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 순간, 옆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느닷없이 끼어든 목소리가 무거운 분위기를 와장창 깨 놓았다. 벨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왜 이리 늦나 했더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야? 이 할미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 할머니는…….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차마 기억을 되짚어 보기도 전에 할머니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춥다, 얼른 들어와!”
생각보다 할머니의 힘이 제법 셌다. 순식간에 집안으로 딸려 들어가고, 문이 쾅 닫혔다.
“……하, 할머니?”
할머니는 곧바로 잠금장치를 모두 걸어 잠갔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할매가 미쳤나! 당장 문 열지 못해?”
바깥에서 험악한 소리와 함께 문이 쿵쿵 울렸다. 그 소리에 벨라가 흠칫 놀라자 할머니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제야 할머니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났다. 낮에 정육점에서 편지 보내는 것을 도와준 그 할머니였다.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리길래 혹시나 해서 창문으로 봤지요. 저놈들 마을의 골칫거리예요. 특히 아가씨 같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 상대로 저런 나쁜 짓을 한다니까.”
그저 여행자라서 그들의 표적이 된 건 아닌 듯했다. 분명,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자세한 것들은 얘기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이걸 떨어트리고 가길래 돌려주려다가…….”
벨라는 손에 쥔 주머니를 꼭 그러쥐었다. 할머니는 그 주머니를 빼앗아 가더니 거침없이 열어 안을 확인시켜 주었다.
“저것들 수법이 뻔하지.”
돈이 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저 돌멩이만 가득했다. 속은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이야.
자괴감이 일었다. 이런 허술한 덫에 스스럼없이 걸려들고 마는 자신이 너무 싫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어차피 해가 뜨면 알아서 갈 거야. 아니면 저기서 밤새 저러고 있으라지. 저것들도 사람들 눈치는 보니까 계속 저러진 못해.”
“하지만……. 저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요. 오늘이 지나기 전에 가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드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나갔다가 저놈들한테 무슨 꼴을 당하려고! 어차피 해도 졌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요.”
“그래도요, 할머니…….”
벨리아르 공작과 바깥의 무리, 둘 중 어느 것이 공포가 더 심하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공작을 선택하겠다.
하지만 당장은 밖으로 나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단호한 음성으로 그녀를 얼렀다.
“이럴 땐 어른 말 듣는 거예요. 지금 아가씨 보내면 나도 마음 불편해서 잠 못 자요. 늙은이 꼼짝없이 밤새우게 하려면 그러든지.”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니 더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말대로 지금 밖에 나가는 건 말이 안 되긴 했다. 아직도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니요…….”
“여기 앉아 있어요.”
할머니는 지친 벨라를 식탁으로 이끌어 앉혔다. 할머니의 분주한 손길에 따뜻한 음식이 금세 완성되어 식탁 위로 올랐다. 뚝딱뚝딱 차려진 상을 보니 벨라는 더욱 염치가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해요.”
“죄송하긴, 뭘. 이거 어차피 아가씨가 사 준 고기예요. 그러니까 부담 없이 먹어도 돼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러고 보니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밥 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 아마 그가 알았다면 또 무섭게 질책했을 것이다.
그 매서운 표정을 떠올리며 토마토가 들어간 고기 스튜를 한 입 떠먹었다. 언젠가 먹어 본 듯한 익숙한 맛이 입안으로 한가득 퍼졌다.
“입맛에 맞아요?”
“네, 너무 맛있어요. 근데 이거…… 남부식 스튜 아니에요?”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주던 것과 맛이 비슷했다. 그녀가 알기론 남부 쪽에서 생산되는 향신료가 들어가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선 쉽게 먹을 수 없는 맛이었다. 할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남부에서 왔어요?”
“어릴 때…… 잠깐 살았었어요.”
“내 고향이 세르타예요. 남부 음식이라 아가씨 입맛에 잘 안 맞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세르타라면, 벨라의 고향이기도 했다. 고향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립고 좋은 기억만 떠오르는 건 아니기에 벨라는 세르타에 대한 말은 아꼈다.
그 후로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헬렌 할머니는 작년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살아가는 삶에 적응하는 중이라고 하셨다. 아직은 힘들지만 천천히 배워 가는 중이라고.
식사를 마친 후 할머니는 그녀에게 포근한 다락방을 내어주었다.
“우리 손녀가 쓰던 방이에요. 오늘 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자요.”
