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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44)화 (44/180)

44화

치치를 보여 준 게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벨라는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았다. 원래도 그리 기운이 넘쳤던 건 아니었지만, 아침 햇살에 먼저 눈을 뜨는 정도는 되었다.

치치는 괜찮을까.

잠에서 깨며 그런 생각을 했다. 갓 구운 따끈한 빵을 수프에 찍으면서도 그 애 생각이 났다.

많이 야위어 보이던데 밥은 잘 먹었을까.

이게 다 그가 괜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괜히 누나라고 하며 마음을 흔들어 놔서. 알게 모르게 자꾸 신경 쓰였다.

“……공작님, 저 이제 배불러요.”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책을 한 페이지 넘기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럼 그만 먹어.”

생각지 못한 반응에 벨라는 테이블 위를 훑었다. 아침 식사로 준비된 것의 반 정도 먹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양이었다.

“정말요?”

의아한 듯 묻자 벨리아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나 떠본 거야?”

벨라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가 무시하고 다시 책을 읽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책이 단호히 덮였다.

“일어나.”

벨라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일어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쯤 되면 다음 지시가 떨어져야 하는데, 순간 머릿속에 생각이 급격히 많아졌다.

아무 말이 없었으면 그냥 평소대로 움직이라는 거 아닐까. 거센 고민 끝에 침대로 가려고 발을 뗀 찰나, 그의 단호한 음성이 가로막았다.

“침대 가지 말고 소파에 앉아.”

“……네.”

그에겐 조금 못된 취미가 있었다. 사냥감을 몰 듯 조용히 압박하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쯤 되어서야 겨우 숨통을 틔워준다.

소파에 앉으니 그가 책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버릇처럼 벨라의 허리가 뻣뻣이 굳었다. 그는 얼어있는 모습을 보곤 조용히 창가로 향했다.

워낙 기척 없이 움직인 탓에 벨라는 뒤늦게 그가 멀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 그녀의 앞에 놓아주었다.

“마셔. 밖에 추우니까 차로 몸 좀 데워야지.”

찻잔에서 몽글몽글한 김이 피어올랐다.

베른에 겨울이 오고 있다. 일찍이 찾아온 눈이 쌓여 며칠째 녹지 않고 있었다. 새하얗게 쌓인 눈 때문인지 창으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이 더욱 쨍하고 강렬했다.

오늘은 산책하러 나가면 에릭과 눈사람을 만들어 봐야지.

작은 계획을 세우니 그만한 설렘이 뒤따랐다.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니 그의 시선에 얼어붙었던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태양을 마주한 눈사람이 된 기분이다.

“기분 좋아?”

“……네.”

“단순하긴.”

그가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귓가에 감겼다. 눈사람을 만들러 나가고 싶기도 하고, 그냥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혀 책을 읽고 싶기도 했다.

그가 읽던 책은 무엇인가 싶어 살피는 사이, 조용히 사용인들이 들락거렸다. 그들은 식사 자리를 치우고 그곳에 무언가를 가져다 놓았다.

신발 몇 개와 여러 벌의 옷이었다. 그제야 벨라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갑자기 웬 옷들인가 싶었다. 보통 산책할 때 입을 옷만 간단하게 가져오는 편인데, 오늘은 묘하게 분주했다.

벨리아르가 행거에 걸린 옷들로 다가가 이리저리 살폈다. 무언가 찾는 옷이 있는 듯했다. 그는 잠시 후 하녀에게 다시 지시했다.

“저번에 벨라가 소만에서 사 왔던 옷, 그걸로 가져와. 나머진 필요 없으니 겉옷만 남기고 치워.”

“네, 알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소만에서 사 온 노란 원피스를 떠올리며 설레다가도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불안했다. 그저 그 옷을 입게 해주려는 걸까. 그렇다면 좋겠는데.

벨리아르는 살살 제 눈치를 살피는 벨라를 보며 설핏 웃었다. 벨라도 그 모습을 보았고, 그가 알려줄까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느긋한 태도로 다시 소파에 앉았다. 천천히 차를 음미하는 모습이, 일부러 그녀를 더 애태울 심산인 듯했다.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입이 머릿속을 반영하듯 아주 바빴다. 벨리아르는 기꺼이 그 모습을 즐겼다.

“……공작님.”

결국 이리 저를 찾을 것을 알기에.

“왜?”

“저 옷은 뭐예요……?”

“가져와 봐.”

원하던 답은 아니었지만 벨라는 곧바로 원피스를 가져왔다. 소만에서 사 온 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선물이라고 사줬지만 마음대로 입을 권리까지 준 것은 아니었다.

“벗어.”

“……네?”

이제 웬만하면 그의 지시를 거스르지 않으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가 내리는 지시는 때때로 곤란하고 힘든 것들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벗고 그 옷으로 갈아입어.”

하도 태연하게 지시하니 벨라는 자신이 놓친 말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지금요? 여기서요……?”

