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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42)화 (42/180)

42화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맞이하는 건 차분한 정적뿐이었다. 오히려 그 고요가 반가워 나른히 파묻히는 걸 택했다.

답답한 옷을 벗고 아주 가벼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따끈한 벽난로와 가까워 달리 무엇을 덮지 않아도 온기가 충분했다.

그래도 품이 허전해 제 무릎이라도 끌어안고 고개를 기댔다. 자연스레 창가에 놓인 그의 자리가 보였다.

손가락을 움직여 그가 창가에 기대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덧그려보았다. 어렴풋이 따끈한 차향이 코끝으로 퍼지는 듯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곧 나른하게 잠이 쏟아졌다. 벨라는 굳이 저항하지 않고 눈을 내리감았다.

해가 지고 나서야 벨리아르는 에릭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일과 관련된 얘기를 나눌 참이었다.

그러나 소파에서 잠든 벨라를 보았을 때, 심지어 얇은 잠옷에 가녀린 몸 선이 어렴풋이 비치는 걸 본 순간 방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에릭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다급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에릭.”

단지 이름을 불렀을 뿐이지만 에릭은 지금 해야 할 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쉬십시오.”

에릭은 공손하게 예의를 차리면서도 최대한 빠르게 방에서 나가며 존재감을 지웠다.

그 와중에도 세상모르게 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벨리아르는 잠시 어이없는 숨을 내뱉었다.

참, 여러 가지로 거슬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가만히 다가가니 색색거리며 내뱉는 숨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둥글게 몸을 말고 자는 모습이 작은 동물 같았다. 새하얀 뺨을 톡톡 건드려 봐도 별 미동이 없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벨라를 안아 들었다. 전에도 몇 번 이렇게 소파에서 잠든 벨라를 침대로 옮겨 놓은 적이 있었다.

처음엔 곁에 누워 자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저도 모르게 같이 잠들어 버린 적이 있었으나, 이후로는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딱히 잘 필요가 없었다. 잠을 안 잔다고 해서 피곤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괜한 악몽만 불러오기에 잠을 잔다는 건 그에게 쓸데없는 짓이었다.

이번에도 그냥 눕혀 놓기만 하려 했는데, 뒤척이며 옷깃을 붙잡는 손길 때문에 허리를 펼 수 없었다.

그냥 손을 쳐 내려는 순간, 벨라가 희미하게 신음했다. 꿈을 꾸는지 끙끙 앓는 듯한 소리에 그는 잠시 손을 거두었다.

“공작……님…….”

무슨 꿈을 꾸길래 그리 숨이 가빠지는지. 흘러내린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넘겨 주었다. 동그란 이마에 자그마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살려…… 주세요…….”

꿈에서 또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벨리아르는 제 옷깃을 꼬옥 쥔 손을 잠시 바라보다 그녀의 옆에 몸을 뉘었다.

살짝 찡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눌러 펴주곤 곧게 뻗은 콧등을 따라가며 덧그렸다. 가볍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운지 옆으로 고개를 파묻는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점점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는 내치지 않고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고개를 받치고 누워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불투명한 옷 너머로 살결이 비쳤다.

보통은 그 위에 다른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데, 방안이 더웠는지 심히 가벼운 차림이었다. 벨리아르는 차후에 한 번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벨라.”

나지막이 부르는 음성에 그녀의 미간이 움찔거리며 다시 좁아졌다. 숨소리가 미세하게 변하는 걸 보니 깨기 직전이었다.

도저히 멀어지지 않는 그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도, 뛰다가 넘어져서 뒤를 돌아봐도 그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결국 그의 앞에 엎드려 빌었다. 도망가지 않을 테니 살려 달라고.

그제야 그는 무릎을 굽혀 앉아 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턱을 들어 올리며 제 이름을 불렀다.

“벨라.”

저항할 수 없는 부름에 절로 눈이 뜨였다. 밤이라 더욱 짙어진 붉은 눈동자를 코앞에서 마주한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신 채 그대로 얼어붙은 벨라의 등을 그의 손이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다 두어 번 다독이곤 나직한 목소리로 이끌었다.

“숨 쉬어야지.”

탁 하고 풀리듯 숨을 내뱉자 순식간에 그가 다가와 입술을 삼켰다. 오로지 그가 주는 숨을 받으며 눈꺼풀을 내려 심연에 잠겼다.

몽롱한 정신에 그가 헤집는 대로 휩쓸리고 휘감겼다. 얇은 옷가지 위로 닿는 그의 손이 정염에 물들어 뜨거웠다. 묵직하게 압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벨라는 그 순간까지도 꿈이라고 여겼다.

