기가 벽에 스르륵 기대어 앉는 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실눈을 떠 봤으나 눈앞에 보이는 인적은 없었다.
대신, 아까는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지금은 희미하게 열려 있었다. 새어 나가는 소리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간간이 의자가 삐걱대는 소리에도 유의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을 텐데.
이러다 약속 시간이 되어 자신을 데리러 온다면 그땐 정말 끝이었다. 지금은 문밖에 문지기 한 명이지만, 두 명 이상이라도 되는 순간 가능성은 없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스며드는 바깥 공기에선 희미하게 풀 내음이 났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곳 같으니 이곳은 아마 숲속일 가능성이 컸다.
숲속에서 도망치는 건 나름 자신 있기에 우선은 밧줄을 풀고 빠져나가는 게 관건이었다. 밧줄을 의자에 문지르면서도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 밧줄을 푼다고 과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괜히 그러다 붙잡히면 상황이 더 악화될 텐데.
그래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신이 자신에게 준 선택지는 늘 가혹하기만 했다.
벨라는 울컥 치솟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필사적으로 밧줄을 문질렀다. 밧줄이 점점 손목의 생채기를 파고들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집념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비벼 댔을까, 절대 끊어질 것 같지 않던 밧줄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끊어졌다. 느슨하게 풀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진 밧줄은 반쯤 피로 물들어 그 광경이 처참했다.
밧줄을 풀었다고 안도하며 숨을 고를 시간조차 없었다. 벨라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몸에 묶인 밧줄들을 최대한 조용히 풀어 냈다.
동시에 주위를 샅샅이 살피며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예를 들면, 최대한 단단하고 그녀가 한 손으로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것 말이다.
네모난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올려져 있는 게 많았다. 벨라는 살짝 열린 문 틈새를 주의하며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발을 떼는데, 바깥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보니 밖에 있던 문지기가 깜빡 잠들었는지 우렁차게 코를 고는 소리였다.
벨라는 다시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다가갔다. 짐승의 피가 가득 채워진 양동이에서 역한 냄새가 끼쳤다. 소매로 코를 가리고 테이블 위를 세세히 살폈다.
유리 같은 건 너무 쉽게 깨져 버리니 안 되고, 흙으로 굳혀 놓은 것도 별로 파괴력이 없고. 그녀의 눈에 확 들어온 건 구리로 만든 작은 조각상이었다.
손에 쥐기에 크기도 적당하고 길쭉하니 휘두르기에도 딱이었다. 적당히 무게감이 있어 위력이 약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벨라는 조각상을 손에 단단히 쥔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문과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너무 세게 뛰는 나머지 터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문 가까이 다가갔을 땐 혹여 제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싶어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손바닥으로 세찬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긴장으로 가득 찬 떨림이 손끝까지 전해지자 더욱 조각상을 꽉 쥐었다. 송골송골 배어 나오는 땀 때문에 조각상을 놓칠까 불안했다.
시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 망설이는 이유는, 여태껏 숱하게 도망쳤지만 누군가를 해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살려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조각상을 힘껏 휘둘러야 한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울컥 두려움이 치솟았다.
벌써부터 다리가 덜덜 떨리는데 과연 제대로 뛸 수나 있을까.
벨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나약한 생각을 파묻으려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그것도 어머니처럼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천천히, 고통스럽게.
순간 다짐하며 문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벌컥 열어젖힐 용기는 없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열었다.
벽에 기대어 있는 남자는 깰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벨라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남자를 지켜봤다. 목구멍이 꽉 막혀 침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자고 있으니까 그냥 도망쳐도 되지 않을까. 굳이 해칠 필요 없이…….
안일한 생각이 솟구쳤고,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다급히 발을 뗐다.
그러나 순간 무언가 발목을 선득하게 잡아챘다. 어느새 눈을 뜬 남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뭐야――!”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갔다. 솟구친 공포가 몸을 집어삼킨 것처럼 저도 모르게 조각상을 휘둘렀다.
“끄윽……!”
예상치 못한 공격에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괴로운 신음을 내지를 뿐이었다. 남자는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벨라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조각상을 쥔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렸지만 하도 세게 힘을 준 탓에 떨어트리진 않았다. 누군가를 해한 건 처음이라 울컥 겁이 났다.
“이, 이익……!”
남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제야 벨라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곧바로 남자를 뒤로한 채 계단을 뛰어올랐다. 조각상이 엄청난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꼬옥 쥔 채였다.
“오늘따라 술맛이 좋군!”
“일이 술술 풀리니까 술도 술술 넘어가는 거지!”
“그렇다고 너무 많이 마시진 마. 동이 트기 전에 출발해야 하니까.”
바깥으로 나오니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랗게 불을 피워 놓고 남자들이 한데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벨라는 황급히 몸을 낮추어 중간중간 놓인 궤짝 뒤로 몸을 숨겼다. 혹여 한밤중에 제 머리카락이 눈에 띌까 싶어 후드도 깊게 눌러 썼다.
잠시 숨을 고르며 상황을 살피던 벨라는 기어가다시피 하며 구석진 곳으로 몸을 옮겼다. 건물 옆이라 상대적으로 빛이 덜 들어와 웅크려 있으면 잘 보이지 않을 곳이었다.
허술하지만 나름 벽이 둘려 있어 빠져나갈 곳이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입구로 대놓고 뛰어가기엔 너무 눈에 띄는 데다 들킬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어찌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무렵, 그녀가 도망쳤던 지하 입구에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뛰쳐나왔다.
그녀에게 조각상으로 얻어맞은 문지기였다. 그는 피가 흘러내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필사적으로 외쳤다.
“여, 여자가 도망, 도망을……! 끄흑!”
중간에 바닥으로 엎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말을 잇진 못했지만, 신나게 술판을 벌이던 무리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한 장면이었다.
“뭐? 어쩌다가! 어, 언제!”
“계집애 하나 제대로 못 지키고 있어? 그 꼴은 대체 뭐야!”
큰일 났다. 남자들이 그녀가 숨어 있는 곳 가까이 우르르 몰려왔다.
궁지에 몰리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벨라는 최대한 숨죽이며 주위를 살폈다.
저렇게 여러 명을 조각상으로 상대할 수도 없으니 옆에 놓아 두고 굴러다니는 빈 술병을 주워 들었다. 이럴 땐 최대한 요란하게 잘 깨지는 것이 필요했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일단 안쪽을 찾아봐야…….”
벨라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최대한 멀리 술병을 던졌다.
쨍그랑――!
다행히 예상대로 술병이 큰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주었다.
“저기다! 저기로 갔다!”
“당장 쫓아가!”
“혹시 모르니 너흰 여기 남아서 안을 살펴보도록 해!”
무리는 제법 일사불란하게 각자 역할을 맡고 흩어졌다. 그래도 상당수가 술병이 깨진 곳으로 갔으니 아주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싶은 순간, 담 아래로 돌아다니는 쥐 몇 마리가 보였다. 작은 쥐들은 최대한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곳으로 다닐 것이다.
벨라는 쥐가 사라지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쥐들을 따라가다 보니 비교적 인적 드문 구석에 다다랐다. 담이 조금 높긴 했지만 다행히 옆에 버려진 궤짝이 몇 개 있었다.
벨라는 고민 없이 궤짝을 옮겨 놓고 발을 디뎠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높이였다. 담 위쪽에 가시덩굴이 감겨 있긴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가시덩굴에 손이며 옷이 마구 찢겨 엉망이 되었으나 이 담을 넘어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끙끙거리며 담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을 무렵, 그녀를 발견한 남자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저기! 저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