설마 하는 마음에 떨리는 눈동자로 물으니 그가 일순 표정을 굳혔다. 곧바로 싸늘한 질책이 이어졌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릴까. 네가 갈 데가 어딨어.”

“저…….”

그래도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그의 눈빛이 더욱 매섭게 휘몰아쳤다.

결국, 벨라는 잠옷에 손을 가져갔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여태까진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땐 그가 없거나, 있어도 아예 눈길을 주지 않았기에 얼른 갈아입으면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날카롭게 꿰뚫는 시선에서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마음이 급하고 긴장해서 그런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떨리는 손길이 몇 번이나 어긋났다.

기껏 옷을 갈아입고 섰으나 그의 표정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살짝 찡그려진 눈가를 본 순간 다시 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다시, 갈아입을까요……?”

한 번 갈아입었으니 두 번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젠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됐어.”

그는 도톰한 털 코트를 들고 와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원래 입은 원피스 자체도 두꺼운 원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방안에서는 그리 춥지 않았다.

거기에 겉옷까지 더해지니 내뱉는 숨이 금세 따끈해졌다. 찬 바람 쌩쌩 부는 바깥이 그리워졌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건지 그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나가서 놀고 와.”

“네?”

“자꾸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놀고 오라는 말이 조금 낯설어서 그랬다. 그는 보통 산책을 다녀오라고 하지, 놀고 오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가 제법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한층 다정해진 목소리로 어르듯 말했다.

“기분 전환 겸 밖에서 놀고 오라는 얘기야. 알아듣기 어려워?”

“……아니요. 알아들었어요.”

밖에서 놀고 오라니. 그 ‘밖’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또 물어보면 정말 화를 낼까 봐 그러지 못했다. 고맙게도 딱 적당한 타이밍에 에릭이 들어왔다.

“다 준비되었습니다.”

“벨라 데려다주고 와.”

“예. 가시죠, 아가씨.”

대화가 상당히 이상하지 않은가. 평소라면 에릭에게 자신을 산책시키라고 지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데려다주고 오라고 한다. 대체 어딜?

끊임없이 의아한 것들이 튀어나왔지만 일단은 에릭을 따라 방을 나섰다. 바깥에 나오니 차디찬 바람이 발개진 뺨을 식혀 주었다.

“에릭 경.”

에릭은 대꾸 없이 길을 안내하듯 앞서 걸었다.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었을까 싶었지만, 왠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여태 그런 적은 없었다.

혼란한 마음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곳이 눈앞에 보였다. 공작 성의 높은 성벽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였다. 얼떨결에 성문까지 온 것이다.

공작가의 문장이 없는, 평범한 마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도통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벨라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릭 경,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

“주인님께서 요새 아가씨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신다고 바깥바람 좀 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놀다 오세요.”

그제야 그가 놀다 오라고 했던 말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는 정말 더 넓은 의미의 밖을 말한 것이다. 성벽 너머의 밖. 그가 허락해 주지 않던 범위였다.

“……저 그럼 밖에 나가는 거예요? 에릭 경은요?”

“오늘은 아가씨 혼자 다녀오시는 겁니다. 내린 곳에 그대로 마차가 있을 테니 돌아올 때도 그곳에서 타고 오시면 됩니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몹시 버겁게 느껴졌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거운 돌덩이를 넘겨받은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잘 다녀오시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럼, 재밌게 놀다 오십시오.”

에릭은 마부에게 짧게 당부하곤 단호하게 등을 돌려 사라졌다.

에릭은 창가에 선 벨리아르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시선 끝엔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어쩔 수 없이 마차에 올라타는 벨라의 모습이 있었다.

“마차까지 데려다주고 왔습니다.”

“준비는 제대로 했고?”

“예. 미리 정보도 다 흘려 두었고, 아가씨에겐 몰래 기사도 붙여 두었습니다. 물론, 반드시 예외의 상황에서만 나서라고 지시했습니다.”

천천히 출발하는 마차를 보며 그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벨라에게 반지를 제외하고 어떠한 제 표식도 남겨 놓지 않았다.

“로드릭은?”

“아가씨가 나갔으니 그쪽에서도 분명 사람을 붙일 겁니다. 따로 사람을 써서 처리하겠습니다.”

“간악한 마녀의 소행으로 보이도록 해. 그것들 그런 거 좋아하잖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아가씨가 얼른 돌아와야 네가 고생을 덜 할 텐데.”

“괜찮습니다. 주인님께서 지시하신 일인데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가 옅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창문을 톡 쳤다. 벨라를 태운 마차가 완벽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벨라가 가끔 말을 잘 들을 때가 있어서 걱정이긴 해.”

“그것도 말씀해 주신 대로 조치해 놓았습니다. 아가씨는 정에 약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벨리아르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얼굴에 드러나는 기색은 나른하고 권태로웠다.

“말을 잘 들어도 문제고, 안 들어도 문제네.”

어찌 됐건 또 울리게 될 테니. 가여워서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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