* * *

잠에서 깬 지는 좀 되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이불에 파묻혀 있었다.

일어나면 밥을 먹어야 하고 산책도 해야 했다. 입맛이 없고 움직이기가 귀찮으니 그냥 이대로 쭉 자고 싶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기척을 내는 것이다. 일어난 거 다 알고 있으니 어서 눈을 뜨라고.

벨리아르는 침대에 걸터앉아 웅크려 있는 벨라에게 손을 뻗었다. 이불과 무릎 사이에 파묻혀 있는 얼굴을 찾아내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가, 손바닥을 대 보기도 했다.

그 손길에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이제 자는 척하기엔 글렀다.

“열은 없는데.”

아파서 이러고 있는 건지 확인해 본 것이다. 이때다 싶어 아픈 척하고 계속 누워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억지로 입을 뗐다.

“……괜찮아요.”

“산책 가야지. 에릭이 기다리고 있던데.”

“그냥…… 방안에 있고 싶어요.”

“왜 그럴까.”

나름 용기를 내어 그의 뜻을 거슬러 보았다. 별다른 지적 없이 나른한 물음이 돌아왔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덤이었다. 벨라는 착실히 답을 생각해 보았다.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래?”

그의 굵은 손마디에 부드러운 은빛 머리칼이 감겨들었다. 그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아 계속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러다 일순 손에 힘을 주어 작은 머리를 꾹 내리눌렀다. 베개에 입과 코가 파묻혀 숨이 막히는지 웅크리고 있던 몸이 버둥거렸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그리 괴롭힐 생각은 아니었기에 금방 놔주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니 기특하게도 일어나 앉는다. 벨라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으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그의 손이 달아났던 벨라를 잡아채 끌어당겼다. 겨우 일어나 앉은 몸을 다시 눕히며 머리 아래로 베개를 대 주었다. 그의 손이 아까처럼 머리칼을 매만졌다.

벨라는 가만히 그의 곁에 누워 손길을 받아 냈다. 오늘은 이러고 있는 것이 그의 마음에 든 듯했다.

“그럼 이제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말해 봐.”

벨라는 왜 며칠 동안 기분이 침울한지 잘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소만에서 본 충격적인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맴도니 당연했다.

특히, 제 또래로 보이던 남자애가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참혹하게 맞던 모습이 자꾸만 저를 괴롭혀댔다. 그 모습을 본 것만으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눈도 안 보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맞는 게 마치 저의 처지와 비슷해 보여 씁쓸한 연민을 자아냈다. 같잖은 동정이었다.

그에게 도와 달라고 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아이는 계속 그곳에 있는 건지.

“저, 공작님.”

“말해.”

“그, 소만에서 봤던 노예…… 있잖아요. 공작님이 구해 주셨던…….”

“응.”

“어떻게 됐어요……?”

“글쎄. 말을 좀 안 들어서.”

무덤덤한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래서, 그냥 죽여 버린 걸까?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불안감이 더욱 치솟았다.

“죽이셨……어요?”

그는 벨라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웃지 않는 눈에 숨기지 않은 잔혹함이 드러났다.

“그게 왜 궁금할까.”

차가운 손이 그녀의 따끈한 목덜미를 뭉근히 쓰다듬었다. 벨라는 이불을 꼬옥 그러쥐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등줄기가 따끔거렸다.

“왜, 죽이면 안 돼?”

“……아니요.”

“내 마음에 안 들면 죽이는 거지.”

“네…….”

그는 무엇이든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죽일 것이다. 저마저도 그의 손에 죽을 뻔한 적이 여러 번인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벨라는 제 걱정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일어나. 산책하러 가자.”

산책……. 이런 울적한 마음으로는 별로 움직이고 싶지 않아 그의 말에도 일어나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그렇다고 그의 뜻을 거스르려던 건 아니었다.

천천히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는 잠시의 게으름조차 봐주지 않았다.

“내가 널 너무 예뻐하지.”

서늘히 떨어지는 음성에 벨라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에릭과 산책하는 줄 알았던 벨라는 의아해하면서도 착실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걷는 방향이 아무리 봐도 산책 코스는 아니었다. 물어볼까 말까 그의 눈치를 살피던 벨라는 결국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했다.

“저, 공작님. ……저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가 불안으로 살짝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가는 방향이 어디인지는 그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대답해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복도 한구석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도착한 곳은 그녀에게 깊은 공포를 새겨주었던 지하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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