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다행히 음식점에서 나와 다른 방향으로 가 보니 어제 마차에서 내렸던, 익숙한 길이 보였다. 벨라의 걸음이 더욱 바빠졌다.
저 멀리 낯익은 마차가 보이는 듯했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후드를 살짝 젖히니 차디찬 겨울바람이 머리를 식혀 주었다.
마차를 발견한 것까진 좋으나, 정작 마차를 끌 마부가 보이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텐데.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시간이 너무 이른가…….”
마부도 온종일 그녀를 기다릴 수는 없을 테니 어딘가에서 잠을 청했을 것이다. 제법 이른 아침이라 조금 기다려 봐야 할 듯싶다.
아무도 마차를 보고 공작가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벨라는 마차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벗었던 후드도 다시 눌러 썼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이리 꽁꽁 싸매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는 탓이었다.
그래도 혹여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고 잡으러 오진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기사는 어쩌다 죽은 걸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연관되어 있을까 봐 초조했다. 벨라는 습관처럼 입술을 짓이기며 땅을 툭툭 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어딘가 뛰쳐나가 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숨을 내쉬며 땅 위로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을 덧그렸다.
공작님이 화를 내시려나, 아니면 잘 놀고 왔다고 칭찬을 해 주실까.
아마 후자의 가능성은 좀 낮아 보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벨라가 고개를 드는 순간, 눈앞이 번쩍하며 새하얗게 변했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둔한 아픔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온몸에 힘이 빠지며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눈 색을 보니 확실합니다.”
“누가 보기 전에 어서 옮겨.”
멀리 보이던 마차가 빠르게 흐릿해졌다. 낯선 사람들의 말소리가 웅웅대며 귓가에 울렸다. 거기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 * *
일정하게 떨어지는 물소리가 흐릿한 정신을 깨웠다. 주위의 소리가 점점 들리기 시작하니 머리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의 감각이 하나씩 깨어나는 것이다.
어딘가에 묶여 있는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이 아우성치는 바람에 절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저들끼리 대화하던 남자 두 명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어, 저 여자 깼나 봅니다.”
흐릿한 시야였지만 둘 중 한 명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어젯밤에 골목에서 자신을 위협하던 그 남자였다.
역시, 단순히 여행자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자신을 노린 것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가까이 다가와 쪼그려 앉더니 씩 웃었다.
“거봐. 결국 이렇게 잡혀 올 건데 뭐 하러 그리 발악을 했어?”
톡톡 뺨을 치는 손길이 소름 끼치도록 기분 나빠 고개를 홱 돌렸다. 움직일 수가 없다 했더니, 의자 뒤로 손이 묶여 있었다.
“새침하게 굴기는.”
“근데 정말 눈이 보라색이네요?”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확연한 보라색은 처음 보는데…….”
“……혹시 정말 마녀가 아닐까요?”
벨라는 ‘마녀’라는 소리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마녀라면 얘기만 나와도 진저리쳐질 만큼 지긋지긋했다.
“입 닥치지 못해? 혹여나 일레인 님 귀에 그 말이 들어가면 넌 저기 걸린 사슴 신세가 될 거다.”
흘긋 옆을 보니 정말 사슴의 사체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아래에 받쳐 놓은 양동이로 짐승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속이 울렁거릴 만큼 비릿한 냄새의 정체였다.
“그,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죠, 뭐.”
“근데 참 아깝긴 해……. 괜히 눈동자 때문에 재수 없게 잡혀 와서. 다른 데서 만났다면 조금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아가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순간 남자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남자는 갑자기 일어서며 뒤에 있던 수하에게 손짓했다.
“야, 너 밖에 좀 지키고 있어라.”
“네? 밖을요?”
“그래, 얼른!”
남자가 제 바지춤을 더듬으며 재촉했다. 떨떠름해하면서도 문밖으로 향하는 수하의 눈에서도 미세한 아쉬움이 겉돌았다. 남자가 손을 뻗자 벨라는 남은 힘을 쥐어 짜내 저항의 몸짓을 보였다.
“흐윽……. 이, 이러지 마세요……. 제발…….”
그래 봤자 묶인 몸을 들썩이며 고개를 세차게 내젓는 것뿐이었다. 불행히도 남자의 음흉한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 그렇게 겁에 질려 있으니까 내 마음이 더 동한단 말이야.”
발목도 묶여 있긴 했지만 의자에 고정되어 있진 않았다. 두 발로 힘껏 남자를 걷어차 보려 했지만 쉽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남자는 그녀의 다리를 짓누르며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금방 끝나니까 가만히 있어!”
