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한참 문과 눈싸움을 하던 벨라는 무언가 결심했다. 그러고는 비장한 손길로 다시 문을 열어젖혔다.
“하…….”
문 너머를 마주한 벨라는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이건 정말……. 무언가에 홀렸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옷이 가득 진열돼 있는 상점이었는데, 지금 눈앞엔 그저 먼지 날리는 창고의 모습일 뿐이었다.
“내가 미쳤나…….”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스쳐 간 생각은 제법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아, 지금 이거 꿈인가?”
그렇지. 눈동자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큰 나머지 충분히 이런 꿈을 꿀 수도 있다. 꿈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벨라는 곧바로 제 뺨을 제법 세게 꼬집었다.
“아야…….”
꼬집은 대로 아픔이 전해지는 걸 보니 꿈도 아닌가 보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문이 쾅 닫히며 눈앞으로 희뿌연 먼지가 폴폴 날렸다.
벨라는 한동안 길가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지나가던 여성이 넌지시 물었다.
“길 잃었어요?”
“네? 아, 아니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답하자 여자는 그녀의 행색을 슥 훑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분명 눈을 마주쳤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여자가 저 멀리 사라질 때쯤, 벨라는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정말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자 순간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어렴풋이 엘리아스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무엇을 해야 하지? 평범한 사람처럼 눈 색이 바뀐다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
뭔가 거창한 게 떠오를 줄 알았더니, 제일 먼저 생각난 건 의외로 사소한 것이었다.
“……이안한테 편지를 보낼까.”
그래,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랐다. 그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좀 전해 주고 싶은데, 성안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벨리아르 공작을 거쳐야 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처음이기에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예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벨라는 길가에 서서 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인상이 괜찮아 보이고 걸음이 느린 사람을 골라 조심스레 말을 붙여보았다.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남자는 대꾸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물어볼 것이 뭐냐는 눈빛에 다급히 질문을 이었다.
“편지를 보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리 쭉 가다가 세 번째 나오는 모퉁이를 돌아가면 정육점이 나올 거요.”
“아, 정육점이요…….”
편지를 물어보았는데 왜 정육점 얘기가 나오는 걸까. 무언가 대답이 잘못된 것 같았지만 남자의 심드렁한 태도에 차마 다시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니 남자는 벌써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던 참이었다.
벨라는 자그맣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조금, 아주 조금 자신감이 떨어졌다.
혹시 이방인으로 보이는 자신을 놀리려 한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쨌건 알려준 대로 정육점을 찾아가 보았다.
마을에서 가장 큰 정육점인지 가게 규모도 크고 손님도 꽤 많았다. 그녀가 들어와도 사람들은 한 번 쳐다볼 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나마 시선을 끈 건 특이한 머리카락 색 때문인 듯했다.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구석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주인이 고개를 빼고 소리쳤다.
“고기 사러 왔소?”
갑자기 시선이 조금 쏠리자 그녀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벨라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편지를 보내려고요.”
정육점에서 뜬금없이 편지를 보낸다고 했다가 사람들이 비웃는 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잇따랐다.
덜컥 창피함부터 몰려오는 바람에 얼굴로 더욱 열기가 몰렸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주인이 대충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에 보시오.”
정확한 방향을 찾지 못해 어물쩍거리고 있자 손님들이 살며시 길을 터 주었다. 그 사이를 지나가며 하염없이 감사 인사를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콕콕 방향을 알려주기도 해서 편지를 넣는 곳까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다행히 편지지와 펜도 같이 있었다.
정말 정육점에서 편지를 받네.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에 그녀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번졌다. 대체 무엇이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런 사소한 것들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벨라는 사람들에게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안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보통 정육점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을의 터줏대감 격이었다. 고기를 다루니 재산도 많았고, 그만큼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친밀한 편이었다.
정육점에서 편지를 이송해 주는 이유는, 다른 마을로 마차가 이동할 때 가장 빠른 것이 정육점의 마차였기 때문이다.
고기가 상하지 않게 하려면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것이 관건이고, 정육점의 주인은 더욱 이득을 높이기 위해 마차를 끄는 말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편 사무소가 있는 마을은 그곳으로 가면 되지만, 포웬처럼 작은 마을은 이런 정육점에서 고기를 실어 나를 때 편지를 같이 이송해 주었다.
벨라는 그리 길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얘기만 간단하게 썼다.
제 이름과 주소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헤버튼에서 도망친 자신을 찾겠다고 대신전에서 기사들이 파견된 상태인데, 괜히 이안에게 자신을 엮고 싶지 않았다.
편지를 봉하고,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어느 할머니가 살며시 말을 걸어왔다.
“저기다 편지를 넣고 요금은 이 통에 넣으면 돼요.”
