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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40)화 (40/180)

40화

그는 두려움으로 얼어붙어 있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채찍의 손잡이 부분으로 턱을 들어 올리자 작은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 예쁜 입으로 그딴 말 지껄이면 안 되겠지?”

잘못을 짚어주자 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벨리아르는 그 모습을 보며 저택에 돌아가면 물부터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뭘 안 그래.”

“그런…… 그런 생각, 안 할게요…….”

“그런 못된 생각이나 하라고 번거롭게 널 여기 데려온 게 아니잖아.”

“네…….”

그에게 벨라는 사냥감이었지, 노예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이진 않았으니 제 손으로 거둔 것이 맞았다. 완벽한 제 것이 분명한데.

그럼 마땅히 복종하고 순응해야지, 왜 자꾸 한 번씩 엇나간 생각을 할까.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잘 구경하고, 돌아가서 저녁 먹자.”

손잡이로 턱을 톡톡 건드리며 달래듯 말했다. 아래로 내리깐 벨라의 시선에 늘어져 흔들리는 채찍이 보였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마음에 신경이 쏠려 대답하는 걸 잊었다. 곧바로 그의 단호한 음성이 떨어졌다.

“대답해야지.”

“……네.”

얌전히 대답은 잘하는 벨라를 보며 그는 무언가 결단을 내렸다.

빼곡히 늘어선 철장 안엔 셀 수 없이 많은 노예가 있었다. 아까처럼 홀로 갇혀 있기도 하고, 여러 명이 한데 뭉쳐 있기도 했다. 단순히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조차 그녀에겐 크나큰 고역이었다.

세상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 떨어지면 이런 느낌일까. 이곳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여실히 느껴지는 탓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이 한데 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차마 무시할 수 없었던 벨라는 결국 그쪽으로 눈길을 틀고 말았다.

“이 쓸모없는 놈!”

그녀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일방적으로 구타당하고 있었다. 안타깝게 일그러진 그녀의 눈동자에 그 모습이 담겼다.

그는 평소처럼 벨라를 부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핏 본 남자는 눈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벨라는 그 사실을 깨닫고 더욱 아픈 얼굴을 했지만, 벨리아르는 남자가 맞는 이유가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벨리아르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벨라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저 아이에게 뜻밖의 행운이 닿는 순간이었다.

“왜, 마음에 들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불쌍해서?”

벨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동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것을 모른 척 지나가지 않았다. 벨리아르가 다가와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옅게 웃음기 맴도는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딱히 너와 다를 것도 없잖아. 불쌍할 게 뭐 있어.”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척 눈을 가리고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었던 그녀를 책망했다. 벨라는 또 한 번 비참해져야 했다.

“왜……, 왜 저렇게 때리는 거예요?”

“노예니까. 내가 노예의 뜻까지 알려줘야 할까?”

“……노예라고 저렇게 때릴 필요까진 없잖아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쓸모없는 게 맞았고, 노예는 조금의 쓸모도 없으면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 몸뚱어리가 남아 있으니 저리 관리인들의 스트레스를 푸는 용도로나 쓰이는 것이다. 어디 팔아넘기지도 못하는 상태 같으니 저러다 죽으면 그만이었다.

“우리 벨라는 참, 마음이 여려.”

이리 사사로운 것에 마음을 쓰다간 남아나는 것이 없을 텐데.

벨리아르는 진정으로 가여워하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으로 투명한 눈물방울이 스며들었다. 겨우 말라가던 눈물샘이 또 샘솟고 만 것이다.

“공작님……. 저러다 죽겠어요.”

벨라가 울먹이며 그에게 애원했다.

“안 죽어. 인간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아.”

쓸모없는 인간 하나 죽든 말든 그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눈이라도 보였다면 기꺼이 거둬 줄 수도 있었겠지만. 아니, 오히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낮게 숨을 흘리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눈가가 새빨개지도록 우는 벨라의 모습을 보니 내일도 예쁜 눈이 퉁퉁 붓겠구나, 하는 태평한 생각이었다.

그 모습이 퍽 가여우니 자그마한 선물과 함께 좀 달래 줄까 하는 마음이 스쳤다.

“도와줄까?”

슬쩍 건넨 말이 꽤 달콤했는지 일렁일렁한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벨리아르는 축 처진 눈꼬리 끝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저놈은 어차피 죽어. 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어도 아무도 모르는 새에 죽었겠지. 그러니 마음 아파할 필요 없어.”

“……도와주실 수…… 있어요?”

“네가 원한다면.”

그녀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 여기서 눈 감고 지나가지 못할 것이고, 그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용하는 것이다.

뻔히 앞에 덫이 있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럼…… 도와주세요…….”

그의 손이 등을 두어 번 도닥이고 지나갔다. 그의 묵직한 발소리가 어두운 통로 안을 장악했다. 벨리아르가 다가가니 자연스레 폭력이 줄어들었다.

“그만.”

이곳에서 벨리아르 공작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갇힌 노예들도 어렴풋이 알 정도니. 그에게 팔려 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은 곧 죽음보다 더한 것을 의미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혹시 저희가 방해되신 거면…….”

벨리아르가 바닥을 향해 눈짓했다.

“그거.”

“예?”

“그게 필요해.”