그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절뚝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가 묘한 기시감을 가져다주었다.
“당장 그 손 치우지 못해?”
그는 성난 얼굴로 지팡이를 들어 벨라에게 달라붙은 남자를 거세게 후려쳤다.
“악! 대장!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요!”
“그러다 흠이라도 나면 네놈이 책임질 거야? 어?”
“아, 어차피 넘기면 그만인데 그 전에 맛 좀 보면 어떻습니까!”
“그러다 그분 심기 뒤틀리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사람들 앞에 세울 거니 최대한 흠 없이 데려오라고 하셨단 말이다!”
남자들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머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벨라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누구라도 들어오지 않았다면……. 뒤에 이어졌을 상황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저들은 아마 누군가에게 자신을 넘길 생각인 듯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세울 거라는 건 무슨 말일까.
문득 소만에서 보았던 노예 시장의 모습이 떠올라 등줄기가 서늘하게 굳었다.
설마, 그런 곳에 팔아넘기려는 건 아니겠지……?
더불어 턱으로 닿던 채찍의 촉감마저 생생했다. 지친 몸은 나쁜 기억들을 고스란히 떠올리며 공포의 늪으로 이성을 밀어 넣었다.
“……그분은 대체 누굽니까? 누구길래 대장이 이리 벌벌 떠냐고요. 일레인 님까지 다른 데로 옮기시고.”
그 말에 절뚝거리며 걷던 남자는 제 왼손을 감싸 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네놈이 알 필요 없고, 저 여자는 일레인 님 대신이니 되도록 건들지 마.”
“일레인 님 대신이라면…….”
“저 여자가 신성한 불꽃으로 정화될 거란 소리다. 마녀가 잡힐 테니 우린 당분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어.”
벨라는 순간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남자가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저건 분명 화형을 뜻하는 소리다.
벨라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럼 이들은 기사단의 의뢰를 받고 마녀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었나 보다. 공포에 질린 턱이 주체하지 못하고 벌벌 떨렸다.
“그분은 언제 오신답니까?”
“조금 더 있어야 해. 이리로 직접 사람을 보내신다고 했으니 너도 가서 술이나 마셔. 오늘이 마지막 밤이 될 거다.”
“예, 예. 가서 축배를 들어야죠. 그 귀하신 분께 보상도 두둑이 받을 테고, 이 지긋지긋한 마을도 떠나게 되는 거니!”
이미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새까만 재가 되어가던 어머니의 모습과 귀를 찢는 처절한 비명,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눈과 귀를 가렸다.
불에 타 죽는 건 절대 싫다. 죽어도 어머니처럼 그렇게 고스란히 고통을 느끼며 괴물 같은 모습으로 죽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공작의 손에 죽는 것이 낫지.
벨리아르 공작을 떠올리자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여기서 이리 벌벌 떨고 있어 봤자 제게 다가올 미래는 뻔했다. 결국 어머니처럼 화마에 바스러지고 말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곧이어 절름발이는 그녀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곤 방을 나갔다. 그가 나오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수하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붙였다.
“대장, 저도 술 좀 마시면 안 됩니까? 어차피 저렇게 묶여 있으니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어차피 약속한 시각도 거의 다 돼 가니 조금만 더 고생해.”
벨라는 문밖에서 나는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절름발이의 특이한 걸음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삐거덕거리는 계단 소리가 점점 위쪽으로 올라갔다. 짐승의 피가 양동이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미세한 울림을 퍼트리는 걸 보니, 여긴 필시 지하였다.
우선 몸을 결박하고 있는 밧줄을 풀어야 뭐든 방법이 생길 텐데. 주위를 둘러봤지만 밧줄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일렀다. 벨라는 묶인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다 나무 의자의 모서리에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이리저리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벨라는 필사적으로 모서리에 밧줄을 비볐다.
얇은 지푸라기로 세세하게 엮은 밧줄은 뭉툭한 나무 모서리에 쉽게 잘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느리지만 분명 미세한 가닥들이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수많은 가닥을 끊어내면 밧줄은 결국 풀리고 말 것이다.
벨라는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열심히 밧줄을 비볐다. 밧줄에 균열이 생길수록 그녀의 손목도 같이 쓸려 생채기가 났다.
아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기에 그저 밧줄을 끊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간간이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오면 흠칫 긴장했다가 다시 움직이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몸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추운 날씨에 옷까지 땀에 젖어 들어가다 보니 오한까지 들었다.
그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벨라는 잔뜩 긴장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마구잡이로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