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벨라는 가게 밖으로 나와 옷이 든 종이봉투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이따금 옷을 보며 배시시 웃는 모습에 벨리아르는 조금 황당했다. 대체 무엇이 그리 좋을까.
벨라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벨리아르는 어느새 그녀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공작님, 이거 내일 입어도 돼요?”
마담 폴린의 옷을 놔두고 저런 추레한 옷을 입겠다니. 직접 사 주긴 했지만 벨리아르는 못마땅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아니.”
“네…….”
그의 표정을 본 벨라는 곧바로 포기했다. 나중에 성으로 돌아가면 그때 입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릭에게도 자랑해야겠다고.
하탐의 번화가, 그중에서 둘이 걷고 있는 길은 동그랗게 이어진 길이었다. 그러니 쭉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차에서 내린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 길을 한 반쯤 걸었을까, 자꾸만 벨라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길을 가며 계속 보이는 노점상이었는데, 신기한 것을 팔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그 하얗고 동글동글한 것을 콕 찍어 먹는 모습이 자꾸 눈에 띄었다. 결국, 서서히 느려지던 벨라의 걸음이 멈추었다.
“왜.”
“……공작님은 저게 뭔지 아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어느 노점상을 가리켰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좀 지난 데다 벨라는 아침도 많이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플 테지. 사 달라고 은근히 운을 떼는 것이다.
하지만 벨리아르는 저택의 고급스러운 음식을 두고 저런 것으로 배를 채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택에 가서 식사할 거야. 참아.”
“네…….”
그가 단칼에 자르자 벨라는 아쉬워하면서도 더 말하지 않았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저 하얗고 동글동글한 것은 대체 무엇인지 파는 노점상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애써 못 본 체하고 지나쳐도 몇 걸음 지나면 또 나타나곤 했다. 그러니 이대로 맛보지 못하고 베른으로 돌아가게 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이렇게 바깥 구경도 시켜 주고 옷도 사 주었으니…… 그의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한 번쯤 더 말해 봐도 되지 않을까.
흘끗흘끗 그의 눈치를 살피던 벨라는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거 유명한 건가 봐요. 여기도 팔아요. 저기도 팔고…….”
“벨라, 내가 뭐라고 했지?”
우물쭈물 말할 때마다 그가 질책하던 것이 떠올랐다. 벨라는 재빠르게 원인을 알아챈 스스로를 칭찬했다.
“……저거 하나만 사 주시면 안 될까요? 맛있어 보여서……. 먹어 보고 싶어요.”
“저런 거 먹으면 안 그래도 밥 잘 안 먹는 우리 벨라가 참 식사를 잘하겠다?”
아침에도 식사를 꽤 남겼던 터라 조금 찔렸지만, 벨라는 이상한 자신감이 샘솟았다. 저걸 맛보고 나면 입맛이 돌아서 점심 식사를 아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부른 말을 하고 말았다.
“오늘은 안 남기고 다 먹을게요.”
“확실해?”
“네, 정말로요.”
벨리아르는 자신 있게 말하는 벨라를 보며 마음이 살짝 뒤틀렸다.
또 배 터지도록 먹어 봐야 저런 소릴 함부로 안 하지.
보라색 눈동자가 간절하게 반짝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마 배가 고파서 그런다기보단 처음 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일 것이다. 그는 동전 몇 개를 벨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가서 사 와.”
그러나 직접 사 오라는 말에 벨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저, 소만어 할 줄 모르는데…….”
“제국 말로 해도 간단한 건 다 알아들어. 가서 하나 달라고 해.”
“……네.”
그래도 자신이 없는지 노점상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에 영 힘이 없었다. 벨리아르는 제자리에 서서 벨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료하던 일상에 이런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왜 인간들이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을 찍어 놓고 좋아하는지 조금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조금 있으니 벨라가 손에 하얀 구슬 떡 여러 개가 담긴 통을 들고 해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공작님 먼저 드세요.”
기특하게도 먼저 먹어 보라 내미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통째로 가져갔다. 그러자 조금 당황하는 게 보여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얇은 나무 꼬챙이로 하나를 콕 찍어 입에 넣어 주니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변했다.
“맛있어?”
“네!”
벨라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말캉하고 쫄깃한 게 식감도 좋고 고소했다. 게다가 안에 꿀이 들어 있었는지 씹을수록 달콤한 맛이 퍼져서 정말 맛있었다.
제 손에 들려 있었으면 열심히 먹었을 텐데, 그의 손에 있으니 줄 때만 하나씩 받아먹었다.
놀리려 그러는 건지 아니면 급하게 먹을까 봐 그러는 건지, 그는 정말 천천히 하나씩 주었다. 살짝 감질이 나긴 했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또 하나를 언제 주려나 하며 걷는데 문득,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성에서는 에릭만 검을 소지하고 다녔기에 그 모습이 조금 생소했다. 마침 신기한 문양의 매듭을 파는 가게들도 종종 보였다.
