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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45)화 (45/180)

45화

마차는 정해진 목적지로 이동했다.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

놀고 오라고 범위를 넓혀 주긴 했지만, 어차피 그의 테두리 안이었다. 그것이 어디든 별 상관이 없었기에 벨라는 아무 생각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아가씨, 이거 놓고 가셨습니다.”

마부가 건네는 것은 눈에 익은 것이었다. 언젠가 벨리아르가 주었던,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아……. 감사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서랍 안에 넣어 둔 것인데.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벨라는 주머니를 소중히 품 안에 챙겨 넣었다. 공작님도 그렇고 에릭도 놀고 오라고 했으니까, 이왕 나온 김에 돈을 조금 써 볼 생각이었다.

그제야 마음을 다잡은 벨라는 고개를 들어 낯선 곳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런데, 어쩐지 마을의 분위기가 낯익었다. 확 떠오르진 않았지만 폴번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갑자기 치솟는 불길한 느낌에 그녀가 고개를 홱홱 돌려 시야를 넓혔다. 단정한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왜 풍경이 익숙한지 곧 깨달았다.

“여긴…….”

헤버튼에서 도망쳐 베른에 처음 왔을 때 들렀던 마을, 포웬이었다.

* * *

벨라가 아침 일찍 성을 나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로드릭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헛숨을 토해 냈다. 조용히 미간을 어루만지는 로드릭 곁에서 부관이 대신 길길이 날뛰었다.

“애초에 이럴 속셈이었던 겁니다. 너무 뻔한 수법 아닙니까! 얼마나 저희를 우습게 봤으면…….”

“각하의 눈에 우습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성하께 보이는 태도도 저리 오만하신데.”

제국을 움직이는 것이 벨리아르 공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문득, 그런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자 형체 없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과연 이 성에서 무사히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고.

“지금 당장 기사들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로드릭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어려운 상대일수록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 한다.

아직 벨리아르 공작이 정말 마녀와 결탁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그 영애가 마녀가 맞는지도 불확실하고.

기사들을 이끌고 온 이상,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사람들의 목숨이 다 제 선택에 달린 것이다. 절대 공작에게 명분을 줄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아직 단정하기엔 일러. 그저 외출을 나간 것일 수도 있고……. 내일까지 지켜봐도 늦지 않아. 그리고 여긴 공작의 성 안이다. 기사들을 움직이는 건 최대한 신중해야 해. 그건 최후의 보루다.”

제국민들은 대신전에 속해 있는 페이트 기사단을 칭송하지만, 기사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대외적인 명성은 페이트 기사단이 우세일지 몰라도, 오로지 실력으로만 따지면 벨리아르 공작의 기사단이 단연 최고일 것이라고.

어디서부터 그런 소문이 시작된 건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상당한 실력자들이 공작의 기사단에 입단했다는 소식이 종종 들려왔다.

그리고 여긴, 그 기사들이 모인 본거지였다. 두 눈으로 지켜본 결과, 공작 성에서 머무는 기사들의 훈련량은 어마어마했다.

고작 이십여 명 정도의 기사들로 공작을 압박한다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기사는 붙여 두었나?”

“예, 물론입니다. 가는 곳마다 상세히 보고하라 일렀습니다.”

“……그래, 일단 내일까지 두고 보지.”

“만약 내일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로드릭은 오히려 그렇게 되길 기대하기도 했다. 그럼 공작이 먼저 제게 명분을 내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땐 당당히 권리를 내세워도 되지 않겠는가. 조사하라고 허락해 준 건 각하시니.”

잘 따지고 보면 이렇든 저렇든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저, 아무래도 조금 불안합니다.”

“무엇이?”

“공작이 저희를 이리 머물게 하는 이유가 필시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미리 대신전에 지원요청을 보내 놓는 게 어떻겠습니까?”

혹여 공작이 어떠한 움직임을 보였을 때 대처하려 하면 늦다. 수도에서 베른까지 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으니, 부관의 말이 영 터무니없는 건 아니었다.

성하께서는 공작도 틀림없는 한편일 테니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하셨지만, 조사에 임할 땐 늘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 로드릭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해서 대비해 놓아야 한다는 건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수도에 지원 병력을 요청해 놔.”

* * *

포웬은 여전히 한적한 곳이었다. 폴번처럼 길가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도 않았고, 상점과 집도 한데 섞여 나지막하고 아담했다.