할머니는 걱정 없이 푹 자라고 했지만, 걱정이 습관인 그녀에게 그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그제야 할머니가 제 눈을 보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곧 새로운 불안을 몰고 오려 했지만, 벨라는 그 전에 더욱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할머니가 건네준 친절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층 짙어진 어둠 위로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왜 자신을 홀로 밖에 내보낸 것일까. 정말 순수하게 놀다 오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혹시, 신전에서 나온 기사들이 성에 머물고 있으니 일부러 자신을 밖으로 내보낸 건 아닐까.
어쩌면…… 당분간 돌아가지 않는 게 그가 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안도하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 *
로드릭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들은 소식은, 베일리 남작 영애가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순한 외출이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겠지만, 이렇게 하루를 넘긴다는 건 매우 수상한 일이었다.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들어도 의심할 법한 상황 아닌가.
조사단의 본분이 있으니 더 이상 결단을 미룰 순 없었다. 로드릭은 차분히 아침 식사를 끝마친 뒤, 벨리아르 공작을 찾아갔다.
“베일리 남작 영애를 심문하게 해 주십시오. 고발장의 당사자인 만큼 자세한 조사를 진행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예상대로, 벨리아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눈보라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휘몰아쳤다.
“로드릭 경, 내가 지금 좀 심기가 불편한데.”
“……저번에 분명 약조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지. 나도 내가 한 말을 꼭 지켜 주고 싶은데.”
벨리아르가 잠시 말을 멈추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갈한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아가씨가 사라져서 조금 많이 심란하거든.”
그가 먼저 벨라의 부재를 인정했다. 로드릭은 끊임없이 그를 관찰하고 숨은 의중을 파헤치려 애썼다. 정말 남작 영애의 독단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이것 또한 그가 설치해 놓은 덫인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습니까? 저희를 붙잡아 두고 영애를 빼돌리시려고요.”
“경의 말은, 지금 내가 벨라를 일부러 숨겨 놓고 내어주지 않는다는 건가?”
“지금 당장 그 영애를 제 눈앞에 데려오지 않으시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수도로 돌아가 성하께 사실대로 보고하고 제대로 군사적인 절차를 밟겠습니다. 그땐 이리 정중하게 부탁드릴 수 없을 겁니다.”
벨리아르는 정말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비쳤다.
“나는 누가 내 물건에 손대는 걸 아주 싫어해. 그래서 성안에 안전히 숨겨 둔 것인데…… 마침 경과 신전의 기사들이 내 성에 머물고 있군.”
가뜩이나 눈 색이 특별해서 탐내는 것들도 많은데.
벨리아르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 ‘탐내는 것들’의 대표적인 게 신전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로드릭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무언가 초점이 엇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우리 아가씨가 사라졌으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각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이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나도 나로서 든 생각을 한번 말해 볼까 해.”
붉은 눈동자가 로드릭을 정확히 관통하는 순간, 둘 사이를 맴돌던 공기가 뒤집혔다.
“내 아가씨를 어디에 숨겼지?”
나른하게 죄어 오는 물음에 로드릭은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역공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각하, 그건 지나치게 엇나간 생각이십니다. 설마 지금 저희가 영애를 잡아가기라도 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분명 처음부터 경에게 협조하겠다 약조했고, 경은 지금까지 이렇다 할 조사를 하지 않았어. 그러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내게 찾아와 영애를 내놓으라고 하니, 나로서 드는 합리적인 의심 아닌가?”
로드릭은 기가 막혀 잠시 말을 잃었다. 저로서는 마냥 터무니없는 의심이긴 했지만, 입장을 바꿔 보면 그 역시 합당한 의심이다.
특히 공작은 신전에 매우 커다란 반감을 품고 있으니, 정말 영애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았다면 조사단을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고발장에 따라 이곳에 마녀로 의심되는 자를 잡으러 온 것은 맞지만, 무작정 공작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정말 그 영애가 마녀가 맞는지도 조사가 우선시돼야 하고. 모든 것을 정해 놓은 틀에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 영애가 의심되어 저희 기사를 한 명 붙여 놓았습니다.”
순순한 자백에 벨리아르는 낮은 조소를 흘렸다.
“요즘 신전에서는 그런 식으로 조사를 하는가 보군.”
“그 기사를 데려와 증언하게 하면 각하의 의심이 조금 풀리시겠습니까?”
“그 기사가 거짓으로 둘러대면 그만인 것이지.”
“만약 나중에라도 그 기사의 증언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벨리아르는 입안으로 조소를 삼켰다. 저리 쉽게 목숨을 내걸면, 기꺼이 취하고 싶어진다는 걸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