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39)화 (39/180)

39화

거리의 불빛마저 차갑고 눅눅했다. 등을 많이 밝혀 놓은 것도 아니라 발밑이 어두웠다.

“잘 따라와. 여기선 잃어버리면 찾기 곤란하니까.”

낮처럼 앞세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다고 뒤따라가는 것도 편안하진 않았다. 그의 너른 보폭에 자꾸만 거리가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불안함에 손끝이 움찔거렸다.

이따금 험악한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날 선 눈빛을 쏘곤 했다. 자꾸만 고개가 수그러들고 어깨도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면 그와의 거리가 꽤 벌어져 있었다. 순간 불안이 치솟은 벨라는 황급히 그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앞을 스치는 그의 옷자락으로 여러 번 손이 닿았다 떨어졌다. 머뭇거리던 벨라는 결국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티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끝부분만 살짝 잡았는데, 그가 잠시 후 걸음을 멈췄다.

살며시 옷깃을 쥐고 있는 손으로 무감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기분 나빴을까 싶어 벨라는 얼른 손을 놓았다.

“……죄, 죄송해요.”

“고개 들고 똑바로 앞 보면서 걸어.”

“……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벨라 역시 그와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가장 신경을 쏟아부었다.

거리는 딱 봐도 짙은 어둠에 익숙한 곳이었다. 낮에는 죽어있고 해가 지고 달이 떠야만 생기가 도는.

붉은 등이 걸린 가게에서 고혹적인 미소를 걸친 여자가 나왔다. 그녀의 관심은 벨리아르보다 그 뒤에 숨듯이 걸어가는 벨라에게 더욱 쏠려 있었다. 원래 약하고 만만할수록 눈길이 가는 법이다.

“어머, 귀여운 아가씨가 걸어가네?”

다분히 놀리는 어투였다. 그의 시선이 닿자 안쪽에서 누군가 다급히 여자를 끌어들였다.

“엘리,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들어와.”

제법 넓은 길이라 충분히 마차가 지나다닐 만했다. 왜 굳이 이런 험한 길을 걸어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하는 일에 토를 달 순 없었다.

벨리아르는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로 길을 틀었다. 좁은 길이 답답하게 숨을 막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너른 등만 악착같이 쫓았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다시 넓은 길이 나왔다. 그곳엔 다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체 어디를 가려고 이리 복잡한 길을 돌아가는 걸까. 마차 안에 마주 앉은 그가 태연히 물었다.

“왜 그리 울상이야.”

“……잘 모르겠어요.”

“일하러 왔는데 신경 쓰이게 하면 안 되겠지?”

“……네.”

벨라는 털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베른보다는 덜 추운 곳인데 이상하게 살갗으로 파고드는 냉기가 더욱 서늘했다.

마차는 살짝 오르막길을 달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동안 벨리아르는 그녀에게 나른한 시선을 두었고, 벨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좋은 곳, 재밌는 곳……. 그의 기준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아직 어떤 곳인지 보진 못했지만 그리 좋은 기운이 느껴지진 않았다. 특히, 여유롭고 즐거워 보이는 그의 태도에서 그런 게 확연히 느껴졌다.

곧 마차에서 내리자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그를 향해 깍듯이 예를 갖췄다. 뒤로 보이는 거대한 철문이 스산했다.

“오셨습니까. 급하게 연락을 주셔서 물건을 많이 준비하진 못했습니다.”

“상관없어. 오늘은 한둘만 보면 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형형한 눈빛을 가진 이들이 그림자처럼 곳곳을 지키고 있었다.

“예, 들어가시죠.”

그를 따라 들어가는 순간 남자의 시선이 닿았다. 찰나에 스친 눈빛이 날카롭고 서늘해서 벨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반사적으로 앞서가는 그의 옷깃을 붙잡으려다 허공에서 손이 멈칫거렸다. 이번엔 화를 낼지도 몰랐다.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더욱 공기가 축축해지고 점점 빛이 사라졌다. 밖을 비추던 옅은 달빛마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와 남자는 더 깊숙한 곳으로 걸음 했다. 벨라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의 뒷모습에만 의존하며 꾸역꾸역 걸었다. 일하러 왔으니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는 그의 말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느낌만 축축한 게 아니었는지, 이따금 찰박한 물웅덩이가 밟혔다. 그럴 때마다 벨라는 소리 없이 놀라곤 했다. 간혹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나기도 했다.

“따로 정리하지 말라고 하셔서, 조금 어수선합니다.”

“딱 적당해.”

어느 정도 들어가자 남자는 벽에 걸린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제야 눈앞의 시야가 조금 트였다. 벨라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조용히 살펴보고 싶으니 물러가 있어.”

“예, 필요하신 것 있으면 바로 찾으십시오.”

남자는 다시 한번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어두운 통로로 사라졌다.