“……공작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우리 벨라는 참 궁금한 것도 많지. 이번엔 뭐가 궁금할까?”
“공작님은 검을 잘 다루세요?”
“왜, 내가 못 미더워?”
물론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 물은 건 절대 아니었다. 벨리아르 공작이 검술에도 매우 능하다는 건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고 벨라 역시 모르지 않았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부정해 보았으나 이미 늦은 듯싶다. 그의 미소에서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냥 처음부터 검을 좋아하시냐고 물을 걸 그랬다.
“에릭을 데려올 걸 그랬네. 그렇지?”
그 말이 왜 그쪽으로 튀는 건지. 벨라의 표정이 살짝 울상으로 변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아, 해.”
갑자기 입을 벌리라고 하는 이유는 몰랐지만, 어쨌든 벌리라고 했으니 벌렸다.
그러자 동그란 게 하나 입안으로 쏙 들어왔다. 떡이었다. 이걸 주려고 그랬구나 싶은 찰나, 입을 닫기 전에 하나가 더 들어왔다.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입이 어느 정도 차자 벨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세 개를 한꺼번에 먹기엔 너무 많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보자 그는 또 하나를 내밀었다.
“안 벌려?”
단호하고 냉정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벌렸다. 이미 들어갈 곳이 없을 것 같았는데 그 후로도 두 개가 더 들어왔다.
숨을 쉬는 것도 좀 버거운 것 같아서 열심히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어으 아아여…….”
입안이 가득 차서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았다.
“시끄러워.”
벨라는 등 돌려 가는 벨리아르를 얼른 뒤따랐다. 뭐라 말도 못 하고 울먹이며 열심히 씹는 데에 집중했다. 그냥 삼킬 수도 없고,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똑바로 씹어서 삼켜. 체하면 그 즉시 베른으로 돌아갈 거니까.”
그럼 애초에 이렇게 무식하게 쑤셔 넣지 말지…….
차마 말로 할 용기는 없고, 어차피 입도 막혀 있으니 벨라는 그저 그의 등 뒤에 대고 원망스러운 눈길을 쏟아 냈다.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입이 된통 고생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되는 양이 그녀의 몫으로 접시에 올랐다.
“안 남기고 먹겠다 했지.”
그건 보통의 양이었을 때 얘기였는데. 하지만 그런 전제를 붙이지 않았으니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네.”
그저 얌전히 답하고 열심히 먹는 수밖에. 아주 느릿하게, 기어코 접시를 다 비우고서야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아무리 급해도 섣불리 그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배가 너무 불러서 녹초처럼 소파에 앉아 있으니 그가 침대로 가서 자라 일렀다. 그 말을 들으니 나른하게 잠이 쏟아졌다.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제법 오래 잔 것 같았다. 일어나라고 깨우는 그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뜨니, 잠들기 전과는 달리 바깥이 매우 어둑했다.
“……공작님.”
눈을 떠도 자꾸만 다시 감겨서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애꿎게 그를 불렀다.
“좋은 곳 갈 건데. 안 일어나면 두고 갈 거야.”
“……아니에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 하는 대답에 벨리아르는 낮게 웃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직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 보려 허우적대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벨리아르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놓고 그녀의 행동을 감상했다. 어차피 해가 졌으니 시간은 여유로웠다.
몇 번이고 이불에 치대던 벨라는 정확히 그가 찻잔을 다 비웠을 때 부스스한 몸을 일으켰다.
“저녁 식사는 다녀와서 하자.”
“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냉큼 대답했다. 점심을 워낙 많이 먹어서 그런지 자고 일어나도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원래도 추웠지만 밤이 되니 날씨가 더욱 쌀쌀해졌다.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올라타니 차가운 바람에 졸음이 싹 달아났다.
그녀는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마차가 출발했다. 그가 창을 열지 못하게 해서 바깥을 볼 수도 없었다. 어차피 한밤중이라 보이는 것도 없었겠지만.
“저, 공작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재밌는 곳.”
대체 어떤 곳이길래 그가 재밌다고 하는 걸까.
궁금해서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론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도 전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포기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날아갔던 잠이 다시 눈꺼풀로 들러붙었다. 게다가 자꾸 하품까지 나와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졸려?”
“네, 조금……. 그래도 많이 잤으니까 금방 깰 거예요. 이미 깼어요.”
“잠이 늘었네.”
“……이제 조금만 잘게요.”
“칭찬이야.”
성에서도 가끔 늦잠을 잘 때가 있었지만 그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잠을 자는 건 전에 꿈을 꾸었을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피곤한 기색을 보인 적도 없고. 살짝 물어볼까 싶던 찰나,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축축한 물 냄새가 났다.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 곳은 얼핏 봐도 그리 재미있어 보이진 않았다.
“……공작님, 여긴…….”
낮에 갔던 곳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좁은 골목에선 이따금 음습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그제야 질척거리던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