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가 어두운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내려가다 멈추고서 뒤를 돌아봤다. 벨라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벨라.”
울상짓는 표정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또 저를 죽이려 할까 봐 발발 떠는 것이다. 헛웃음을 내비친 그가 귀찮다는 듯 재촉했다.
“너 안 죽일 거니까 이리 와.”
그제야 벨라는 살며시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사실 죽이는 것 말고도 다른 불안이 많았지만, 일단 죽이진 않는다니까…….
조심스럽게 그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니 점점 싸늘한 기운이 짙어졌다. 어두워서 발밑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고 너른 보폭으로 나아갔다.
그가 횃불을 들어 시야를 밝혔다. 지하실의 광경을 제대로, 제정신에 본 건 처음이었다.
소만에서 보았던 노예시장의 분위기와 사뭇 비슷했다. 양옆으로 늘어선 철장 때문인 듯했다. 그곳보다는 더 좁고, 그래서 압박감은 더 심했다.
그가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벨라는 가만히 철장 너머를 보고 있는 그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가 안을 보라는 듯 눈짓했다.
안에 갇힌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벨라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소만에서 보았던 그 아이였다.
“아직 살아있네.”
그의 말대로 ‘아직은’ 살아있었다. 맥없이 늘어져 있는 몸과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을 보니 곧 죽어도 그리 이상한 것 없어 보이는 상태였다.
“그냥 힘이 없어서 그래. 안 죽으니까 걱정 마.”
벨리아르가 무심한 어투로 덧붙였다. 우습게도 그의 말에 조금 마음이 달래지긴 했다.
“공작님께서 구해 주신 거예요?”
그는 딱히 답하지 않았다. 어쩔 땐 침묵이 긍정이기도 하기에 벨라의 얼굴로 안도감이 스쳤다.
“이름은…….”
그가 말끝을 늘어트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설핏 미간을 좁혔다. 그리 길게 고민하진 않았다.
“치치야.”
정말, 성의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조금 생각하다가 나온 이름인 것을 보니 본명이 아니라 그가 즉석에서 지어낸 게 분명했다.
“왜 그렇게 봐.”
“아니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이름을 지어 준 게 어딘가. 그냥 죽여 버릴 거였다면 애초에 그런 수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짝 비치는 희망에 불안감이 많이 가셨다.
“벨라도 내가 이름 지어 줄까?”
“아니요.”
곧바로 거절하자 그가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화를 내면 냈지 정말 서운해할 리는 없으므로, 그건 처음 보는 가면이었다.
“바로 싫다고 하네.”
“싫다고 하진…… 않았어요.”
“그럼 지어 줄까?”
집요한 물음에 벨라의 얼굴이 살짝 울상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작명 센스는 없어 보이는데.
이상한 이름으로 지어 놓고 그대로 불릴 생각을 하니 조금 시무룩해졌다. 제겐 거부할 권한도 없었다.
“……제 이름이 마음에 안 드세요?”
“글쎄.”
그가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 손에 작은 머리통이 적당하게 들어왔다.
“좋기도 하고, 아주 거슬리기도 하고.”
가끔 손길이 거칠어지는 건, 거슬렸기 때문일까. 지금처럼 그가 머리를 쓰다듬거나 할 때면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그럼, 지어 주세요.”
“라라? 어때.”
그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새로운 이름을 건넸다. 치치와 라라라니. 시골에서 키우는 개 이름도 그리 성의 없게 짓지는 않을 것이다.
완전 이상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표정이 살짝 불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딱 봐도 억지로 대답한 것이지만 그는 만족스러운 듯했다.
라라. 벨라는 속으로 그 이름을 한 번 굴려 보았다. 제 이름이 ‘라’로 끝나니까 라라인가? 정말 단순한 작명법이었다.
부르기 쉬워서 나쁘진 않지만, 아무리 봐도 제 이름이 더 좋았다. 이대로 쭉 라라가 되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자, 그럼 라라. 말 잘 들으면 치치를 선물로 줄게.”
“선물……이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벨라는 어리둥절했다. 선물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이 있었지만, 그게 사람인 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별로 기뻐 보이지 않네.”
서늘히 읊조리는 말에 벨라는 제 생각을 조금 고쳐먹기로 했다.
사람을 선물로 준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은 곧 저 남자…… 아니, 치치에게 걸린 구속을 없애 주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럼, 여기서 빼내 주시는 거예요……?”
“선물이라고 했잖아. 방도 만들어 줄게. 밥도 주고, 옷도 좋은 거 입혀 주고. 라라가 산책도 시켜 줘.”
달콤히 늘어놓는 말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이 차갑고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있는 것보단 그가 말한 것들이 훨씬 나을 테니까.
만약 그가 제게 치치를 선물로 준다면, 자신은 치치에게 자유를 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다.
“나이 물어보니까 성인식 치른 지 얼마 안 됐다던데. 라라가 누나네?”