벨리아르가 느긋한 걸음을 뗐다. 그러나 벨라는 이전처럼 그의 뒤로 바짝 따라붙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때가 나았는데. 보고 나니 차마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벨리아르는 어느 철장 앞에 서서 그녀에게 단호한 눈길을 보냈다.

“벨라, 이리 와.”

분명한 명령이었고, 그것은 얼어붙은 벨라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움직여 그의 앞에 섰지만 차마 철장 너머의 모습은 볼 수 없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거칠게 팔을 잡아챈 그가 벨라를 철장 앞에 세웠다. 그리고 턱을 쥐고 올려 고개를 들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숨이 불안하게 흐트러졌다.

“똑바로 봐야지.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소만의 모습인데.”

스쳐 가듯 보았던 장면을 기어코 확실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잘못 본 것으로 생각하고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한층 더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또 하나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날아와 박혔다.

“눈 떠.”

턱을 쥔 손아귀의 힘이 더욱 거세졌다. 어쩔 수 없이 뜨인 눈앞에 처참한 광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짐승처럼 족쇄에 묶여 갇힌 사람의 모습이었다. 옷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할 정도로 너덜너덜한 천 사이사이로 보기 흉한 상처들이 엿보였다.

뼈의 형태가 확연히 보일 만큼 비쩍 마른 남자는 거의 죽어 가듯 겨우 숨만 내뱉고 있었다. 그 숨마저 간헐적이라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해졌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탁했다.

금방이라도 생명이 꺼질 듯한 모습에 벨라의 눈가로 참혹한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안타깝다는 어투로 귓가에 읊조렸다.

“말을 잘 안 들었나 봐. 벌을 받고 있나 본데.”

노예라고 다 이런 상태로 관리되는 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이 남자는 특히 저항이 심했을 것이다.

처음 노예가 되어 여기로 끌려오는 자들은 종종 이런 모습이 되곤 했다. 그의 눈엔 제법 익숙한 꼴이었다.

“……이러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울 듯이 내뱉는 말이 가여워 그는 일렁일렁 젖어 들어가는 눈가를 다정한 손길로 쓸어주었다.

“왜?”

“이건……, 너무 비인간적이에요…….”

그녀가 눈을 질끈 감을 때마다 굵은 눈물방울이 붉게 상기된 뺨을 타고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던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매를 비틀었다.

우리 벨라는 참 예쁘게도 울지.

“벨라, 제국에선 노예가 불법이지만, 여기선 합법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벨라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그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애초에 왜 소만에 가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도.

“외지인에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네가 과연 소만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도망쳤던 날, 그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히 국경을 빠져나갔다면……. 자신을 맞이할 소만의 모습이 마냥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우리 벨라는 특히 눈동자가 예쁘니까, 여색을 밝히는 부호들이 탐내기 딱 좋았겠네.”

그는 마치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얘기를 하듯 평온한 어투로 감상을 전했다. 그게 더 비참하고 아팠다. 그가 턱을 놓아주며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그럼 꽤 비싸게 팔렸을 텐데.”

낮에 잠깐 맛보았던 일상은 그릇된 허상이었을 뿐이다. 그가 허락해 주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보여주는 이곳이야말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면 자신이 맞이했을 현실이었다.

그는 벨라에게 감긴 사슬을 잡고서 점점 절벽으로 내몰았다. 그러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의지하려 하면 그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 단호함이 서럽고 고달팠다. 벨라는 어쩔 수 없이 제게 매어진 사슬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추락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뛰어내리길 바라는 걸까. 그래서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일지도 몰랐다. 떨쳐 내려고.

이따금 그가 내비치던 무감하고 냉정한 눈빛이 떠올랐다. 하긴, 단순히 호기심으로 살려 두었는데 그 흥미가 오래 갈 리 없었다.

그는 사냥을 즐기니까, 서서히 내몰아 스스로 덫에 빠져들게끔 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곳은 정말 그런 잔혹한 덫일까.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 얌전히 죽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어설픈 원망을 담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래서, 저 파시려고…… 여기로 데려오신 거예요?”

벨리아르가 느릿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가 화를 돋웠다.

기껏 생각한 게 저 꼬락서니일까. 주제를 알라고 데려왔더니 또 허락해 준 선 너머로 튀어 나간다.

언제쯤, 어떻게 해야 제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지워 버릴 수 있을까. 끝없이 고개를 쳐드는 그 싹의 모가지를 아예 잘라내 버렸으면 하는데.

벨리아르는 진지한 고민을 품은 채 벽 쪽으로 향했다. 횃불 옆에 걸려 있던 무언가를 집어 들고서 느긋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벨라.”

그는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며 손에 쥔 것을 양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노예들에게 흔히 쓰는 채찍이었다. 순간 벨라의 숨이 멎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