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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47)화 (47/180)

47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여서 호기롭게 시작한 것이었는데, 다 만들고 일어서니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매듭 장식 하나 만든다고 대체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은 건지. 그래도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았다. 물론 파는 것과는 살짝, 아주 살짝 차이가 있긴 했지만.

“이것도 하나 주세요.”

벨라는 에릭의 것도 잊지 않고 샀다. 아무래도 같은 것으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에릭에게 줄 건 조금 더 소소한 것으로 골랐다.

겨울이 불쑥 다가온 베른은 덩달아 해가 매우 짧아졌다. 빠르게 어스름이 내려앉는 거리를 보며 벨라의 마음도 덩달아 급해졌다.

실컷 놀고 나니 뒤늦게 걱정이 밀려왔다. 지금 마차를 타고 돌아가도 어두컴컴한 저녁일 텐데.

아무리 놀고 오라고 했다지만 너무 늦게 돌아가는 건가 싶어 마음이 초조해졌다. 걱정 어린 눈동자가 거리를 훑었다.

“마차 있는 곳이…… 어디였더라.”

저녁이 다가오니 거리가 낮과는 사뭇 달랐다. 벨라는 순간 멈춰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라 방심했더니, 마차에서 내려 지나왔던 길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쯤 되면 숨어서 따라오던 성의 기사가 나타나 이만 돌아갈 시간이라고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길을 물어보면 될 텐데…….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려니 다짜고짜 마차가 있는 곳을 아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려 고개를 빼 들고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지 건물이 다 비슷비슷하게만 보였다.

마차는 분명 인적 드문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최대한 마을 외곽 쪽으로 향했다.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린 탓에 걸음걸이에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원하던 대로 길가에 사람이 없긴 했다. 그래서 앞은 잘 살피지 않고 저 멀리 마차가 있을 만한 곳만 찾으며 걸었다.

너무 멀리만 내다본 탓인지,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잘 보지 못했다. 순간 누군가와 어깨를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앗,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사과부터 건넸다. 앞을 잘 보지 않고 간 제 탓이 클 테니까. 그러다 무심코 부딪친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제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 순간 엘리아스가 낮에 했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리 오래 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해가 질 때쯤 되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조심해요.”

아차, 지금쯤이면 눈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텐데. 후드를 쓰고 있긴 했지만 그리 푹 눌러 쓰진 않았다.

벨라는 황급히 후드를 깊게 내려 눈을 가렸다. 그러고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눈을 봤으면 어쩌지. 당연히 정면으로 마주 봤으니 눈을 못 봤을 리는 없는데.

불안에 휘둘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래도 훤한 대낮은 아니라 확 티가 나진 않을 것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나 여자는 생각보다 온화한 말투로 말을 건네곤 벨라를 지나쳐갔다. 그 미세한 친절에 미련하게도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고개를 드니 여자는 벌써 몇 걸음이나 멀어져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가 드니 그제야 시야가 제대로 트였다. 바닥에 주머니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본 것도 그때였다.

“저기,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그러나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소리치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러워 큰 소리로 부르지도 못했다.

“저기요……!”

그래도 그녀의 기준에서는 가장 크게 부른 것이었다. 뒤로도 몇 번 더 불러 보았지만 들리지 않는지 여자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주머니를 쥐고 잠시 고민하던 벨라는 결국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뒤를 쫓았다. 원래 걸음이 빠른 건지, 열심히 쫓아가려 해도 도통 거리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방향을 틀어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벨라는 혹여 놓칠세라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중간에 그냥 포기하고 갈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쫓아온 게 아까워서 더욱 속도를 냈다. 손에 든 주머니가 꽤 묵직했던 탓도 있었다.

“저기요!”

여자는 점점 더 복잡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주머니를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벨라는 지금 들어가는 골목이 사람이 다니지 않을 법한 으슥한 곳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

한참을 쫓아와서야 겨우 목소리가 닿을 수 있었다. 여자는 태연한 얼굴로 돌아서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거……. 이걸 떨어트리고 가셨어요.”