아무런 감정 없이 담담한 눈빛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앳된 몸이 움찔거렸다.

“아, 예,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됐어.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두고 가.”

그가 남자의 얼굴을 발끝으로 건드려 확인했다. 거기까지 보던 벨라는 처연히 눈을 감았다.

과연 잘한 선택일까 싶은 생각이 요동쳤다.

밖으로 나오니 원래 타고 왔던 그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무겁고 고됐던 벨라는 먼저 마차에 타 있으라는 그의 말이 정말 반가웠다.

벨리아르는 처음에 보았던 관리인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아마 그가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했다.

벨라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마음이 한없이 침울해서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 지금이라도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더 이상 소만이라는 나라가 찬란하게 보이지 않았다.

희망의 빛깔로 가득 찼던 소만은 어느새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잿빛으로 뒤덮였다.

* * *

둘이 소만에 다녀온 후 변화가 있다면, 벨라의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과 성에 새로운 사용인이 두어 명 늘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심정이 어떻건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그는 이불 속에 웅크려있는 벨라를 두고 집무실로 가 에릭을 찾았다.

“전에 말씀하셨던 이안 에드레이즈에 대한 정보입니다.”

제법 상세하게 그려진 초상화도 있었다. 아직 소년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얼굴이었다.

내용을 훑어 내려가던 그가 재밌는 것이라도 발견한 듯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상심이 크겠네.”

짧게 내비치고 사그라진 관심이었다. 그는 종이를 한구석에 내려놓으며 에릭의 수고를 치하했다.

에릭은 며칠 전 그가 소만에서 가져온 것들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평소처럼 사용인이라는 틀에 맞춰 성의 일부가 되었지만, 처리하지 못한 하나가 있었다.

“이번에 가져오신 그 애매한 물건은 뭔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 그거. 잘 놔둬. 벨라 거야.”

“예, 일단은 지하에 두겠습니다.”

벨리아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기에 에릭은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출발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꽤 됐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손님 맞을 준비는 미리 해 두었습니다. 기사들이 묵을 숙소도 마련해 두었고요.”

대신전에서 부기사단장 로드릭이 조사단을 꾸려 베른으로 출발한다는 정보를 며칠 전에 입수했다. 덕분에 성은 느긋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마쳤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남았지.”

“예?”

분명 놓친 것이 없는데. 어리둥절한 에릭에게 벨리아르는 조용히 웃으며 해답을 주었다.

“가서 벨라 깨워.”

* * *

“각하, 헤버튼에서 도망친 마녀의 존재를 기억하십니까?”

벨리아르는 페이트 기사단의 부단장인 로드릭에 대해 세간에 알려진 정보는 모두 파악한 뒤였다. 오히려 단장인 루크보다 조금 더 까다로운 상대라고 봐도 좋았다.

루크는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는 교황과 비슷한 과라 은근 다루기 쉬운 편이지만, 로드릭처럼 스스로를 철저히 속이는 타입은 나름 골치 아팠다.

대신, 손안에 올려놓고 굴려서 그 반응을 보는 재미는 쏠쏠했기에 적당히 응해 주기로 했다.

“아아, 당연히 기억하지. 그 일 때문에 우리 루크 경께서 얼마나 상심이 크셨는데. 어깨는 좀 괜찮다던가?”

“……예, 다행히 생명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겠지.”

고작 어깨 한 번 찔렸다고 엄살은. 교황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친 기사단장이 가소로워 옅은 조소를 흘렸다.

로드릭은 짧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고 이곳에 온 본분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강직한 눈빛이 벨리아르를 똑바로 향했다.

“……조금 실례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기사들을 이끌고 온 이유는, 대신전으로 접수된 고발장 때문입니다.”

곁에 서 있던 기사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이미 벨리아르가 본 적 있던 고발장이었다.

“며칠 전, 각하께서 주도하신 연회에서 그 마녀를 목격했다는 내용입니다. 신원을 조사해 본 결과…….”

“그래서?”

벨리아르가 자연스레 로드릭의 말을 끊어 냈다. 작은 화살에도 흔들리는 게 눈에 보여 벨리아르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곁들었다.

“……각하께서 후견하고 계신…….”

“내가 그리 한가하지 않아서. 그러니까 경의 말은, 내 성에 쥐새끼 같은 마녀가 숨어들었다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마녀를 잡게 협조해 달라?”

“예.”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건방지긴.

마음 같아선 눈앞의 이놈도 팔다리 하나 정도는 잘라서 교황의 눈앞에 던져 주고 싶지만, 이번엔 그런 무식한 방법보다는 재미있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수긍한다는 듯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로드릭은 오히려 그의 대답에 살짝 당황했다. 분명 성하께서도 그렇고 단장님도 그렇고, 벨리아르 공작이 결코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 했다.

단단히 각오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에 이리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인데.

생각이 많아진 사이, 노크 소리가 울리고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아가씨 모셔왔습니다.”

“들어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누군가 들어왔고,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들어오는 여자를 향해 벨리아르 공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잘 잤어?”

다정한 인사를 건네기까지. 조심스럽게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이는 여자의 눈을 본 순간, 로드릭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이 조사에 협조할 생각이 애초에 눈곱만큼도 없었다. 기어코 공작의 덫에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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