눈을 마주치자 할머니는 인자한 웃음으로 받아 주었다. 벨라는 그 따스한 미소에 물들어 덩달아 기분 좋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할머니의 말대로 편지를 통에 넣는 것까진 좋았는데, 요금이 문제였다. 벨라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냈다가 난처한 듯 탄식을 흘렸다.
그 소리에 할머니가 흘끗 주머니를 보곤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듯 소리쳤다.
“어이구, 큰일 날 아가씨네! 돈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요?”
할머니의 걱정 어린 타박에 멋쩍게 웃고 말았다.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른다지만, 이 정도의 금화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금화 하나를 어디론가 가져가더니 은화 여러 개로 바꿔 왔다. 그러고는 벨라의 손에 꼬옥 쥐여 주며 당부했다.
“자,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감사합니다.”
금화 하나로 바꾼 은화 주머니는 상당히 두툼하고 묵직했다. 할머니는 나머지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그녀의 옷 속에 꼼꼼히 넣어 주었다. 그 손길이 정겨워 벨라는 그냥 얌전히 있었다.
“이거는 사람들 눈에 안 띄게 꽁꽁 감추고 다녀야 해요. 이렇게 함부로 보여 주고 그러면 안 돼.”
“네, 그럴게요.”
“여행하러 온 거예요?”
딱히 다른 말로 설명할 게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자서?”
“네.”
“대단한 아가씨네. 그럼 잘 놀고 가요. 사람 많은 곳으로만 다니고.”
“정말 감사합니다.”
편지 요금도 내고 할머니와 인사도 나누었으니 이제 나갈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할머니…….”
“응?”
벨라는 은화를 몇 닢 집어 할머니에게 건넸다.
“이게, 들고 다니기에 너무 많고 무거워서요…….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그래서…….”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자그맣게 기어들어 갔다. 기껏 용기를 내어 건넨 것인데, 할머니가 거절하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 마음이 얼굴로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할머니는 다정하게 웃으며 기꺼이 그녀가 주는 은화를 받아 들었다.
“어유, 뭘 이런 걸 다……. 예쁜 아가씨 덕분에 오늘 저녁은 고기를 푸짐히 먹겠네요.”
그제야 벨라의 얼굴에 편안하고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마음이 후련하고 뿌듯했다.
정육점에서 나오니 바깥 공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아까보다 더 시원하고, 가벼웠다.
한 가지 일을 끝내고 나니 차오르는 성취감에 마음이 붕붕 떴다. 지금 기분으로는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아까 편지를 쓰며 생각해놓았다. 벨리아르 공작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이다. 전에 금화를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에릭이 귀띔해 준 것이 떠올랐다.
“주인님께 무언가 선물을 해 드리는 건 어떨까요?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선물이라……. 여태껏 고민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재력과 권력을 넘치도록 가진 그에게 더 이상 물리적으로 필요한 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저번에 소만에 갔을 때 그가 검을 지니고 다니는 걸 보며 매듭 장식 같은 걸 생각했었다. 마침 하탐에서 그런 걸 많이 팔고 있기도 했고. 괜히 어설프게 말을 꺼냈다가 입만 고생했지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걸음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살짝 낯익은 건물이 보였다.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 포웬에서 낯이 익다는 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기사들이 들이닥쳐 꼼짝없이 끌려갈 뻔했던, 그 여관이었다. 여관 주인이 자신을 밀고했던 것이 생각나 조금 침울해졌다.
혹여 누군가가 저를 알아볼까 싶어 황급히 그 거리를 벗어났다. 그제야 머리칼이 조금 신경 쓰이는 듯해 후드를 썼다.
사람들을 피하려고 도망친 것인데, 지리를 잘 모르다 보니 어째 상점가가 몰려 있는 곳으로 와 버렸다.
“아가씨, 여기 장식 좀 한번 보고 가세요. 소만에서 들여온 거예요. 요즘 선물로 인기가 많답니다.”
벨라는 ‘선물’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노점상에 눈길을 주었다. 마침 소만에서 보았던 종류의 매듭 장식을 팔고 있었다.
검에 장식으로 달면 괜찮을 것 같은데.
머리로는 그가 좋아할까 고민하면서도 발은 저절로 노점상을 향해 움직였다. 이미 만들어진 장식도 있었고, 아예 재료로 실을 팔기도 했다.
갑자기 무슨 자신감이 샘솟은 건지, 직접 만들어서 선물하면 그가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혹시…… 직접 만들 수도 있을까요?”
“그럼요. 생각보다 쉬워서 금방 배울 수 있어요. 여기 재료 사시면 제가 알려드릴게요.”
벨라는 노점상 앞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숲에서 살 땐 바느질을 해야 할 때가 많아서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엔 나름 자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