주머니를 보여주자 여자는 ‘아.’하며 짧은 탄성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벨라는 그래도 쫓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모른 척 지나쳤다면 꽤 찝찝했을 것이다.

“그걸 돌려주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거예요?”

“……네. 잃어버리면 곤란하실 것 같아서요.”

벨라의 말에 여자는 빙긋 웃었다.

“맞아요. 이렇게 안 따라오셨으면 곤란할 뻔했어요. 고마워요.”

그러면서도 주머니를 받아 가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게다가,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왠지 묘한 건 기분 탓일까.

벨라는 그제야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 사이사이는 건물에 가려 달빛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아까보다 하늘이 부쩍 어두워졌다. 벨라의 얼굴로 깊은 낭패감이 서렸다.

마차를 찾아야 하는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우선 빨리 이 골목부터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거 받으세요. 전 이만 가 봐야…….”

“린, 제법이야. 미끼질에도 소질이 있어.”

희미하게 달빛이 스며들던 거리가 갑자기 그림자로 뒤덮였다. 어디에선가 벨라의 앞과 뒤로 나타나 길을 가로막아 버린 남자들 때문이었다.

벨라의 얼굴이 사뭇 창백해졌다. 숨이 막히고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거세게 귓가로 내리쳤다.

“내 몫은 단단히 챙겨 줘야 해. 이리 번거로운 건 내 스타일 아닌 거 알잖아.”

“그럼, 알지. 수고했어. 몫은 분명히 챙겨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여자가 자연스럽게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와 대화하는 걸 보며,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되었다.

이 사람들이 제게 무엇을 원하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황이 매우 나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남자가 위협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아가씨, 잠시 후드 좀 벗어 볼까?”

벨라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오, 오지 마세요. 소리 지를 거예요.”

“그냥 얼굴만 좀 확인하겠다는데 왜 그리 예민하게 굴어?”

여차하면 어디로든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등 뒤로도 그림자가 빼곡한 걸 보니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듯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떠올려 보았지만, 가진 건 고작 돈과 지도뿐이었다.

아, 금화. 조금 쓰긴 했지만 아직도 충분히 남아 있는 금화가 떠오르자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때로는 돈이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벨라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 보내주세요……. 가, 가지고 있는 건 다 드릴게요……. 금화, 금화가 있어요.”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제발 이 사람들이 그저 여행자의 돈을 뺏으려는 강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금화 얘기를 듣고도 얼굴을 확인하려 다가오는 모습이 더욱 두려웠다. 대체 무슨 의도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거고. 그리고, 보내 달라고 말하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보내줄 줄 알았어? 순진한 아가씨네.”

남자가 질 나쁘게 이죽거리며 비아냥댔다. 벨라는 치고 올라오는 울음을 애써 억누르곤 손가락의 반지를 꾹 감싸 쥐었다.

반사적으로 흘끔흘끔 뒤를 살폈다. 지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건, 확실하지 않은 작은 기대뿐이었다.

분명 공작이 저를 감시하라며 붙여 놓은 기사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하는데…….

그게 아니면 도저히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대로 잡혀가면 험한 꼴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골목 사이사이 건물의 창가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가정집이 몰려 있는 듯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른다면, 과연 사람들이 도와줄까?

괜히 자극해서 더욱 일을 키우는 건 아닌가 싶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 아가씨가 돈 많은 건 알겠는데, 때로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는 법이잖아. 이해하지?”

남자가 씩 웃으며 제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그림자의 움직임이 사뭇 부산스러워졌다.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자, 우리 서로 편하게 가자고.”

이 정도 상황까지 몰렸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그가 따로 사람을 붙여 놓지 않았다.

그가 준 자유가 거대한 재앙과 같았다. 순간 절망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없었다. 하늘로 솟지 않고서야 이 틈을 빠져나갈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이럴 때 제게 새처럼 날개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안다.

벨라는 깊게 체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새까만 어둠 위로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이 가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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