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벨라, 이리 와. 인사해야지?”
벨리아르는 태연하게 그녀를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 모습에 아슬아슬하던 로드릭의 표정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에 쐐기를 박은 건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벨라의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벨라 베일리입니다. 처음, 부단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벨라는 에릭이 미리 일러 준 내용을 차근차근 떠올리며 그대로 말했다. 당당하게 굴라는 지시도 있었기에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유의했다.
로드릭은 그제야 교황과 기사단장이 왜 그리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당부를 했는지 이해했다.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하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나. 애초에 마녀를 색출하러 온 것인데 너무 무르게 행동했다. 그냥 강경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다는 후회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각하,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 영애께서 인사하는데 안 받아 줄 건가? 기껏 그대에게 인사하겠다고 이리 기특하게 왔는데, 무안하겠어.”
공작은 명백히 저를 놀리고 있었다. 로드릭이 지금이라도 태도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벨리아르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경은 업무를 보러 온 것인데 내가 너무 태평했네. 사과하지.”
벨라의 눈을 확인한 응접실 안의 기사들이 사뭇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메마른 긴장감이 내려앉은 가운데서 오직 벨리아르 공작만 여유로운 자태였다.
“……괜찮습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비협조적으로 굴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벨리아르는 지금부터 아주 협조적으로 나가 줄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며칠 전부터 기껏 성을 정돈해 둔 것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니 며칠간 성에서 머물면서 천천히 마녀를 찾아보도록 해.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됐을 텐데.”
“예?”
생각지 못한 권유에 로드릭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성하의 기대가 크실 텐데 맨손으로 돌아갈 순 없잖나.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가져가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니, 여기서 간악한 마녀를 잘 찾아보라는 소리야.”
벨리아르가 벨라의 허리를 감아 제 옆으로 바짝 당겼다. 등허리를 쓸어내리던 나른한 손길이 은빛 머리칼을 지분거렸다.
그의 시선이 불안한 상황 속에서 오로지 저를 의지하며 쫓는 보라색 눈동자를 만족스러운 듯 휘감았다.
“혹시 아나, 열심히 찾다 보면 자네 눈앞에 마녀가 하늘에서 똑 떨어져 줄지.”
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미 귀가 막혀 버린 로드릭에겐 그의 말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하늘을 찌를 듯 오만한 태도에도 로드릭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오만함이 거슬리지 않을 만큼 매우 자연스러운 탓도 있었다.
* * *
기사들이 물러가고, 응접실 안에는 셋만 남았다. 벨리아르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니 정오의 나른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슬슬 대가를 받을 때가 된 것 같네.”
“준비하겠습니다.”
“그 전에, 벨라 산책 좀 시켜. 날이 좋네.”
벨라는 제 이름이 나오자 살짝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내내 혼란스럽기만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신전의 기사들도 그렇고, 무려 부단장에게 직접 인사했던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 아무 일 없었단 듯이 태연히 산책 얘기를 꺼내는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저, 이제 산책은 혼자 할 수 있어요. 에릭 경 귀찮으실 텐데…….”
그의 옅은 한숨 소리에 차마 말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창 너머에서 천천히 제게로 닿는 시선에 다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내가 그렇게 하라는데, 우리 벨라는 그러기 싫은가 봐.”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게 아니라…….”
날씨가 좋으니 산책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가 아니라 일방적인 지시였나 보다. 묵직한 발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제치고 다가왔다.
그가 앞에 서자 커다랗게 그늘이 졌다. 내리쬐던 온 햇살을 그가 다 빼앗아가 버린 듯했다.
“그럼 지금 뭘 해야 하지?”
“……산책이요.”
“혼자?”
“아니요, 에릭 경과 함께…….”
“그래, 착하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이제 그만 나가라는 무언의 지시가 내려졌다. 에릭이 문을 열고선 그녀를 기다렸다.
오늘은 굳이 돌아다니고 싶지 않은데. 특히 신전의 기사들과 마주치는 것이 상당히 껄끄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에릭이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살며시 걸음을 돌려 문 쪽으로 다가갈 무렵, 그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 벨라.”
“네?”
“이제 발목은 다 나았으니 에릭의 부축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
“네? ……네.”
순간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의도를 파악했다. 아마 예전에 발목을 다쳤을 때 에릭의 팔을 잡고 걷던 모습을 그가 본 모양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한 경고를 내뿜고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작열하는 태양처럼 붉은 눈동자가 저를 확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에릭의 팔 한쪽이 사라지면, 그건 벨라 네 탓이야.”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얹어지는 듯했다. 그나마 편했던 에릭이 다시 조금 불편해졌다.
“가 봐.”
그제야 벨라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응접실을 나섰다.
에릭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 걸었다. 오늘은 그것이 호위하기 위해서라기보단, 감시의 느낌이 짙었다.