“아…….”
그는 일부러 치치가 동생이라는 점을 강조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것이 영 터무니없는 작전도 아닌 것이, 맥없이 쓰러진 치치를 보는 벨라의 눈빛에 미세한 애틋함이 더해졌다.
저보다 동생이라고 하니 더 가엾고 안쓰러운 모양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라라, 연무장에 가면 에릭이 있을 거야. 가서 에릭한테 여기로 오라고 전하고, 라라는 방에 가서 놀고 있어.”
“연무장이면…… 기사들이 머무는 곳이죠?”
“그렇지. 우리 라라 똑똑하네. 그런 것도 알고.”
그가 놀리듯 말하며 살짝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하가 추워서 붉어졌나 했더니 그저 들뜬 모양이다.
기껏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속으로는 상당히 기쁜 듯했다.
그러나 연무장 이야기가 나오니 표정이 다시 조금 가라앉았다. 굳이 말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 신전에서 온 기사들이 머물고 있으니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겠지.
“……그, 대신전에서 온 기사들도 거기서 머물잖아요. 그래서…….”
벨리아르는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벨라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치치가 있는 쪽으로 돌아보며 진정 안타깝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치치, 라라는 치치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봐. 그러니까 저렇게 말을 안 듣겠지? 치치가 필요 없으니까.”
그 말에 쓰러져있던 치치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본 벨리아르는 옅게 조소를 머금었다.
“그럼 치치는 죽어야겠네.”
벨라에게 선물로 주려고 데려온 것인데, 그마저도 쓸모가 없으니.
그가 자물쇠로 손을 뻗는 순간, 벨라가 다급히 말을 꺼냈다.
“다녀올게요……! 저, 지금 갈 거예요.”
원하는 말이 나오자 벨리아르는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럴래?”
“조금만 기다리세요, 공작님.”
어둡다고 무서워하며 벌벌 떨 땐 언제고. 등 돌려 뛰듯이 걷는 벨라를 향해 나긋이 덧붙였다.
“천천히, 뛰지 말고.”
“네……!”
벨리아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벨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녀의 발소리가 더 이상 지하에 울리지 않을 무렵, 그의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평소처럼 무감한 얼굴에선 옅은 분노마저 느껴졌다.
그가 철장을 한 번 걷어찼다. 날카롭게 울리는 쇳소리에 치치가 몸을 움찔거렸다.
“다행이네. 쓸모가 있어서.”
잠시 후, 벨라의 말을 전해 들은 에릭이 지하로 내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벨리아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가기 싫어서 머뭇거리느라 말을 전하는 것이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벨라가 갔어?”
“예, 아가씨가 직접 와서 전해 주었습니다. 방에 데려다주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잘했어.”
벨리아르가 철장 안의 치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일 끝나면 이거 벨라한테 선물로 주려고.”
“보여 주셨습니까?”
“보여 주고 너한테 보냈지.”
“좋아했겠네요.”
죽인다는 협박에 곧장 연무장으로 달려간 걸 보니 좋아하는 것 같긴 했다. 반응이 탐탁지 않으면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데, 성에 쓸데없는 것이 하나 늘어버렸다. 그의 얼굴로 귀찮은 기색이 서렸다.
“상태가 영 별로인데. 밥 준 거 맞아?”
“매 끼니 챙기라 했는데 밥을 잘 먹지 않는 모양입니다.”
“누구랑 닮았네.”
과연 벨라가 치치를 얼마나 아껴 줄지 기대가 되었다. 아껴 주면 아껴 줄수록, 치치의 쓸모는 커지는 것이다.
“아, 얘 이름 지어 줬어.”
“아가씨가요?”
“아니, 내가.”
에릭은 살짝 당황했다.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지어줄 만큼 다정한 성정이 결코 아닌데. 그럼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저 노예가 마음에 들었거나, 벨라가 이름을 지어 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무엇으로 지으셨습니까?”
“치치.”
이름을 듣자마자 에릭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정말 어지간히 짓기 귀찮으셨구나.
짧은 헛기침으로 표정을 가다듬은 에릭은 단정하게 감상을 읊었다.
“알맞게 잘 지으셨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에릭의 사무적인 칭찬에 벨리아르는 낮게 웃고 말았다. 입바른 칭찬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태연한 낯으로 거짓말하는 건 누구한테 배웠는지 참 잘 배웠네.”
에릭은 벨리아르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거둬 모든 걸 가르쳤으니 키운 게 맞았다. 에릭에게 벨리아르는 딱히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였다.
벨리아르는 입가에 서린 미소를 거둬 내며 다시 치치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물건을 확인하듯 여기저기로 꼼꼼하게 훑고 지나갔다.
“눈은 안 보이니까 됐고, 말동무 정도는 되어야 하니 목소리는 나와야겠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사내 구실은 하면 안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