그러나 마녀의 본거지가 있다는 소문이 도는 데다 실제로 희생자가 많이 나온 만큼, 분위기가 마냥 평화롭진 않았다. 적어도 벨라가 느끼기엔 그랬다.

그러기에 더욱 움츠러드는 것이다. 벨라는 전에 이곳 사람들이 제게 돌을 던지며 마녀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던 것을 잊지 않았다.

간간이 이방인인 저를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우선 눈을 가릴 만큼 깊은 후드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옷가게로 보이는 곳들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주인이 의심스럽게 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동시에 부드럽게 맞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눈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상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름이…… 엘리아스였나.

만약 그를 외딴 숲에서 마주쳤다면 이리 당황스럽진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게 어울리니까. 이런 소담한 옷가게에서 만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엘리아스가 입구에 멍하니 굳어 있는 벨라를 향해 태연히 말을 건넸다.

“옷을 사러 오신 게 아닌가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 말이 주문처럼 와닿았다. 벨라는 문 쪽을 흘긋 보곤 가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벨리아르 공작이 저를 이렇게 혼자 내보내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누군가 뒤를 밟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엘리아스에게 곧장 아는 척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물론 가게 안의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후드를…… 사려고요. 돌아다니려면 눈을 가려야 할 것 같아서…….”

“음, 좋은 생각이네요.”

그는 자연스럽게 진열된 옷들로 다가가 옷을 골랐다. 잠시 후 그가 건네준 건 딱 적당한 스타일의 후드였다. 색상도 단조로워서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눈이 가려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엘리아스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 위에 케이프 형식의 후드를 둘러주었다.

어색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아는 척을 안 해요? 섭섭하게.”

그가 먼저 아는 척을 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기척도 잘 숨기고 잘 도망가니까, 이리 말을 건다는 건 안전하다는 뜻이겠지.

“……원래부터 여기 계셨어요?”

“어떤 것 같아요? 잘 어울려요?”

어두운 우드 톤의 상점 안에서 그는 홀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니 상점 주인이라고 하기엔 더욱 위화감이 짙었다.

“……잘 어울리진 않는 것 같아요.”

사실대로 말하니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받아쳤다.

“아, 어울린다고 하면 옷가게나 하려고 했는데.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겠네요.”

역시, 원래부터 상점 주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이곳엔 대체 어떻게 있는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오랜만에 놀러 나온 듯한데, 내가 선물 하나 줄까요? 마음 같아선 같이 놀러 다니고 싶긴 한데, 그럼 너무 눈에 띄니까.”

“선물이요? 무슨…….”

갑작스레 그가 손으로 눈을 가리는 바람에 말끝이 흐려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니 새까만 시야에 잠시 빛이 서렸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눈을 가렸던 손이 사라지고, 다시 눈을 뜨니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뭐 한 거예요?”

“거울 한번 볼래요?”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선 친절하게 직접 거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무심코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한 벨라는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원래도 큰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그래서 더욱 눈동자의 변화가 확실히 보였다.

“……어? 어, 어떻게…….”

벨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특이하던 보라색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다갈색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검은색으로도 보일 만큼, 흔하디흔한.

“선물이에요. 그리 오래 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해가 질 때쯤 되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조심해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말소리가 한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쏙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만큼 혼란스러워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카락 색도 바꿔 줄까요? 아니다, 그건 조금 위험하니까 안 되겠어요. 그냥 이렇게 다녀요. 예쁘니까.”

“이, 이게 대체……. 뭐, 뭐예요, 이거? 네? 제 눈이 이상한 거죠? 그렇죠?”

정신없이 묻는 말에 엘리아스는 태연히 대꾸했다.

“네, 벨라 눈이 이상해요. 보라색이 예뻤는데.”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하는 말에선 언뜻 아깝다는 기색이 비치기도 했다.

벨라는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 답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엘리아스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를 문 쪽으로 내몰았다. 볼일 다 끝났으니 이제 그만 가라는 뜻이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엔 여기로 찾아와도 소용없어요. 내가 찾아갈 테니 벨라는 기다리기만 하세요.”

기어코 문을 열고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바깥으로 나오게 된 벨라는 황당한 시선을 던져 보았으나 그는 홀로 태연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요. 사람 조심하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문이 닫혔다. 굳건히 닫힌 문으로 그녀의 허망한 시선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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