에릭과 산책하는 건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늘 이렇게 살짝 뒤에서 걷다가 어느 순간 보면 나란히 걷곤 했다.
“……저번에 에릭 경의 팔을 잡고 걷는 걸 보셨나 봐요.”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제 팔 잘릴 걱정 하지 마시고 표정 좀 푸세요. 요즘 영 기운이 없어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소만은 어떠셨습니까?”
소만 이야기가 나오자 일순 그녀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대화를 좀 해 보려고 주제를 꺼냈던 에릭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다소 당황스러웠다.
분명 제 주인은 그녀에게 거리도 구경시켜 주고 옷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 준 데다 좋은 곳도 데려가 주었다고 했는데.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침울한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한동안 기운이 없었던 게, 소만에서 무슨 일이 있긴 했나 보다.
벨라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조용히 감상을 내뱉었다.
“……무지개 같았어요.”
“……예?”
에릭이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지개라고 한 것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어감이 조금 묘하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입술이 살짝 불퉁하고, 초연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니 에릭은 자신이 오해해서 들은 것이라 결론 내렸다. 풀 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엔 그저 오색 빛깔 무지개가 딱 어울렸다.
“참 예쁜데, 그런 무지개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더라고요.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는 게, 딱 무지개 같아요. 소만이 그랬어요.”
다시는 소만에 가고 싶지 않아요.
침울하게 가라앉은 벨라의 표정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참 예쁘게 보였었는데. 자신이 그렸던 그런 예쁜 모습은 너무 멀리 있었다. 언젠가 닿을 수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멀리.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냥 모든 것이 허상 같았다. 원래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여실히 깨닫게 되니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무지개를 좇으려다가 코앞의 구덩이를 보지 못하고 고꾸라져 버렸다.
에릭은 어설픈 위로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에겐 어린 아가씨를 다정하게 위로하는 재주 따윈 없었다.
제 할 일은 그저 주인의 명령에 따라 그녀를 산책시키는 것뿐이었다. 더 자세히는, 그녀에게로 슬금슬금 쏟아지는 외부인의 시선을 파악하고 경계하는 것.
굳이 차단할 필요까진 없으니 자연스럽게 벨라를 기사들의 숙소와 가까운 북쪽으로 내몰았다.
에릭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로드릭과 부관이 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속셈일까요?”
로드릭을 필두로 한 대신전의 조사단이 며칠간 성에 머물며 마녀를 색출해 내는 작업에 돌입할 것이다.
벨리아르는 그 과정에서 성에 속한 사람 중 누구든 의심 가는 자가 있으면 성실히 조사에 응하겠다는 약속도 해 주었다.
그러나 로드릭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머리가 안 돌아가진 않았다.
말은 그리했어도, 가장 의심 가는 남작 영애를 잡아 조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저리 대놓고 사냥개를 붙여 놓지 않았나.
아직 공작의 속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했다간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그땐 고작 어깨가 아니라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저 영애를 잘 주시해. 이상 동향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각하께서 직접 찾아보라고 허락하셨으니, 그렇게 해야지.”
로드릭은 우선 한발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인데, 허무하게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로드릭은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강렬하게 쫓으며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저 영애가 정말 간악한 마녀인지는 신전으로 데려가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는지 벨라가 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떨궜다.
에릭과 대화하며 걷느라 잘 몰랐었는데, 곳곳에 낯선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긋지긋하게 그녀를 괴롭히던 여신의 문장이었다.
“……에릭 경, 저 화원에 가고 싶어요.”
무심코 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활짝 핀 꽃들을 보면 이 불안하고 어두운 마음이 좀 달래질까 싶었다.
“불안하십니까?”
“절 잡으러 온 거잖아요.”
“헤버튼에서 도망친 마녀를 잡으러 온 거죠.”
태연히 답하는 에릭의 말에 혼란이 더해졌다.
그건 나인데……. 내가 맞는데.
순간, 벨리아르 공작이 자신을 신전에 넘기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솟구쳤다. 그래서 에릭이 일부러 로드릭의 앞에 데려온 건 아닐까, 하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예. 그러니 베일리 남작 영애께서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죠. 평생을 곱게 자라서 그런 험한 세상 따위는 모르시잖아요.”
마치 몰라야 한다는 투였다. 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지금 마녀로 쫓기는 평민 벨라가 아니라 귀한 남작가의 영애여야 했다.
에릭은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지개는 그냥 무지개로 놓고 보세요. 멀리서 보고 예쁘다고 좋아하면 그뿐입니다. 아가씨껜 그게 어울려요.”
이건 위로일까. 더 이상 생각하기 지쳤던 벨라는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에게서든 에릭에게서든, 지금은 누구에게서든 달아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