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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49)화 (49/180)

49화

“부관을 믿나? 그리 목숨을 걸 만큼.”

“예. 절대 하지 않은 일이니 당당한 겁니다.”

섣부른 의심은 하지 않는 로드릭의 정직함이 벨리아르에겐 꽤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가 알기로 페이트 기사단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따지자면 기사단장인 루크보다 로드릭의 실력이 더 출중했다.

하지만, 루크가 물러나거나 죽더라도 로드릭이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교황이 바뀌지 않는 한,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저 올곧은 정직함이다.

“대신, 다른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벨리아르는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가 무슨 조건을 걸어올지 약간은 기대되었다.

“각하의 의심을 이해해 드렸으니, 제 의심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주 멍청이는 아니네.”

이런 상황에서 실을 본만큼 득을 챙길 줄도 알고.

대개는 이렇게 조금만 압박해도 지레 겁먹고 본분을 잊어버리곤 했다.

“영애께서 어디로 출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오는 즉시 조사에 응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건, 저와 독대여야 합니다.”

“그러지.”

벨리아르는 로드릭의 비장한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동시에, 로드릭과 독대하며 그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벨라의 모습이 잠깐 뇌리를 스쳤다. 그의 눈매가 미세하게 틀어졌다.

“그럼 우선 그 기사를 내 눈앞에 데려와야겠지?”

“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 * *

해가 늦게 떠오르는 베른의 새벽은 밤처럼 깜깜했다. 그 와중에도 어렴풋이 스며드는 보랏빛이 곧 떠오를 해의 흔적이었다.

벨라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헬렌 할머니의 집을 빠져나왔다.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소란했던 골목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할머니의 도움이 감사해서 금화를 조금 올려 두고 나왔다. 할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무슨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몰랐다. 아니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

복잡한 골목길을 헤쳐 나오느라 꽤 애를 먹었다. 그 사이 조금씩 하늘이 푸르스름해지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 다가올수록, 부닥친 현실이 실감 났다.

“진짜 외박해 버렸어…….”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해야 물을 잘 닦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뿐이었다.

벨라는 습관처럼 뒤를 흘끗 돌아봤다. 누가 따라온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쯤 되니 정말 홀로 밖에 나온 것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했다.

그녀는 도저히 벨리아르 공작의 의도를 조금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체념과 동시에 다른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벨라는 깊게 후드를 눌러 쓰고 상점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잡화점 앞을 기웃거리다, 상점이 열리자마자 첫 번째 손님으로 들어갔다.

“……저, 지도도 파나요?”

“베른의 지도가 필요한 거요?”

“아니요, 제국 땅 전체가 나오는……. 아니다, 세계지도도 있을까요?”

이왕이면 가장 넓게 보고 싶으니까.

주인은 안쪽의 서랍을 열더니 돌돌 말린 지도 두 개를 꺼내 주었다.

“이건 제국의 지도고, 이건 세계지도요.”

잠시 고민하던 벨라는 오른쪽 지도를 가리켰다. 세계지도였다.

“이걸로 할게요.”

벨라는 지도를 사 들고 곧장 잡화점을 빠져나왔다. 당장 지도를 펴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곳이 편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잡화점 옆 골목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았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지도를 펼쳐 보았다. 너른 세상을 마주한 그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세계지도는 난생처음 본 것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륙들이 그녀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었다. 이 지도를 보기 전까진 블루벨 제국이 세상의 대부분인 줄 알았다.

제국 땅이 매우 넓긴 했지만, 자신이 알지 못했던 곳도 매우 많았다. 바다가 이리 넓은 줄도 처음 알았고. 그녀의 눈길이 ‘헤버튼’이라고 쓰인 곳에 잠시 머물렀다.

벨라는 쪼그려 앉은 채 한참이나 지도를 살펴보았다. 다리에 쥐가 날 때쯤 되어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벨라는 지도를 다시 돌돌 말아 품에 끌어안고 어디론가 향했다.

외곽 쪽을 향해 걷다 보니 말과 마차가 모여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도 많이 드나드는 것을 보니 역참이 분명했다. 주위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표를 파는 판매상이 다가왔다.

“어디로 갈 거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충동적으로 되물었다.

“그, 헤버튼으로 가는 건 얼마예요?”

“헤버튼이면 한 번에 갈 순 없고, 일단 빅센까지 가야 하오.”

빅센이라면 그녀도 알고 있다. 헤버튼에서 도망쳐 올 때 거쳤던 곳이었다.

벨라는 빅센까지의 요금을 듣곤 헤버튼까지 가는 데에 얼마가 드는지 계산해 보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충분하다 못해 넉넉하게 생활까지 할 수 있었다.

“빅센으로 갈 거요?”

남자가 다시 묻자 순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기서 그렇다고 답하고 빅센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타는 상상을 했다.

자연스레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도 제 목줄을 쥐고 있는 걸까. 스스로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은 의외로 금방 튀어나왔다.

그는 목줄을 길게 풀어줄지언정, 절대 먼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감사합니다.”

벨라는 다시 거리로 나와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아직 돈은 차고 넘칠 만큼 남아 있었다. 나가서 놀고 오라고 준 용돈이 너무 과했다.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가, 터덜터덜 걷다 보니 허기가 느껴졌다.

성으로 돌아가면 호화로운 음식이 양껏 준비되어 있겠지만, 이젠 그것이 너무 평범한 게 되어 버렸다. 오히려 이런 마을의 음식점이 그녀에겐 더 귀한 것이다.

벨라는 조심스럽게 한 음식점을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땐 조용해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식사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최대한 이목을 끌지 않도록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먹는 거로 하나 주세요.”

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전혀 특별한 것 없는, 채소와 고기를 넣고 끓인 말간 스튜였다. 성에서 먹던 음식과는 전혀 결이 달랐다.

숲에서 살 땐 이런 스튜를 먹는 것도 정말 부러웠었는데, 공작을 만난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 입 떠먹은 스튜는 별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기기엔 아깝고, 배가 고프기도 하니 천천히 먹고 있는데 음식점 안으로 어떤 남자가 소란스럽게 뛰어 들어왔다. 다급히 일행이 있는 테이블에 합석하며 운을 띄웠다.

“이보게, 소식 들었는가?”

그녀뿐만 아니라 음식점 안의 모든 사람이 그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무슨 일이길래 그리 호들갑이야?”

“저기 대장간 골목에서 시체가 발견됐다지 뭔가!”

“뭐? 설마 또 마녀의 짓인 거야?”

“근데 그 시체가 신전에서 파견 나온 기사라는군!”

마녀 얘기가 나오자 한 번, 신전의 기사라는 소리에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이젠 신전의 기사까지 건드려? 대체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러는지……. 이러다 정말 그 마녀가 나라 말아먹는 건 아닌가 걱정이네.”

사람들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에 마녀라는 존재를 만들어 내어 그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예언대로 마녀의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그녀는 전혀 제국의 존폐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나 이백여 년 전 일어난 거대한 전쟁으로 숱한 피를 흘린 제국민들은 아직도 마음속에 불안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핍박받는 것은 상당히 억울했다.

“페이트 기사단까지 건드렸으니 점점 영역을 확장하려는 게지. 정말 소만으로 넘어가야 하나 싶다니까.”

“이 사람아, 소만으로 넘어가면 뭐 먹고 살게!”

“어떻게든 살지 않겠는가. 마녀에게 죽임당하는 것보단 낫겠지!”

“이러다가 진짜 예언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

“재수 없게 자꾸 그런 소릴 입 밖으로 꺼내나! 그래도 공작님께서 조사하고 계신다는 소식이 있으니 금방 잡힐 걸세.”

“하긴, 우리 공작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는 왜 자신을 성에서 내보낸 걸까.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솟구쳤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구토감이 솟구치는 바람에 다급히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빨리,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찾아야 한다.

* * *

대신전에서 마녀를 잡기 위해 파견 나온 기사가 되려 마녀에게 죽임을 당했다. 포웬에서 베른으로, 며칠 뒤면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갈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온갖 감정들로 북받친 얼굴을 한 로드릭이 벨리아르의 앞에서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골랐다.

수많은 생각이 들 테지.

벨리아르는 기꺼이 그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각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로드릭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숱하게 드는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이 가여워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소식은 들었네. 아끼는 부관이었나?”

“……예.”

“상심이 커 보이는군. 아끼는 부관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끼는 부관을 제 손으로 처리해서인가?”

로드릭의 고개가 번뜩 들렸다. 건장한 중년의 남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치겠지만, 부관의 죽음에 대한 순수한 슬픔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각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목소리 낮춰. 감히 누구 앞이라고.”

“……송구합니다. 지금 감정이 격해져서…….”

참 좋은 상관이자, 그리 쓸모는 없는 상관이다.

전장에서도 저리 부관의 죽음에 대해 좌절하며 슬픔에 빠져 있을 것인가?

벨리아르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조소를 삼켰다. 로드릭의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는 영악한 인간보단 이런 순수한 인간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손안에 두고 부릴 때의 이야기였다.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군. 일단 쉬면서 마음 좀 추스르도록 해. 영애는 내가 찾아보도록 하지.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내 약속을 깰 생각은 없으니까.”

“……생각을 좀 정리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이런 모습 보여 송구합니다.”

“나가 봐.”

그러게 괜히 나서서. 말한 대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떠먹여 줄까.

벨리아르는 아직 식지 않은 찻잔을 들었다. 일렁이는 찻물 위로 벨라의 모습이 덧그려졌다. 이번엔 엇나가지 않고 제 영역 안에서만 얌전히 노는 모습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충분히 놀게 해 주었으니 이젠 착하게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지.

그는 뒤에 선 에릭에게 지시했다.

“오늘 밤에 마무리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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